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 기행> (11) 진주晉州 유학遊學
정 태 수
해방 5년 전인 1941년 3월, 초등 3학년을 수료한 나에게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 진주에 사시는 숙부(東隱公, 鄭錫宙)가 지수면 우금동의 우리 집에 오신 것이다. 할머니 어머니와 협의하고 나를 데리고 진주 숙부 집으로 데려가서, 진주봉래초등학교에 전학시킨 사건이었다. “단 하나 있는 장조카를 이 산골에 그냥 둘 수 없다. 내가 진주로 데리고 가서 공부시켜야겠다”고 말하여 어머니를 설득한 것 같다. 아마 재일본의 아버지께는 편지로 미리 동의를 얻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해 4월 1일부터 봉래초등 4학년에 편입되어 이른바 진주 유학遊學을 하게 되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유학留學은 외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하는 것이고 유학遊學은 고향집을 떠나 타향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당시만 해도 행정구역이 다른 진양군지수면에서 진주시로 공부하러 전학했으니 일찍이 후자의 유학을 한 셈이다.
어린 조카 손잡고 진주유학 길을 터 드넓은 새 세상을 숨쉬게 인도하신 숙부님 고맙습니다 백골난망 그 은혜. |
그리하여 아직 찬바람이 부는 어느 날 숙부님의 손을 잡고 지수초교에 들려 전학서류 떼고 일생 처음으로 반성면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또 반성역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그 종점인 진주로 갔다. 그 때 반성역에서 점심으로 먹은 국수 한 그릇은 일생 잊지 못할 강한 맛으로 남아 있다. 밀가루 국수를 처음 먹었을 뿐 아니라 나를 자극한 톡 쏘는 후추 향은 일생 잊지 못하고 있다. 탈것과 먹을것 때문에 숙부님과의 그날 여행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 새 경험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하숙비 제대로 보내줄 형편이 되지 않아 쌀 몇 말씩 가을마다 보내지 않았나 싶다. 집이 좁아 방도 사촌과 함께 쓰며 하루하루 이어나가는 살림살이 속에서도 우리 집 가통을 이을 장조카 거두겠다는 숙부 내외분의 사랑이 내 일생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대사건이 아니었나 한다. 그 때는 어려서 멋모르고 도움 받았지만, 해가 갈수록 이 일에 감사의 마음이 쌓여갔다. 더구나 어려운 살림에 입 하나 더하는 게 큰 짐이 되는 시절에 숙부의 뜻을 받아드려 시댁조카를 가족으로 맞아주신 숙모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린다. 집안에 내려오는 깊은 가족애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보기 드문 미담이 아닌가. 자식 길러 본 뒤에라야 잴 수 있는 깊이 아닌가 한다. 부산에 있는 두 분의 묘 참배라도 다녀오려는데 벌써 몇 년째 순연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옥봉동 작은 집에서 학교까지는 한 2Km 쯤이 되었는데 그 골목 통학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때의 작은집을 터라도 보고싶어 이번 까지 이미 두세 번 가보았지만 도시계획으로 변해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몹시 아쉬운 맘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계속)
<가족사 기행> (12) 아버지의 추억
정 태 수
이번 길에 진주봉래초등학교엘 들렸다. 100년 전 한말에 신식학교 붐을 타고 진주시밈이 봉의 알자리학교라는 뜻을 가진 민립民立봉양鳳陽학교를 개교했는데, 일제강점 후 공립화하고 봉래학교로 개칭한 것이다. 봉래 100주년 기념관도 마침 휴일이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동창회가 모금하고 경남도 교육청 지원금을 보태 이 건물이 섰는데, 그 안에는 학교 역사와, 기부자 명단, 모교를 빛낸 사람들의 명단(21명)과 이력 등을 진열해 놨기에, 또 그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기에 온 김에 보고 가려했으나 할 수 없이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다.
