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가족사3

김현거사 2012. 7. 4. 07:04

<가족사 기행> (7) 마지막 훈장訓長

정 태 수

제3일에는 할아버지가 뿌리내린 땅 월아산(달음산) 아래의 옛동네 월아동(달음동)을 찾았다. 여기는 내 탄생지이기도 하다. 내 필명이 월계(月溪)인 것은 월(月)아산 계(溪)곡에서 생을 얻었기에 지은 자호(自號)이다. 월아산의 토박이말은 “달음산”인데 옛 진주와 진양을 합한 현 지명 진주시에서 제일 높은 산(482m)으로, 쌍봉과 그 쌍봉을 잇는 역 포물선의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람하고 준수한 암수 두 봉은 유연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이 고개를 ‘질매재’라 부른다. 말안장 같이 생겨 길마에서 따온 사투리인 것 같다.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서 진성면과 금산면을 동서로 이어 10분이면 넘지만, 옛날에는 10리를 오르고 10리를 내려가야 하는 긴 고개였다. 이 월아산이 서쪽 금호 호수와 어우러져 그 속에 거꾸로 비친 산 그림자 까지 아우르면 한 폭 그림이다. 그래서인지 진주 8경의 하나다.

월아산과 금호

이 월아산 자락은 우리 집 현대사의 산실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조부의 직장인 서당 따라 옮겨 온 새 터전이었다. 그리고 나의 성지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땅이기 때문이다. 바쁜 걸음으로 그곳에 이르니 그 성지는 나무새밭으로 변해 있었다. 마음이 허전하였다. 내 맘에 환상의 초옥 한 채가 떠오른다. 월아산과 언덕 사이 산기슭에 길고 구부정한 개울을 이루고 그 옆의 아늑한 땅에 초가집 하나 있어 거기에서 내가 첫 소리를 외쳤단다. 할아버시 7언절구 시에 나오는 월아모옥月牙茅屋이 그 집이다. 앞으로 그 땅을 사들여 출생지 기념비 하나 세우고 독서실도 열어 동네사람 찾는 곳이 되게 하고 싶지만··· 글쎄다. 그 앞집 문패를 보니 ‘달음산로 53번길 62’라고 씌어있었다

한 100여년 전 이 초막의 풍경을 그려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까꼬실에서 이사 오고 옆 동네 호숫가 숲속의 서당에 매일 출근하고 한시漢詩도 짓고, 할머니는 흐르는 개울물을 퍼서 밥 짓고 아버지 4남매는 자라고… 가난한 선비집에 하루 세 끼 연기는 끊이지 않고 잘도 피어올랐을까.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리’라는 옛 선비의 역설적 구절이 떠오른다. 세월이 흐르고 비교적 넉넉한 창원의 해주오씨 집에서 어머니가 소를 몰고 시집오고, 미인처녀 큰 고모는 지수면 재령이씨 약국댁에, 작은 고모는 행세깨나 한다는 반성면 진양정씨 댁에 각각 시집가고, 숙부는 우리 가문 최초로 신식교육 받으러 금산보통학교에 십리 길을 오가고····

억 새 꽃

한들한들 억새꽃에 할머니가 겹친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새끼-새끼야”

하아얀 치마 적삼, 곱게 빗은 백발하며… 토닥이던 추임새에 우쭐 우쭐 자랐지

장독에 정화수 떠놓고 손 모아 비시더니. 억새가 가슬거린다 산소라도 가뵐까.

얼마 후 어머니가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이 몸이렸다! 어사화御史花 모자 쓴 나와 내 말을 숙부가 몰고 집에 들어오는 태몽도 꾸었단다. 내가 났을 때에는 할아버지의 3년상 중이었다니 할아버지는 가계家系를 이을 이 장손을 만나보지도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거지.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적적하던 자리에 새 손자가 소리치고 나타나니 할머니는 기분전환을 하신 느낌이었는지 자주 “너는 할아버지가 다시 태어난 아이다”라고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손자사랑이 유난하셨다. 또 나에게 “우리 집안은 대단한 양반집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아주 훌륭하신 학자이시다”를 늘 말씀해 주셨기에 어린 나는 우쭐우쭐했었다.

저자: 정선교

국역학고집간행위원회

위원장: 성환덕(문하생 성균관전의)

보급처: 대진대학교 출판부

발행일: 1999.10.15

할머니의 시가자랑 양반자랑과 훌륭항 할아버지상은 어린 신념으로 굳어지고 따라서 할아버지가 쓰시던 서당 교재와 7언절구 시들을 달라고 졸라 숙부로부터 인계받았다. 그리고 부산 서울로 옮긴데다 빈번한 이사철마다 싸들고 가는 등 평생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60이 넘고서야 그 어른을 위한 두 가지 일을 실천했다. 나의 마지막 공직인 대진대학교 총장 시절 8년간의 한 사업이었다. 그 하나는 할아버지 유고문집 「학고집(鶴皐集)」의 발간이요, 그 둘은 할아버지 우국시비(憂國詩碑)의 건립이었다. 책의 저자 이름은 가신지 60년이 넘었지만 할아버지 정선교(鄭璿敎)란 이름로 국역 출간하였다.

