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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에게 남기는 글

이제 80이 되었으니 심중에 남아있던 이야기를 남긴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는 항상 내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그것이 내 잘못인지 그들 잘못인진 모르겠다. 대신 가족관계에 문제가 없는 사위와 며느리는 작은 위안을 주곤한다. 아들 딸 이야기부터 하자. 둘은 대학 졸업 때까지 부모 속을 썩인 일 없다. 둘 다 건강하고, 학교 성적 좋았다. 아들은 고2 때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그때 옆동네에 살던 KBS 부장이 자기 딸을 이스라엘에 보냈다. 서울 사람 속셈은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룹 계열사 사장에서 물러나자, KBS부장 내외는 금방 안면을 바꾸었다. 그 후유증인지 아들은 성적이 떨어졌고, 연세대 의대 시험에 실패한 후, 재수 후 홍익대 전파공학과에 입학했다. 그후 신도리코에 입사했는데, 전무로 있던..

진주는 천리길(3)

진주는 천리길(3) 평소 남녀는 별처럼 머나먼 존재이다. 수천수만 광년 거리에 떨어진 별처럼 말을 건넬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러나 한번 입술이 닿은 후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된다. 정수는 그 뒤 진주에 내려가기만 하면 소희의 집에 머물렀다. 거기 강돌로 낮은 꽃담을 두른 별채가 있고, 별채 앞 작은 연못가에 늙은 매화나무가 있다. 창을 열면 대숲 너머로 반송(盤松) 키우는 넓은 묘판과 배 과수원이 보였다. 정수는 소희 아버지 서재였던 그곳에 머물곤 했다. 소희 아버지는 진주의 마지막 선비 성환혁 선생의 친구다. 부친은 해인대 효당(曉堂) 최범술 스님과 다도를 논하고, 비봉루 은초(隱樵) 정명수 선생과 추사체를 논하던 선비이다. 소희는 아버님 곁에서 다도와 서예를 배우다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기고 예정 글 2022.09.29

草書 조심

草書 조심 며칠 전 추석 인사 겸 안부 겸해서 동우대 교수가 서예 글씨 하나를 보내며, 뜻을 풀어보라는데 알 수가 없다. 서예가들은 알 수 없는 草書를 써서 사람 곤란하게 만든다. 行書나 隷書, 篆書는 대충 모양을 보고 뜻을 반은 짐작할 수 있지만, 초서야 완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수작 아닌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 국회의원동우회란 것이 있었다. 그들이 국회 본관 건물에서 서도전을 열었는데 당시 국회의장 이재형씨를 비롯해서, 정권 실세였던 노태우(당시는 국회의원) 등 40여명이 참석했고, 내가 모신 회장도 4대 국회의원이라 참석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윤길중 의원이라면 당시 국회의원 중에서 최고 명필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 분이 출품한 도연명의 초서 병풍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2.09.05

진주는 천리길(4)

진주는 천리길(4) 사람들은 흔히 진주를 천년 고도라고 부른다. 원래 진주는 가야와 백제 신라 세 나라 국경을 접한 요충지다. 오래된 성이 있고 골동품이 많다. 고령에서 하동까지 무진장한 고령토 광맥이 뻗어있고, 진주 인근에는 가마터가 많다. 진주와 합천에 박물관이 있고, 안의 거창 에는 고가들이 많고, 강굽이마다 정자가 있다. 합천 어느 식당에선 개에게 밥 주는 밥그릇이 대가야 때 사용한 토기였다고 한다. 어느 집에선 사랑방 문짝의 한지를 뜯어내다가 두 접 배접한 한지 한 겹에서 대원군 난초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소희의 집에도 그런 물건이 있었다. 부친이 쓰던 차반(茶盤)은 오래 동안 땅 속에 묻혀서 지열로 석탄처럼 광택 나는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것인데, 그건 보물로 칠만치 귀한 차반이다. ..

