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 기행> (2) 의병장 할아버지
정 태 수
한국의 족보는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하바드 대학 도서관에 더 자세히 망라되어 잘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가문의 기록은 서양에서도 독일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등 왕족 계보가 있다. 그리고 공작 백작같은 귀족들의 집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각 가문마다 반드시 족보가 상세히 기록된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하바드 대학에서는 한국 대전의 한 족보 전문 출판사와 계약을 해놓고 새로 출간되는 족보는 전부 납본되도록 해놓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족보는 그 숫자도 많지만,그 족보 기술 방식도 서양에 비해 특이하다고 한다.
이번 편은 나의 11대조 충의공忠毅公 농포 정문부鄭文孚 선생의 입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음 편에서 선생의 추락 전말을 정리하고 넘어갈까 한다.
선생은 명종 20년(1565)에 서울 반송방盤松坊 남소동南小洞(지금의 동대문 근처)에서 태어났다. 5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5언고시古詩를 짓고, 8세에 ‘초월初月’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初月 (8세 작) 초승달
그 누가 곤산의 옥을 쪼아다 (誰斲崑山玉 수착곤산옥 )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던가 (磨成織女梳 마성직녀소) 견우와 이별한 그날 이후로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시름에 겨워 푸른 허공에다 던져버렸네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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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초승달 모양을 직녀의 머리빗으로 비유한 절묘한 묘사와 맑은 詩心이 나중에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성품은 호방하여 편을 짜서 전쟁놀이하면 호령을 하였고, 흥인문 밖에서 범 잡는 구경을 하던 중에도 도망가는 일이 없었다 한다. 유년부터 논어 춘추 시경 서경 좌전 등을 두루 읽어, 21세에 생원시, 24세에 명경과에 제2위로 급제하였다. 그 후 조정의 여러 내직(주서 수찬 정언 지제교 지평)을 역임하다가, 27세에 지방직인 정6품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전임하였다.북평사란 함경도 병사兵使의 문관역 보좌관이지만, 선생은 중앙의 분위기가 싫어 정5품인 사헌부 지평을 버리고 자진 강등하여 옮기신 것이다.
공은 부임하자 학교 통솔, 주민 교화, 민심 순화 등 방침을 일신하였다. 과거 중앙에서는 국토로 편입된지 일천한 지역의 함경도민을 민도 낮은 변방민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그 바탕 아래 종래부터 내려오던 엄격한 지배복종식 교화방식을 지양하고, 중앙의 시혜부족을 통감하여 민간지원확대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낙제와 퇴학을 완화하고 과거 응시를 장려하며 학생군역을 면제하고 지망민의 지방관 임용을 개방하였다. 이런 인정仁政을 베풀고 길주에 경학진흥을 위한 명륜당明倫堂을 신설함으로써 감동과 존경을 받았다. 이는 강자엔 엄격하고 약자에겐 어진 선생의 천성의 발로라 하겠다.
그런데 이듬해(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 22,800이 부산 경주 영천 충주 용인 한양을 지나 6월에는 함경도를 침공해왔다. 함경도 관군은 6월에는 철령鐵嶺에서 겁을 먹고 미리 도망가고, 7월에는 해정창海汀倉에서 한판에 대패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농포공도 이 때 조총에 맞아 얻어먹어가며 떨어진 옷을 입고 산 속 나물 먹고 지낸 적도 있었다 한다. 8월에 무당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피신한 일이 있는데, 주인이 평사님 아니시냐며 알아보는 바람에 공은 퍽 놀랐다고 한다. 그곳 인심이 관리나 군인은 왜군에게 밀고하여 잡아가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추석 차례음식을 공에게 먼저 갖고 올릴 만큼 존경함을 뒤에야 알았다 한다. 그러던 중 평소에 명성을 듣고 있던 선비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등을 만나,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의 집으로 옮겨 의병봉기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함경도 민심은 매우 이반離反된 상태였다. 선조 몽진 후 경복궁을 불태운 서울 민심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리학을 섬기면서 이씨조선 내내 평안도 함경도의 북변민을 차별한 조정, 백성을 가렴주구한 지방관의 적폐도 심했다. 