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 기행> (5) 눈물의 낙남落南
정 태 수
농포공農圃公이 시화詩禍로 억울하게 물고物故를 당하자,가족들은 혹독한 태형에 만신창이가 된 공의 시신을 의정부 송산 선영하에 아픈 마음으로 매장하고, 이듬해(仁祖 3년, 1625) 2월에 공의 아우(鄭文益)와 두 아들(鄭大榮, 鄭大隆)의 3숙질은 농포공 옥중 유명遺命인 ‘벼슬 하지말고 진주에 내려가 살아라’는 지침에 따라, 상복을 입은 채 처자를 데리고 한 달 너머 걸어서 서울에서 진주로 남행해 내려왔다. 낙남落南한 것이다.
진주에 와서 농포공의 장남 집의공(鄭大榮, 뒤에 司憲府 執義에 증직되어 執義公이라 호칭)은 아들 4형제(15세 12세 11세 3세)와 노비들을 데리고 처음엔 비봉산 아래 봉곡동으로 이사했다가 후대에 까꼬실로 옮겨갔다. 집의공은 당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 중에 있던 40세의 중견 가장이었다. 숙인淑人 이씨 할머니는 선조대왕의 조카 익성군(益城君 李亨齡)의 따님으로 당시 36세였고, 그 중 열두 살의 둘째아들(鄭有祥)이 나의 직선조 이시다. 작은 아들 승지공(鄭大隆, 뒤에 左承旨로 증직되어 承旨公이라 호칭)은 당시 27세로, 뒤에 남강 의암바위에 전자로 ‘義岩’ 글씨를 새기신 분이다. 숙부인淑夫人 해주 오씨와 아들 3형제(10세 6세 2세)를 데리고, 숙부이신 농포공 막내아우 용강공(龍岡公 鄭文益, 당시 57세)과 단인端人 수원최씨 내외분과 옥봉동에 이웃하여 사시다가 후대에 반성 용암과 산청 삼장으로 각각 옮겨갔다. 실로 대가족의 자진 유배였다 하겠다. 한 380년 전의 이야기다.
당시 대역죄인은 삼족을 멸하였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박홍구 역모사건의 혐의는 조사 결과 완전히 무죄로 귀결되었고, ‘초 회왕’에 대한 영사시는 인조 비방시냐 아니냐는 결말을 내지 못하고 물고를 내고 말았으니, 아무리 연좌죄連坐罪시대지만 그 자손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대로 한양에 눌러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아버지 농포공이 옥중 유명遺命에 순종하여 진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농포공이 옥중에서 왜 이런 유언을 하셨는가 생각해보면, 농포집에 ‘선생이 창원부사로 있을 때 진주를 둘러보고 풍토가 순박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며 사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공은 젊은 시절 전국 각지를 많이 돌아본 경험을 살려, 해코지꾼들이 사는 서울에서 될수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손들을 보내야겠고, 그렇다고 외딴 섬이나 오랑캐와 이웃인 북변은 피해야겠고, 양반 고을로 인심이 따스하여 집적거림 안받고 자식 많이 낳아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업중심지를 골라보고, 진주를 그 적지로 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옥중 고통을 포함하여 살아온 60평생을 결산해보고, 또 자손들의 안정되고 평온한 일상을 그려보면서, 극심한 생존경쟁으로 위험해진 한양을 떠나 자연을 벗삼아 자식 많이 낳아 농사짓고 살라는 방향제시가 아니었나 싶다. 그 어른의 벼슬일생을 봐도, 중앙의 고관직도 언제나 사양하고 강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지방직을 전전한 평소의 인생관에서 나온 결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리하여 해주 정가 후대들이 까고실에 정착하게 되었던바, 400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우리 성바지 해주정가 29개파 중 농포공 한 분의 후손인 농포공파가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공의 자손 번성의 긴 혜안이 담긴 옥중 유언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족보를 보면, 10대조 집의공도 문무겸재를 썩혀 심히 애석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의 직계 선대들은 강학사우講學士友, 문장행의文章行義, 처사處士 인의금서仁義琴書등으로 기록된 인물평으로 보나, 벼슬집안과 통혼한 기록들로 보아, 유언에 따라 농사짓고 조용히 은거하였지만, 진주에서 본데있는 집안으로 대접받고 살아온 것 같다. 진주 토반土班인 강하정姜河鄭을 비롯한 그 밖의 대성들과 혼인과 교류를 이루면서 살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영남학맥에 편입하여 농사와 글공부에 힘쓰며, 근신과 겸손의 일상을 이뤄가면서도, 문집발간 등 경반京班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다가, 한 40여년 후 농포공 신원伸寃 이후, 공신 현창이 이어진 이후에는 자부심을 회복하고 과거시에도 오르고 더러 출사도 늘어나, 선비집의 면모를 회복해 갔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근세사는 진주에서 조심조심 새로이 전개되어갔다.
