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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에피소드

김현거사 2022. 8. 21. 23:33

한밤에 우연히 펄시스터 노랠 듣고 불현듯 옛 일 생각나서 이 글을 쓴다. 지금도 경솔하지만 젊은 시절엔 도가 더 심했던 것 같다. 졸업하던 해다. 군대 다녀온 나이 지긋한 복학생이 별로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윤 교수님이 한 여학생을 만나보라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 다방이 지금도 있는진 모르겠다. 광화문 시공관 안의 다방이다. 상대는 이대 졸업반으로, 교수님 친구 여동생이다. 인상이 펄시스터 배인순 같았다. 키도 늘씬하고 인상도 좋았다. 그런데 대화 하다가 전공이 꺼림칙 했다. 시골서 올라온 나같은 촌놈 생각에는 서울 태생으로 불문과 다니는 사람은 검소할 것 같진 않았다. 외국풍 좋아하고 왠지 사치스러울 것 같았다. 서로 인사하고 5분 쯤 되어 나는 자릴 옮기자고 했다. 그는 아마 어디 더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가자는 줄 알았을 것이다.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둘은 우산을 쓰고 잠시 걸었다. 내가 그의 집이 어느 쪽이냐고 묻자, 아마 그는 나중에 집에 바래다주고 갈려고 그러는 줄 알고 기분 좋았을 것이다. 신촌 쪽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 신촌 가는 버스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몇번 버스 냐고 물었고, 그 버스가 오자 타라고 하고 나는  타지 않았다. 그는 버스 안에서 황당했을 것이다. 만난지 5분만에 걷어차고 가는 놈도 있나? 대화다운 대화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 경상도 촌놈은 이유가 있었다. 만나자마자 줄곧 그의 시선이 내 옆에 쏠리고 있었다. 옆에 구봉서 씨가 앉아있었다. 맞선 보는 자리 비슷한 곳이다. 옆의 연예인에게 눈이 가는 사람 경박하다 싶었다. 그게 이유의 전부다.  80을 눈 앞에 두고 그때 일 생각하니 내가 경솔하긴 경솔한 놈이다. 적당히 대화 하다가 보냈어야 했다.  다행히 그는 챙피해서 그 일을 오빠에게 말하진 않은 모양이다. 윤 교수님도 사연을 몰랐을 것이다. 여하튼 그 여인 이제 칠십 중반은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풀리지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있다. 훗날 내가 철학과 후배와 결혼할 때 윤 교수님이 남들보다 세 배나 많은 축의금을 보냈다. 그 뜻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