민심이 떠난 지 오래인 북쪽 국경이었다. 그래서 적을 도리어 왜적을 해방군처럼 반기며, 복수의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회령의 아전 국경인鞠景仁 경성의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의 사노 정말수鄭末秀 등이 그 대표적 예였다. 그들은 왜군에 붙어 각각 형조판서· 병사· 대장 등의 왜의 관직을 받고, 빼앗은 왜성을 지켜주고, 피란 온 두 왕자(임해군 순하군)와 대신을 잡아 적에게 넘기고, 수많은 지방관도 포박하여 왜군에 갖다 바친 상태였다. 또한 이 기회를 틈타 북변의 오랑캐가 침입하여 생필품을 약탈하고 부녀와 양민을 납치하는 소란이 빈번하였다. 함경도는 남쪽에서 온 왜란, 안에서 일어난 민란, 북쪽에서 온 오랑캐란의 3란에 휘말리고 수습불능에 빠졌던 것이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선생 창의 토왜도(고려대 소장)
이에 이붕수가 군량을 부담하여 농포공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불러모으니,경성 장사 강문우姜文佑 경성부사 정현룡鄭見龍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처음엔 100명,다시300명으로나중에는6000명까지늘어났다. 북평사보다 관직이 높은 부사급 인사도 많아 선생은 의병대장을 사양했으나 문무겸전이라는 이유와 많은 사람이 원하였다 한다.그에 따라 의병대장을 맡고, 차장엔 정현룡 오응태, 척후장에 강문우, 그밖의 여러 별장別將을 임명하여 진용을 짰다. 평소 이반된 함경도 민심으로 보아 농포공이 미리 베푼 너그러움이 없었더라면 함경도 의병봉기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기이하게도 왜장 가토와 의병장 농포공은 같은 28세로 동갑내기였다. 무인출신과 문인출신의 대결인데다 장창長槍과 단창短槍, 조총鳥銃과 장도長刀의 싸움, 거기에 직업적 칼잡이와 농민군과의 전투였다. 다만 왜군은 추위에 약하여 주로 겨울 농성작전을 펴고, 생활터전을 빼앗긴 의병군은 소수지만 작심하고 매복 기습 속공 소규모전투를 감행함으로서 죽기살기 싸워 물러서지 않았다.
임진년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의 겨울전투의 결과를 보면, 의병군은 7전7승에 왜병 1,135명을 베고 말 133필, 군기 20, 갑주 50, 일본도 100, 총통 26, 총탄 646, 투구 8, 약통 15상자를 노획하였다. 함경도 천리땅을 수복한 대승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왜병 천여명을 칼로 벤다는 것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 국내에서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문부”라 일컬었으며, 일본 기록은 육지전투중 제일 큰 패배를 입었다고 썼다. 손실을 크게 입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무리를 거두어 밤을 타고 철령鐵嶺 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가자 의병군은 그를 쫓아 영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북관 의병군의 7대첩 경성전투(1592.9.16), 길주·장평전투(1592.10.30), 오랑캐토벌(1592.12.15), 쌍포전투(1592.12.20), 길주남문전투(1593.1.19), 단천전투(1593.1.23), 백탑교전투(1593.1.28) |
이와 같이 처절한 저항전을 전개한 함경도 의병군에게는 서쪽으로 부터의 좋은 기운이 뻗혀오고 있었다. 그것은 명나라의 기운이었다. 심유경沈惟敬이 협상을 걸어 그 해 11월에 50일간의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서 의주에 도망와 있던 선조도 한숨 돌린데다가, 이여송李如松의 5만 명나라 지원군이 다음해 정월에 평양성 탈환의 대승을 거둔 것이다. 함경도로 온 가등청정과 평안도로 간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본시 조선침략의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오른 팔 왼팔로 조선침략의 선봉장들이었다. 서쪽날개가 꺾이니 동쪽날개도 고립될까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함경 의병군의 맹렬한 겨울 게릴라전에 연일 패배를 맛보고 있는 가등청정으로서는 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셈이다.
그 당시 '쾌지나 칭칭 나네’란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가등청정이 물러가니 기쁘다는,‘쾌재快哉라 청정淸正 나가네’가 쾌지나 칭칭 나네가 된 것이다. 왜병의 노략질에 벌벌 떨던 함경도민들은 춤추고 노래했다. 장구와 꽹과리로 풍물놀이하였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캐지나 칭칭 나네’로 내려오고 있다. 신나는 이 춤노래는 온나라를 돌아 “우리 군사 이겨주소” “캐지나 칭칭 나네” “왜놈들을 죽여주소” “캐지나 칭칭 나네”로, 다시 “남강물이 술이라면” “캐지나 칭칭 나네” “우리 부모 대접하세” “캐지나 칭칭 나네”로 까지 흘러왔다.