(계속)

<가족사 기행> (8) 홀로 남은 우국시비

정 태 수

문집 출판은 쉬웠으나 두 번째 사업인 시비 건립은 힘들었다. 할아버지의 시대는 대한제국이 쇠하다가 망하여 일제강점기로 넘어가고, 서당식 구교육이 사라지고 신식학교가 생겨나던 구한말에서 일제 식민지교육이 터잡아가던 시기를 다 겪는 어려운 시대였다. 할아버지는 쓰라린 그 과도기를 경험한 조선의 ‘마지막 훈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자인 나는 중2에 해방되고 몇 년 뒤에 교단에 서게 되어 신생 대한민국의 초기 교사가 되었으니 가계뿐 아니라 교육계까지 계승한 조손간인데다가 대학의 교장도 거치고 교육정책에도 참여하였으니, 대를 이어 육영사업에 참여한 조손간이 아니겠는가.

세월 따라 그 서당 용호재龍湖齋도 터도 없이 솔밭이 되고 말았지만, 귀하고 아름다운 할아버지의 잔상은 눈언저리를 맴돈다. 서당 소재지인 용심동龍潯洞은 창녕성씨가 많이 사는 곳으로,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할아버지의 마지막 제자 한 분이 마침 장수하고 있었다. 금산면장과 진주향교의 전교典敎로 활동하시던 성환덕成煥德씨로, 어릴 때 그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면서 할머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는 분이었다. 회고담도 들려주셨다.

오직 제자 한 분, 그 분이 남아계셔 주었기에 할아버지 숙원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문집출간위원장도 우국시비건립위원장도 맡아주고 서울로 이장한 조부 조모 내외분의 묘비문도 짓고 서명해주기까지 하셨다. 모든 제자를 아울러 혼자서 대표하는 도움을 주신 것이다. 스승 가고 60여년에 모든 제자도 가고 없는데 딱 한 분 마지막 제자가 남아서 tm승의 마지막 두 가지 기념사업과 천장묘의 묘비와 음기陰記까지 지어 제자의 이름을 올리다니··· 사제간의 아름답고 질긴 인연에 새삼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월계라는 내 자호自號 겸 필명도 그 어른의 심사를 받은 것이다. 성 면장님의 명복을 엎드려 빕니다.

5대 장손(長孫)인 내가 금산을 떠나 서울로 간 지 50년 만에 흩어져있던 내 소관의 고조이후의 역대 산소도 모두 경기도로 옮겨 떠나면서, 우리 가계의 흔적으로 할아버지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뽑아, 정든 월아산이 내려다보고 할아버지 서당 터가 건너다보이는 금호(琴湖) 호반에 세워두고자 계획했다. 이 일은 하나의 역사적 마디를 남기는 사건이라 생각하고 힘을 기우렸었다. 우리집의 까꼬실 7대 250년사와 달음동 150년사를 하직하고, 아득한 11대조 농포공 이전의 세거지 한양(서울)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데에 옛 유적비로 남아 영구히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비 건립 장소를 금호(琴湖) 호반의 물이 한곳으로 몰려 흘러내리는 ‘무넘기’옆에 정하고, 땅 관리자인 진주시 수리조합에 신청하여 사용허가를 받고, 금산면장과 면의회의 건립결의와 승인을 받아, 명승지의 풍경에 어울리는 지리산 자연석 강돌바위를 구입하여 친필 한시와 번역시를 새겨 세우고, 2004년 8월 28일에 고향 어른들과 유지 친지 100여분을 초청하여 모시고 제막식을 치렀다. 정든 진주 금산을 떠나면서 그 할아버지 우국시비 하나 그렇게라도 세워놓고 ‘훈장바위’라 이름 짓고 올라왔으니 그 돌비 하나가 ‘가문사 3대’의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우리집 현대사를 웅변하면서 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뒷면> 월아산 삼학사 (月牙山 三學士)

구한말에 월아산 아래 월아동과 용심동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우국의 선비 세 벗이 살았다. 한일합병을 당하자 북방재배하고 죄인이라 하여 갓을 버리고 패랭이를 쓰며 글로서 망국을 한탄하였다. 세인들은 월아산 삼학사라 칭송하였다.

학고(鶴皐) 정선교(鄭璿敎) 1856~1931

월암(月岩)성환종(成煥鐘)1860~1937 아서(牙西) 성환균(成煥均) 1866~1944 2004. 7. 건립위원장 문하생 성환덕

망국의 한탄 권호 역

물리치기 어려워 만국과 화친하니

멀리서 온 돛단배 나루에 가득하다

기회 틈탄 다른나라 멍석 말듯 하는데

우리임금 무슨 일로 끝내 현명 못했나

선비는 말 멈추고 혼자 선한 체 왜하며

절개군자 어찌하여 성가시다 멀리하나

백성들은 삭막하여 울부짖고 있는데

매국권신 좋은집은 푸른 연기 뿜는구나

亡 國 歎

鶴皐 鄭璿敎

一國難擯萬國親 遠人風帆已多津

異籍乘機如捲席 吾王何事未終仁

智士無言歸獨善 隱倫堅節遠囂塵

海內蒼生啼索莫 權臣安處起靑烟

월아산으로 북악산으로 또 미국 시민으로 부쩍 빨라진 우리 가족 이동속도로 보아 앞으로 달님으로 화성(火星)별로 이사 가게 될지 모른다.혹시 우주 어느 곳에 살더라도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에 지구촌 포천의 선대 묘역 겸 가족 공원에서 열리는 시사(時祀)에 우주의 후손들이 모여 축제를 열었으면 좋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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