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가족사4

김현거사 2012. 7. 4. 07:16

<가족사 기행> (9) 유년의 추억

정 태 수

제4일에는 부모님 따라 이사 간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장소를 찾아 나섰다. 제일 먼저 지수면 용봉리 우금동(于今洞)을 찾았다. 달음동에서 월아산 질매재 10리길을 자동차로 넘어 사봉면 반성면 지수면의 승산(勝山)을 돌아 산을 넘고 들을 가로질러 ‘숫돌바우 모퉁이’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우금동의 동구밖인데, 이 숫돌같이 총총 선 바위 숲이 남강 하류를 만나, 좁은 오솔길 하나 열어놓은 모퉁이 길이 추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예날 같으면 한 이틀은 걸어야 할 거리였지만 오늘은 차에 앉아서 두어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규모는 작지만 소동파의 적벽부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바로 떠올리는 곳이다. 아버지 손잡고 지수초등학교에 입학한 내가 3학년 마칠 때까지 매일 가고 또 오고 한 등하교의 필수코스인 이 모퉁이. 바위틈에 올라가서 바위옷도 뜯고 들꽃도 꺾고 놀다 강가에 내려가서 손발도 적시고 여름엔 덤벙 뛰어들어 멱 감던 곳. 지금은 찻길이 나고 철조망이 처져있어 숫돌바우에 접근이 금지되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차를 세워놓고 길게 흘러온 남강줄기와 그 건너편 넓은 들판을 조망하면서 그리던 어린 시절을 실컷 만끽하였다. 참 흐뭇한 시간이었다. 한 숨 돌리고서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산골 ‘우금동’으로 돌아 들어섰다.

강아지 하품한다 송아지 되새긴다

암탉이 꼬꼬꼬 병아리 떼 몰고 간다

가슴 속 깊숙이 찍힌 흙내품은 고향 사진.

이 동네는 내가 세 살부터 열 살까지의 약 8년간 살던 두메산골이다. 응응거리며 누워서 손발만 후비적거리던 시절을 지나고, 세 살 때 이곳에 와서는 발자국을 떼고 말을 배우고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을 보고 만지고를 시작한 그때 그곳이다. 나는 기억을 되살려 옆집에 살던 두어 살 연상이었던 김용권이라는 분을 찾아다. 그러나 그분은 영영가고 그 노부인은 병원엘 가고 없어 만나볼 수 없었다. 또 후일을 기약할 수도 없는게 아닌가. 마침 대화를 나누던 젊은이가 그분의 조카이여서 삼촌으로부터 “정태수란 사람이 출세하여 서울 산다는데 나하고는 초등 선후배 사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해 주어 반가웠다. 옛 산과 들판은 그대론데 동네 집들은 크게 불어나지 않았고, 아버지의 외화벌이로 겨우 처음 장만한 내 기억의 문전옥답은 집터로 변하여 여러 채의 집으로 덮여 있어, 추억이 흐르던 시냇물은 길게 아스팔트로 덮여 자동차길로 변하여 동네를 출입하는 간선도로로 쓰이고 있었다.

어린 옛날 못 잊어 실개천을 찾다니 그 개울의 돌 틈에 팔딱이던 송사리

사립문 앞 그 자리 알몸이라 어울렸지 번쩍이는 훈장보다 움켜잡고 싶은 뜻을

그 물이 내 몸을 돈다 평생토록 흐른다. 말한들 알 리 있으랴 송아지 길게 운다.

이 길은 옛날에 길게 흐르던 맑은 도랑이였었다. 다섯 살 때의 특이한 기억 하나. 한참 잊고 있다가 서른이 넘은 뒤에 불현듯 살아난 추억. 바로 이웃 동갑내기 여자아이와 함께 과년 찬 처녀가 쑥 캐는데 따라간 그해 봄날, 큰 처녀가 시키는 대로 두 어린이가 아랫도리를 벗고 맞대게 하여 어른 흉내를 내게 하던 일, 성사시키려고 이래라 저래라 거들면서 즐긴 큰 처녀의 춘정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쑥 캐는 동네처녀 바지 벗고 따라간 날

풋고추 만진 그 손 주름 얼마 졌을까

백발에 생기 돋는다 다섯 살쩍 흑백 필름.

(계속)

<가족사 기행> (10) 그리운 꽁보리밥

그 시절, 즉 1930년대의 우리는 민족적인 식민지 노예살이를 하고 있던 시기다. 생살여탈권은 일본인이 쥐고 한인은 모두 종노릇에 익숙하게 되어간 시기였다. 지금에 와서 보니 인생살이를 처음 익히는 나의 귀한 유년기는 나라 잃은 지 20여 년에 접어들고 해방 전 20여 년 전이 되는 식민지 한복판과 그 시기를 겹친다. 그러니 민족이 종살이에 익숙해진 때에 또 한사람의 종으로 태어난 것이다.

