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넘어서 심중에 남아있던 가족 이야기를 남긴다. 가족 생각하면 항상 좀 쓸쓸한 생각이 든다. 아들은 부모 외면하여 찾아오지 않고, 딸은 엄마와는 통화 하나 애비에겐 냉정하고, 아내는 남편 꾸짖는 일이 일상사이다. 나는 뭘 잘못했던가.
아들 딸 둘은 대학 졸업 때까지 학교 성적도 좋고 부모 속 썩인 일 없다. 아들은 고2 때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옆동네에 살던 KBS 부장이 자기 딸도 이스라엘에 보냈다. 속셈은 뻔한 것이다. 서로 사귀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룹사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들은 안면을 바꾸었고, 그 후유증으로 아들은 성적이 떨어져, 휘문고 졸업 후 연세 의대 시험에 실패하여, 재수 후 홍익대 전파공학과 입학했다. 직장은 신도리코에 입사했는데, 영어와 컴퓨터에 능해 사내 컴퓨터 강사를 했다. 나는 평생 집걱정 하지말고 살라며 삼성동 빌라 한 채를 주었다. 그 빌라는 지금 땅값만 30억 정도 되고, 앞으로 재개발 되면 50억~100억 정도 될 것이다. 나는 아들이 딴데로 이사가지 않고 물려준 재산을 잘 지킨 걸 기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몇 십년간 찾아오지 않는가. 아마 판사 사위 본 후 그쪽만 편애한단 어머니에 대한 오해 때문일 것이다. 지금 LG에 나가는데, 어머니가 폐암과 뇌졸중 등 생사가 걸린 중병에 걸려도 연락을 끊어버렸다. 인륜을 저버린 패륜행위로 내 가슴에 큰 못을 밖아놓았다. 다행히 서울대 출신 며느리는 좋은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시어머니 병원에도 찾아오고, 명절엔 음식을 보내곤 한다. 며느리는 외할아버지가 외대 부총장 이었다. 내가 결혼 전에 년노한 할아버지 할머니를 외출 후에 집에 돌아오면 인사한다기에 딴 건 물어보지 않고 며느리 삼았는데, 제대로 판단한 것 같다.
딸은 경기여고와 연세대 사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IMF 때 취직이 어렵게 되자 미국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고, 나는 반대했다. 유학 다녀온 자식이 콧대만 높아, 초라해진 가난하고 늙은 부모 업신여기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번씩이나 첫 등록금 한 번만 지원해 주면 박사 되어 귀국하겠다고 엄마를 통해 간청하길래, '그럼 두 학기 등록금을 지원한다. 그 후는 장학금 못받아 중간에 귀국하게 되면 부모 원망 않고 무조건 귀국해라'는 조건 달고 허락했다. 내 고려대 친구가 프린스톤 대학에서 장학금으로 고향 부모님에게 논 사드리며 박사 학위 얻고 돌아와 경북대 교수 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딸은 어렵게 공부한 후 박사 학위 얻어 귀국하여 한양대 교수 되었다. 그동안 내가 도와준 건 이리노이 대학 캠패스가 너무 넓어 중고차 사준 거 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애비에게 초겨울 날씨마냥 쌀쌀한 건 아마 미국서 고생시켰다고 그런 모양이다. 그냥 대학 졸업하고 국내 회사 취직했다가 결혼 했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아들은 여동생은 유학 가서 박사 받은게 불만이고, 딸은 오빠처럼 강남에 몇 십억 짜리 비싼 집을 주지 않아 불만인지 모른다. 자식 농사 실패한 것 같다. 그러나 다행이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한 사위, 서울대 출신 며느리가 잘 해줘 고맙다.
는 자식 노릇 제대로 해서 고맙다. 그러나 아직도 전세집에 살아 걱정이다. 전철역 생기면 집 값 오른다고 수지 대우아파트 64평 짜리 딸에게 넘겨주고, 내 평생 처음 20평 짜리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가 강남의 삼성동 집을 팔아 빚 청산하고 다시 성복역 근처로 이사갔다. 다행이 전철역 개통되자 5억 짜리 아파트가 12억이 되었는데, 딸은 부모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판교로 이사 가버려 허망하게 되고말았다.
그럼 아내는 어떠한가.