한 50년 전의 일이다. 내가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젊은 날, 일본출장 갔다가 구주(九州)에 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에 들려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아, 나오라, 정문부장군의 후손이 왔다. 사과하라, 이제는 화해하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의 후손은 끊어지고 없었다. 조선 축성술도 보고 가서 나고야성(名古屋성) 오사까성(大坂城)과 함께 이 좋은 일본 3대 명성을 지어놓고·····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반드시 나쁜 일이 따르기 마련이다.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은 농포공의 명성이 자기보다 높은 것을 시기하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꿋꿋한 공의 자세에 반감을 품고, 대부분의 업적을 가로채고 다른 자에게 돌리거나 묻어버렸다. 그 중 국세필鞠世弼이란 부역배를 벤 공적 한 가지만 농포공의 공으로 장계狀啓를 올려 ‘선무원종 1등공신’에 오르고 임란 후 영흥부사직을 받게 되었다. 이때 도둑맞은 공적 모두를 되찾는 데는 사후 반세기 만에 시동이 걸리고 현창에 이르기 까지는 실로 400년이 걸렸다. 다음 편에는 우리 가계가 폐족廢族위기에 몰린 사연을 써볼까 한다. (계속)
<가족사 기행>
(2) 의병장 할아버지정 태 수
初月 (8세 작) 초승달 誰斲崑山玉 수착곤산옥 그 누가 곤산의 옥을 쪼아다 磨成織女梳 마성직녀소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던가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견우와 이별한 그날 이후로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시름겨워 벽공에 던져버렸네 |
공이 부임하자 주민 교화방침을 일신하였다. 즉, 함경도민을 민도 낮은 변방민으로 보는 바탕 아래 종래부터 내려오던 엄격한 지배복종식 교화방식을 지양하고, 국토로 편입된지 일천한 지역에 대한 중앙의 시혜부족을 통감하여 민간지원확대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낙제와 퇴학을 완화하고 과거 응시를 장려하며 학생군역을 면제하고 지망민의 지방관 임용을 개방하는 등의 인정仁政을 베풀고 길주에 경학진흥을 위한 명륜당明倫堂을 신설함으로써 감동과 존경을 받았다. 이는 강자엔 엄격하고 약자에겐 어진 선생의 천성의 발로라 하겠다.
이듬해(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 22,800이 부산 경주 영천 충주 용인 한양을 지나 6월에는 함경도를 침공해왔다. 함경도 관군은 6월에는 철령鐵嶺에서 겁을 먹고 미리 도망가고, 7월에는 해정창海汀倉에서 한판에 대패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농포공도 이 때 조총에 맞아 얻어먹어가며 떨어진 옷을 입고 산 속 나물 먹고 지내다가 8월에 무당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피신한 일이 있는데 주인이 평사님 아니시냐며 알아보는 바람에 놀랐다고 한다. 그곳 인심이 관리나 군인은 왜군에게 밀고하여 잡아가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추석 차례음식을 공에게 먼저 갖고 올릴 만큼 존경함을 뒤에야 알았다 한다. 그러던 중 평소에 명성을 듣고 있던 선비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등을 만나,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의 집으로 옮겨 의병봉기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함경도 민정은 매우 이반離反상태였다. 선조 몽진 후 경복궁을 불태운 서우 민심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것은 안었다. 성리학을 섬기면서부터 이씨조선 내내 평안도 함경도의 북변민을 차별한 조정, 백성을 가렴주구한 지방관의 적폐로 민심이 떠난 지 오래인데다 왜적을 도리어 해방군처럼 반기며, 복수의 기회로 삼으니, 회령의 아전 국경인鞠景仁 경성의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의 사노 정말수鄭末秀 등이 왜군 편에 붙어 각각 형조판서· 병사· 대장 등의 왜의 관직을 받고 빼앗은 왜성을 지켜주고, 피란 온 두 왕자(임해군 순하군)와 대신을 잡아 적에게 넘기고, 수많은 지방관도 포박하여 왜군에 갖다 바친 상태였다. 또한 이 기회를 틈타 북변의 오랑캐가 침입하여 생필품을 약탈하고 부녀와 양민을 납치하는 소란이 빈번하였다. 함경도는 남쪽에서 온 왜란, 안에서 일어난 민란, 북쪽에서 온 오랑캐란의 3란에 휘말리고 수습불능에 빠졌던 것이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선생 창의 토왜도(고려대 소장)
이에 이붕수가 군량을 부담하여 농포공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불러모으니 경성 장사 강문우姜文佑 경성부사 정현룡鄭見龍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니 처믐엔 100명,다시300명으로나중에는6000명까지늘어났다. 북평사보다 관직이 높은 부사급 인사도 많아 사양했으나 문무겸전이라는 이유와 많은 사람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의병대장을 맡았으며 차장엔 정현룡 오응태, 척후장에 강문우, 그밖의 여러 별장別將을 임명하여 진용을 짰다. 평소 이반된 함경도 민심으로 보아 농포공이 미리 베푼 너그러움이 없었더라면 함경도 의병봉기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기이하게도 왜장 가토와 의병장 농포공은 같은 28세로 동갑내기였지만 무인출신과 문인출신의 대결인데다 장창長槍과 단창短槍, 조총鳥銃과 장도長刀의 싸움, 거기에 직업적 칼잡이와 농민군과의 전투였다. 다만 왜군은 추위에 약하여 주로 겨울 농성작전을 펴고, 생활터전을 빼앗긴 의병군은 소수지만 작심하고 매복 기습 속공 소규모전투를 감행함으로서 죽기살기 싸워 물러서지 않았다.