지나간 이야기 하나, 내가 문교부차관 때인 1982년 연말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학교장(김점곤선생)과 동창회 회장(김광근씨)가 차관실로 찾아 온 일이 있었다. 학생 체육관을 지어야겠는데 국비 또는 도비보조를 부탁해왔다. 챙겨 보니 문교부 예산이 소진되어 경남도 교육감에게 전화로 부탁했더니 잔여예산 몇 억을 즉시 보내줘서 강당을 지을 수 있었다. 그 때 김회장이 진주에 돌아와보니 벌써 보조지령이 먼저 와 있었다며 기뻐 전화한 일이 생각난다. 공사 끝난 뒤에 회장님이 다시 와서 “서부경남에서는 최초의 강당이었다. 고맙다”며 두 가지 흔적남기기를 부탁해왔었다. 하나는 옛 봉양학교 시절의 운영난 때 거액기부자 남평문씨南平文氏할머니(이름 미상이라 함)의 증거물이 발굴되었으니 그 칭송 시를 작시해달라는 것과, 또 하나는 새 강당의 작명과 글씨를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현창 시와 ‘봉래 체육관’이란 간판 글씨를 써드렸다. 그래서 졸시의 시비가 서고, 졸필 다섯글자가 강당 이마에 띄엄띄엄 낱글자로 걸려 30여년을 지나왔었다. 이번에 가보니 시비는 그대론데 간판은 철거해버리고 그 대신 ‘봉래관’이라는 황금색 활자 석자로 대체되어 있었다. 아무런 연락도 설명도 없이 글자판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사뭇 섭섭하였다.
봉래체육관을 봉래관으로 고쳐버림
이야기 둘. 봉래 5학년의 어느 날, 일본에서 아버지가 작은집에 오셨다. 노동휴가 차 왔는지 아주 귀국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아들을 보러 오신 것은 틀림없었다. 퍽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아마 처음으로 아들 손을 잡고 옥봉동 밤길을 산보한 기억이 선연하다. 잘 아시다시피 옛 어른들은 안방도 기척 없이 살짝 찾고 자식도 엄하기만 하지 애정표현을 하지 않고 더구나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거나를 삼가 하는 부부유별 엄부자친(부자유친은 글뿐이었다)
아버지의 추억 자식을 안고 가면 흉이 되던 옛 시절 안 볼 때 안고 업고 남 볼 땐 멀뚱멀뚱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밤에 잡고 걸었어. 달빛 밝은 이치를 자랑스레 늘어놓니 못 잊을 외동아들 어찌 손을 놓으셨나 맞다맞다 하시며 웃음 띠운 그 속마음 가지에 걸린 달을 누워 보고 계시리 어린 것 기고만장을 즐기신 것 아니신지. 그 손과 빙그레 웃음 내 맘의 고향산천. |
소학교 시절에 여름과 겨울의 방학이 오면 4촌과 함께 하루를 걸어와서 먼 우금동 집으로 부모님을 만나 정을 나누고 돌아오곤 했었다. 환히 웃으며 반기는 할머니와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별미 음식도 만들어 주셨는데 주로 찰떡이 생각난다. 중일전쟁에다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일제 말기, 배고프게 자라던 소년시절에 떡은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이웃 동네 고모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사장어른이 진찰하고 한약을 지어 팔고 침을 놓고, 나중엔 그 장남인 고모부가 대를 이었었지. 고종 형제 다섯에 자매가 셋이어서 대가족이었다. 안고 구르고 도토리와 밤 주우러 등산하고, 함께 밭 메고 고추 따고 저수지에 가서 고기 더듬고… 안계安溪라는 그 고모 옛 동네에 들렀더니 집들은 줄어들고 옛 고모집은 채소밭으로 변해버렸다. 다만 하나 그 어른들이 심은 동네 앞 느티나무 세 그루, 몇 아름드리 되어 하늘을 이고 섰다. 곰집 식구들이 그리워진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옛 동네, 돌 위에 앉아
어린고종들과놀던옛생각에잠겨한참을서성이다일어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