역사는 계기(繼起)한다고 한다. 우리집 가족들의 삶의 역사도 앞뒤가 연이어져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일 게다. 한말에 나라가 망하자 잇따라 할아버지 서당도 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4년제 금산초등학교가 생겨 신식교육이 문을 열자, 정규교육기관이었던 재래서당은 한문 과외공부 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학동수가 급감하고 그 학원조차 망해가니 할아버지는 반실업자로 또 완전실업자로 빠져들어 갔고 식솔들은 끼니를 잇기 힘들게 되어갔다. ‘망국의 한탄’이란 할아버지의 5언절구가 절로 지어졌겠는가. ‘백성들은 삭막하여 울부짖고 있는데(海內蒼生啼索莫)’라는 시구는 수식된 문학이 아니라 절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어려운 가독(家督)을 이어받은 분이 나의 아버지 경은공(耕隱公)이였다. 그분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 집 만의 현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제가 대륙침략에 나선 시기여서 조선반도의 쌀은 일본으로 군량미로 빠져나가고 우리의 1인당 쌀 소비량이 1910년 합병 당시 100kg에서 1934년에 52kg으로 반감하고 그 대신 만주에서 들여온 좁쌀과 옥수수로 또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기였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요새 젊은이들은 상상을 넘어서는 소설같은 옛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우리가 식량난을 극복하고 배불리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 통일벼가 나오고 새마을운동 노랫가락이 울려퍼지면서 부터였고 1988년에는 쌀 생산량이 605만톤으로 늘어나 수북이 쌓인 고붕밥을 즐기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자 비만을 걱정하게 되고 급기야 다이어트까지 외치게 되었으니 금석지감에 젖게 된다. 그러니 우리의 배고픔의 역사 5000년에 굶주림을 면한 역사는 겨우 30년일 뿐인 셈이다. 오죽했으면 김일성이 정권잡기 구호로 외쳐댄 “쌀밥에 고깃국” 약속이 먹혀들어갔을까.

가난한 훈장 아들 처자 아니 굶기려고

바다 건너 공장노동 고귀한 땀방울이

소망을 이뤘습니다 식량자급 자작농.

그러니 달음동과 우금동 시절의 우리 집은 양식걱정의 시대였다고 짐작된다. 청빈한 달음동 선비집의 시대가 겨우 가자 바다 건너 노동시장을 자청한 시대가 우리집에 닥친 것이다. 강제징용이 아니다. 자진해서 외화벌이에 나선 것이다. 추상적인 가난 극복이 아니라 굶어죽지 않으려는 구체적인 연명제일주의시대였던 것이다. 이 시기 수년간은 아버지는 일본 동경 옆 가와사끼(川崎)에 건너가셔서 노동자합숙소에서 잠자고 한바(飯場, 노동자 급식소)에서 끼니를 때우고 누구나 기피하던 뜨거운 철공소에서 노동하면서 처자를 그리며 한 푼 두 푼 눈물의 저금통장을 매만지면서 식량자급농을 꿈꾸었다. 훈장집의 가난을 대물림받은 아들의 숙명은 이런 것이었다. 어린 나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밥투정을 하면서 자라고 있었다.

꽁보리밥 꾹꾹 눌린 놋숟가락 그 위에

어머니가 얹어주신 된장 한 점 그 맛이

그리워 사뭇 그리워 눈물 절로 고인다.

이 동네는 내가 지수(智水)초등학교에 처음 취학하여 3학년을 수료한 생활공간이다. 여덟 살 때 지수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맑고 푸른 산길 들길을 등하교하였는데 동구로 나가 남강물과 숫돌바우 샛길을 돌아 들판을 가로지르고 고개를 넘어 10리길을 걸어 다녔다. 내가 팔순을 넘어 골프 한 코스를 거뜬히 걸어내는 다리힘도 그때 얻은 선물일 것이다. 아버지가 비탈밭에 기른 목화를 따서 어머니가 물레로 잣아 실을 뽑아 베틀로 짠 흰 무명베를, 장에 가서 검정물 들여와서 눈썰미 살려 양복으로 재단하여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집어 만든 첫 양복바지 입고, 교과서를 검정 무명책보에 둘둘 말아 어깨에 비스듬히 비껴 메고, 처음에는 검정 고무신, 나중에는 검정운동화 신고 땀흘려가며 3년을 개근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사회생활의 첫 출발이었다. 어찌 그 거룩한 부모님을 잊겠는가. 이 단련은 내 건강일생의 초석이 되었다.

면 소재지 승산으로 다시 가서 꿈에도 아른거리는 첫 모교 지수초등학교를 찾았다. 이게 웬일인가. 승산동은 구씨 허씨들이 부촌을 이루어 기와집이 수북했던 면 소재지였느데 집도 줄고 허전하여 빛을 잃고 떠나간 동네 같았다. LG와 삼성의 창업주도 다 이 초등학교 출신이라는 사실도 유명하다. 그러나 모두 떠나 인구는 줄고 학교조차 통폐합되어 이전하고 빈 터만 남아있다. 교사만 덩그렇게 남은 데다 그때 내 키만 하던 반송 한 그루, 교실높이보다 더 솟아 역삼각형으로 솔부채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교문엔 이전(2009) 광고가 붙어있고 교정 모퉁이엔 학교역사를 간추린 교적비(校跡碑)만 서서 쓸쓸히 나를 맞았다.

텅 빈 옛 지수초등학교 교적비

그러나 이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자 나는 제법 중대한 변혁을 겪게 된다. 할머니를 위시한 가족들과 작별하고 진주유학晉州遊學을 떠났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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