카테고리 없음 2022.09.04

가을 산책

가을 산책 가을 산책길은 뭔가 쓸쓸하다. 소매 끝에 싸늘히 느껴지는 바람맞으며 길에 나서면 시들은 꽃이 지난여름 생각게 한다. 무성한 가지 끝에 화려한 꽃 매달던 장미 덩굴은 이제 가지 끝에 여름 마지막 몇 송이 꽃 달아 애처롭다. 산책길이 허전하다. 붉게 물들던 접시꽃도, 황금빛 금계국도 이젠 볼 수 없다. 풀숲에 이슬 맺혔다. 지난여름 추억하는 풀벌레만 울고 있다. 문득 갈대에 눈이 간다. 폭우에 넘어졌던 갈대가 새파란 잎을 올리고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노래를 부를 것이다. 파스칼이었던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사람이. 갈대꽃 피면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이 오는가. 63년에 서울 왔으니 여기서 근 60년 살았다. 만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혹은 장미였고, 혹은 금계국이었고, 혹은 잣나무였다. ..

카테고리 없음 2022.09.02

나는 세상에서 잊혀졌네

나는 세상에서 잊혀졌네 고향에선 이제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중학생 때 가방 메고 건너다닌 다리는 그대로 있고 태양은 아직도 황금빛으로 비치건만 그때 친구는 거의 타계했거나 소식 모른다 서장대엔 새벽마다 소야곡 부르던 청년들이 있었고 밤에 집 근처로 찾아가 내가 세레나데 불렀던 소녀도 있는데 그들 소식 모두 알 수 없고 쓸쓸한 거리의 낮선 얼굴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떠돈지 50년 된 타향의 인심은 돌아서면 남이다 그들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런 건 상관 없다 노년이 깊어갈수록 고향 소식만 천금처럼 귀한데 간혹 촉석루 앞에 띄우는 유등과 뒤벼리 산책길 이야기는 듣는다 돌판에 얹저 나오는 냉면과 숯불 석쇠 불고기 구이 이야기는 듣는다 그러나 머리칼이 수선화 같..

카테고리 없음 2022.08.23

광화문 에피소드

한밤에 우연히 펄시스터 노랠 듣고 불현듯 옛 일 생각나서 이 글을 쓴다. 지금도 경솔하지만 젊은 시절엔 도가 더 심했던 것 같다. 졸업하던 해다. 군대 다녀온 나이 지긋한 복학생이 별로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윤 교수님이 한 여학생을 만나보라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 다방이 지금도 있는진 모르겠다. 광화문 시공관 안의 다방이다. 상대는 이대 졸업반으로, 교수님 친구 여동생이다. 인상이 펄시스터 배인순 같았다. 키도 늘씬하고 인상도 좋았다. 그런데 대화 하다가 전공이 꺼림칙 했다. 시골서 올라온 나같은 촌놈 생각에는 서울 태생으로 불문과 다니는 사람은 검소할 것 같진 않았다. 외국풍 좋아하고 왠지 사치스러울 것 같았다. 서로 인사하고 5분 쯤 되어 나는 자릴 옮기자고 했다. 그는 아마 어디 더 분위..

카테고리 없음 2022.08.21

이별하는 법에 대하여

이별하는 법에 대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愛別離苦라 한다. 이 괴로움을 나는 비교적 일찍 경험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였다. 문학과 철학 좋아하던 친구가 자살하자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대학을 중퇴하고 군에 입대했다. 자학하는 심정으로 3년간 운전병 생활을 한 후 제대하자 남해와 욕지도에서 2년간 시간 보냈다. 5년만에 복학한 대학시절 가장 친한 친구는 희랍에서 박사학위 받고 모교에서 강의하다가 골수암으로 세상 떠났다. 직장 시절 가장 친하던 후배는 속초에 연호콘도를 세웠지만 간암으로 타계했다. 유난히 친했던 K, C, O 라는 세 친구도 갔다. 그들은 나에게 삶의 기쁨을 주었지만, 삶의 공허와 애수도 주었다. 水流花開. 원래 천지는 물 흐르고 꽃 피는 곳이다. 나는 분..

수필 2022.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