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7) 사후 개화 死後開花

김현거사 2012. 7. 19. 21:07

 

<가족사 기행> (7) 사후 개화 死後開花

정 태 수

농포공의 시화사건 후, 우리 가문은 먹구름에 덮혀 거의 폐족廢族 지경에 빠졌으나,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후 가로채고 묻혀졌던 농포공의 구국안민의 공훈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먼저 후임 북평사 이식李植과 그 아드님 이단하李端夏에 의하여 저술된 북관지北關誌의 완성으로 함경도에서의 삼난3亂평정의 공적이 문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3란평정’이란 세 가지 난리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첫째는 남쪽에서 카토 키요마사의 2만여 왜병이 관북엘 쳐들어 온 것. 둘째는 오랫동안 이반되어오던 관북의 내부 민심 때문에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이 여러 곳에서 부역附逆반란한 것, 셋째는 이 틈을 탄 북쪽 오랑캐가 무리지어 국경을 침범하여 양민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해 간 세 가지 난리다.

 공의 사후 41년인 현종 6년에는 영의정 정태화鄭泰和의 상소로 억울한 누명이 신원(伸寃 1665)이 이루어져 자손에게 등용문이 열리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단하李端夏가 영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도움을 받아 사후 43년만인 1667년 정월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라는 문무를 겸한 긴 증직贈職을 받았다. 또 공의 증손 정삼鄭杉의 상소가 받아드려져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듬해 농포공은 함경도에 경성 창렬사(彰烈祠 1667), 회령 현충사(顯忠祠 1707), 부령 숭열사(崇烈祠 1860) 등 임금이 현판 글씨를 하사한 사액사당에 제향되셨고, 공은 좌찬성에 추증되고, 5대손 정근鄭瑾의 상소로 후손에게는 부조전不祧典이 내렸다. 이로서 우리 가문사도 억울하게 둘러쓴 폐족廢族지경에서 짧게는 40년 동안에 가로채인 훈공이 잇따라 들어나고 억울함이 풀어져, 국난 극복공신가로 변한 것이다.

 관북에는 북평사 최창대崔昌大의 문장으로 백성들이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세웠다. 이 비는 러일전쟁(1905) 때 일본군이 빼앗아 가서, 동경 야스쿠니신사에 옮겨 세워졌던 것인데, 내가 문교부 국장 당시 동경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의 대첩비 발견 연락을 받고 서로 연락하여, 당시 대종친회장 정채섭, 종손 정규섭과 본인 정태수 3인 명의로 정부에 북관대첩비 반환 탄원서(1978)를 낸 이후, 각계의 국민운동으로 번지고 급기야 초산樵山스님의 노력이 주효하여 환국 북송(2004) 이루어진 것이다. 북관대첩비문의 일부분을 소개하면, '임진왜란에 힘써 싸워 적을 크게 물리친 것으로 이순신의 한산대첩이 있고 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월천의 연안대첩이 있어 사람들이 이들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여기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적들을 대파한 자들이 있어 비를 세워 후세에 남기노라.’ 란 구절이 보인다. 현재 이 비는 개성을 경유, 함경도 원래 비석이 있던 자리로 옮겨져 있다. 그 당시 정부가 나서서 묘전고유제를 지내고, 그 이모비移模碑 를 묘 앞에 세웠다.

 

돌아온 북관대첩비

400년 전 관북의병 인천공항을 내린다 승전비가 볼모되어 100년간을 갇혔다가

충의공 앞세우고 6000명이 무리되어 후손이 시동걸고 온 나라가 핏대올려

돌 하나 북관대첩비에 모두가 뭉쳐있네. 30년 반환운동이 열매 맺어 돌아온 비.

 

2만 왜에 7대첩 함경도 땅 찾았지만 다투던 남북한이 이 비로 마음 합쳐

공훈은 훔쳐가고 모함으로 물고사 금줄 넘어 임명 땅 본디 자리 가시니

땅치고 울고울어도 그 한 어찌 씻으랴. 그 날의 구국정신을 후세에 전하소서.

 

 

 

 의정부 송산의 농포공 묘역은 11대손 정태진鄭泰辰의 노력으로 경기도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문화재 지정비를 묘 앞에 세웠다.

 또한 필자(11대손)가 송산종중 소임을 맡아서 도비와 시비를 보조받아 묘전 사당 충덕사(忠德祠 2002)를 짓고, 복지문復地門 열고, 홍살문을 세웠다. 또 정부 지정의 충의공 영정(국가영정 77호)을 닫집에 걸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한편, 종재를 들여 재실 송산재松山齋를 지었다.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은 해놓았으나 인쇄가 중단되어있던 시집 겸 문집인 국역농포집(國譯農圃集)도 간행했다. 그리고 해마다 유림(河有輯씨 주도)의 추향제(秋享祭)를 올리고 의정부 무용단체가 축제를(?) 열기도 했다.

송산 묘전 충덕사 북관대첩비 이모비(송산)

송산 사당이 들어선 후, 그 시호를 따서 인근에 충의로(忠毅路)와 충의중학교가 명명되고, 공의 모친 무덤 앞에서의 시묘살이가 이 지역 전설이 되어 그 산을 효자봉이라 불러왔었는데, 이를 받아 효자중학교가 명명되었다.

 이리하여 평소에 갈 수도 없는 북한 땅 함경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충의공의 의병활동의 역사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남한 땅 의정부 송산의 충의공묘가 비로소 의병장의 묘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해, 참배와 숭모의 열이 일어나고 백일장으로 학생 교육장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후손의 입장으로는 남북통일의 그날이 와서 북의 사적과 남의 의병장묘가 소통되는 날이 기다려진다.

 한편 농포공의 후손이 이주한 진주 까고실은, 진양호 조성으로 살던 터가 호수 속에 묻히자, 일족이 솔권하여 종가가 용암龍岩으로 옮기고, 그곳에 11대손 정한재鄭翰載 주도로 부조전과 사당을 이전하고, 박정희 대통령 친필사액의 충의사(忠義祠 1977)를 세워, 해마다 춘향제를 올리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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