(계속)
<가족사 기행> (6) 남강의 기점起點에서
정 태 수
우리 선조가 터를 정한 까꼬실은, 수몰되기 전 300년간 남들이 부러워한 부촌이었다. 토지는 넓고 비옥했고, 쌀 밀 보리에, 무 배추와, 참외 수박, 고구마 감자까지 고루 갖춘 명산지였다. 특히 녹두섬의 고구마와 경호강 덕천강 두 강에 떼지어 다니는 은어와 황어가 유명하였다. 과장되기는 했지만, 까꼬실 논 한 마지기는 진주시내의 집 한 채와 안 바꾼다는 말도 있었다. 넒은 ‘너우니’의 은빛 모래톱은 여름철 진주 시민의 물놀이 장소였다. 넉넉한 삶의 터전에 우리 일족은 까꼬실 안의 한골 새미골 도래미 분딧골 등등 여러 동네에 나뉘어 살았다. 그 중 나의 직계 선조는 9대에 걸쳐 ‘새미골’에 살았다. 천석꾼도 배출되고 신원伸寃 후 농포공을 위하여 조정이 내린 <부조묘不祧廟>와 유가의 표상인 가호서원佳湖書院도 세웠다. 서당 <각후재覺後齋>를 운영했고, 나중에는 귀곡초등학교까지 세워, 범절과 교학을 중시하는 양반가의 위상을 갖추었었다. 그러나 이랑이 고랑되고, 고랑이 이랑된다는 속담대로다. 1962년 진양호 조성사업으로 동네와
들판이 지금은 푸른 호수와 무인도로 변한 것이다. 1969년에 완공된 진양호의 댐은 길이 1.126m, 높이 34m로 호수는 309만 톤의 물을 가두어 서부경남의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와 관광자원으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새 수자원 요충지로 새 관광명소로 다시 태어났고, 진양호 일몰은 진주8경의 하나가 되었다.
까꼬실이란 이름은 옛날부터 불리어온 특이한 토속어로 한자화하면서 가귀곡(嘉貴谷) 가이곡(加耳谷) 가귀곡(加貴谷) 가이곡(佳耳谷) 가곡(佳谷) 귀곡(貴谷)으로 변천되어왔다. 내 생각으로는 원 지명 ‘까꼬실’은 지형이 곡식 검는 까꾸리(갈고리의 사투리) 닮았다고 붙여진 게 아닌가 한다. 백두대간이 태백산맥 소백산맥 지리산맥으로 굽이쳐 오다가 정지한 산이 마을 뒷산 황학산黃鶴山이다. 그 앞엔 낮은 메들 여럿이 까꾸리발 같이 줄지어 골을 이룬 것이다. 그 바깥을 들녘이 둘러싸고, 그 바깥을 두 강이 흘러와서 합치니, 풍수설로는 봉황 포란형이라 일컬었다지만, 들판에 까꾸리 엎은 형국이 아닌가.
까꼬실로 흘러오는 강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산청을 돌아오는 경호강과 역시 지리산 발원의 물이 하동을 돌아오는 덕천강이다. 동서 두 강이 서로 만나서, 로터리를 이룬 3각주가 남강의 기점起點 요충지 까꼬실이다. 강이 합친 이곳에서부터 남강이란 이름이 생겼고, 아래로 신안동 들판을 적신 후, 진주성을 감돌아, 금산 대곡 의령 지수로 산태극 수태극 S자로 되풀이 굽이돌면서 낙동강으로 태평양으로 들어간다. 산과 강과 들을 겸비한 이 명당은 이제는 진양호로 변했고, 까꼬실은 수몰되어 정씨 집성촌은 사라졌다. 수몰 당시 까꼬실에 남아있던 일족 158호는 너우니 물가에 망향비 하나 세워놓고 떠나니, 지금 까꼬실은 빈 섬이다. 종가는 이반성, 작은집은 집성촌 용암으로 옮기고 일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나의 직계는 서당 훈장이셨던 조부님의 직장 따라 금산 월아산 아래 월아동(달음동)에 옮기었다. 내 직계 선조 10대와 나는 까꼬실·금산·지수·옥봉동 등, 남강 물 따라 살아온 남강족南江族이다. 나는 이 강줄기 곳곳을 옮겨 다니면서 나고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첫 직장을 얻었다. 남강의 아래위로 점철된 군데군데가 내가 살아온 잊지 못할 땅들이다. 남강은 내가 그 품에서 자란 은혜의 강이다.
그 후 내 대에 와서 서울로 옮겨, 현재 서울에 조부손 3대가 살고 있다. 달음산 아래 조부손祖父孫 3대기 살다가 서울로 조부손 3대가 옮긴 셈이다. 기복 많은 5대째의 우리집 현대사가 진행 중인 셈이다. 나는 오래 전에 남강을 떠났지만 마음속에서 남강을 지우지 못하고 지금도 남강문우회에 참여, 고향 문사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내가 다시 선조이신 농포공이 사시던 서울로 올라와 그 분의 묘역 가까이 살게 되었으니, 이제 내 삶은 고향 진주를 떠난 타향他鄕살이인가, 낙남落南살이를 청산하고 옛고향으로 돌아온 환향還鄕살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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