아내는 고려대 철학과 후배인데, 캠퍼스 전체 일등 미인이었고, 김지미 보다 이뻤다. 학교도 이화여중고를 나왔기 때문에 나는 애초에 그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학벌 좋은 미인과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가. 평생 남편을 괴롭힌다. 나는 대학 4년 장학생으로 문과대 1등 졸업생이라, 재벌과 국회의원 집안에서 혼담이 있었다. 그런데 졸업 후 내가 불교신문 기자일 때 잡지사 기자였던 그가 연락을 취해왔고, 나는 원래 원칙을 깨고 형이상학을 같이 공부한 아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불교신문, 경제신문 기자 월급은 비참했고, 아내의 불만 게이지는 높았다. , 재벌 자서전 써준 작가는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다. 나의 모든 시도는 반대되었고, 평가절하 되었다. 비서실장 계열사 사장 시절에는 그럭저럭 지나갔다. 그러나 수입이 끊어진 은퇴 후 생활은 지옥이다. 내가 10권의 책을 냈으나 출판비가 없어 책을 낼 수 없었다. 딱한 사정을 들은 누이가 500만 원을 보내줘 그걸로 책 만들었다. 본인은 내가 낸 책은 읽어보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한테 소개하지 않는다. 나는 철학과 답게 저술에 가치를 두지만, 그는 그것 때문에 가난이 온다 생각한다.
나는 기업체 중역 때부터 돈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겼다. 가정 경제는 부부 공동의 場으로 생각하였다. 건설회사 시절엔 여러 개 아파트 입주권과 수서의 오피스텔, 삼성동 두 개 빌라도 그에게 맡겼다. 딱 한번 재무에 관여한 적 있다. 모든 걸 처분하여 정자동에 다가구 빌라를 통으로 사자고 한 적 있다. 그게 노후 대책이라 싶었지만, 아내가 반대했다.
결국 은행빛으로 살다가 마지막에 삼성동 빌라 처분하고 용인시 수지에 와서 살게 되었다.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물론 모든 재산 관리를 방임한 내 잘못도 크다. 그런데 요즘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모든 재산이 자기 것이란 주장을 한다. 현재 살고있는 롯데 아파트가 값이 2배가 되었는데 아내 명의로 신청했다고 자기 재산이라고 주장한다. 그 아파트 입주금 5억은 우리가 살던 LG 2차 아파트 판 돈 아닌가? 나는 원래 재산의 반은 아내 것으로 인정한다. 재산은 내가 번 것이지만, 법적으로 부부 공동 노력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어떤 가문이던 부인이 남편에게 재산 주장을 한다거나 부부간에 다툰다는 건 쌍스러운 일이다.
두번째는 아내의 의부증 증세이다. 최근 아내는 뇌경색 증후로 두 번이나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적 있다. 나는 병든 아내를 끝까지 간병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 간병인 보다 남편의 간병을 원하기에 80 노구가 불편한 병실에서 같이 생활했다. 그런데 죽음이 지나가자, 건강한 남편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의부증이 싹튼 모양이다. 퇴원하자 자기 방 침대에서 여자의 루주와 귀걸이가 나왔단다. 아파트 노인회 여자 감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람은 나이가 나보다 많고 인물도 못생긴 편이다. 전에는 내가 입는 옷 하나를 누구 선물이냐고 추궁했다. 전부터 입던 낡은 옷인데 의심부터 한다. 한번 의심하면 무조건 확증을 가진다. 그래 불안해서 2년 임기인 아파트 노인회 회장을 1년 지난 금년 1월에 사임했다. 의부증을 판사인 사위 당군한테 상의한 모양이라 내가 하도 답답해서 육군 소장 출신 친구에게 하소연했더니, 그는 판사라면 제대로 잘 판단할 거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러다 4월 24일 어젯밤에는 노인회 스마트폰 교육 신청을 해달라고 했다가 내가 찾느라고 시간이 걸리자, 분통을 터트리고 끝내 동네 파출소에 신고를 해서 경관 3명이 다녀갔다. 그들은 서재 문을 잠그고 숨어있는 나를 보고 육체적 싸움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아니라며 나는 항상 이렇게 피한다고 하자, 할머니는 당뇨병 환자고 몸이 쇠약하시니, 끝까지 잘 참고 보살피라고 충고한 후 돌아갔다. 나도 그러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장보기, 음식 준비, 설거지 맡기는 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매사에 남편 의견을 개무시하는 태도는 참을 수 없다. 본인 말대로 별거 하면 어떨까? 재산을 반으로 갈라 나는 고향으로 가면 어떨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병세가 위험한 아내를 딸이나 아들에게 맡기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들도 그럴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점점 잘못되고 있다. 그래 사위와 며느리, 가족에게 미리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2023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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