각설하고 임진년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의 겨울전투의 결과를 보자. 의병군은 7전7승에 왜병 1,135명을 베고 말 133필, 군기 20, 갑주 50, 일본도 100, 총통 26, 총탄 646, 투구 8, 약통 15상자를 노획하고 함경도 천리땅을 수복한 대승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왜병 천여명을 칼로 벤다는 것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 국내에서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문부”라 일컬었으며, 일본 기록은 육지전투중 제일 큰 패배를 입었다고 썼다. 손실을 크게 입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무리를 거두어 밤을 타고 철령鐵嶺
북관 의병군의 7대첩 경성전투(1592.9.16), 길주·장평전투(1592.10.30), 오랑캐토벌(1592.12.15), 쌍포전투(1592.12.20), 길주남문전투(1593.1.19), 단천전투(1593.1.23), 백탑교전투(1593.1.28) |
이와 같이 처절한 저항전을 전개한 함경도 의병군에게는 서쪽으로 부터의 좋은 기운이 뻗혀오고 있었다. 그것은 명나라의 기운이었다. 심유경沈惟敬이 협상을 걸어 그 해 11월에 50일간의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서 의주에 도망와 있던 선조도 한숨 돌린데다가, 이여송李如松의 5만 명나라 지원군이 다음해 정월에 평양성 탈환의 대승을 거둔 것이다. 함경도로 온 가등청정과 평안도로 간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본시 조선침략의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오른 팔 왼팔로 조선침략의 선봉장들이었다. 서쪽날개가 꺾이니 동쪽날개도 고립될까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함경 의병군의 맹렬한 겨울 게릴라전에 연일 패배를 맛보고 있는 가등청정으로서는 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던 셈이다.
왜병의 노략질에 벌벌 떨던 함경도민들은 춤추고 노래했다. 그 때 부른 노래가 가등청정 물러가니 기쁘다는 ‘쾌재快哉라 청정淸正 나가네’를 장구와 꽹과리로 풍물놀이하며 오늘날까지 ‘캐지나 칭칭 나네’로 내려오고 있다. 신나는 이 춤노래는 온나라를 돌아 “우리 군사 이겨주소” “캐지나 칭칭 나네” “왜놈들을 죽여주소” “캐지나 칭칭 나네”로, 다시 “남강물이 술이라면” “캐지나 칭칭 나네” “우리 부모 대접하세” “캐지나 칭칭 나네”로 까지 흘러왔다.
한 50년 전의 일이다. 내가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젊은 날, 일본출장 갔다가 구주(九州)에 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에 들려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아, 나오라, 정문부장군의 후손이 왔다. 사과하라, 이제는 화해하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의 후손은 끊어지고 없었다. 조선 축성술도 보고 가서 나고야성(名古屋성) 오사까성(大坂城)과 함께 이 좋은 일본 3대 명성을 지어놓고·····
그러나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은 농포공의 명성이 자기보다 높은 것을 시기하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꿋꿋한 공의 자세에 반감을 품고, 대부분의 업적을 가로채고 다른 자에게 돌리거나 묻어버리고, 그 중 국세필鞠世弼이란 부역배를 벤 공적 한 가지만 농포공의 공으로 장계狀啓를 올려 ‘선무원종 1등공신’에 오르고 임란 후 영흥부사직을 받게 되었다. 이때 도둑맞은 공적 모두를 되찾는 데는 사후 반세기 만에 시동이 걸리고 현창에 이르기 까지는 실로 400년이 걸렸다. 다음 편에는 우리 가계가 폐족廢族위기에 몰린 사연을 써볼까 한다. (계속)
<가족사 기행> (2) 의병장 할아버지
정 태 수
初月 (8세 작) 초승달 誰斲崑山玉 수착곤산옥 그 누가 곤산의 옥을 쪼아다 磨成織女梳 마성직녀소 직녀의 머리빗을 만들었던가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견우와 이별한 그날 이후로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시름겨워 벽공에 던져버렸네 |
공이 부임하자 주민 교화방침을 일신하였다. 즉, 함경도민을 민도 낮은 변방민으로 보는 바탕 아래 종래부터 내려오던 엄격한 지배복종식 교화방식을 지양하고, 국토로 편입된지 일천한 지역에 대한 중앙의 시혜부족을 통감하여 민간지원확대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낙제와 퇴학을 완화하고 과거 응시를 장려하며 학생군역을 면제하고 지망민의 지방관 임용을 개방하는 등의 인정仁政을 베풀고 길주에 경학진흥을 위한 명륜당明倫堂을 신설함으로써 감동과 존경을 받았다. 이는 강자엔 엄격하고 약자에겐 어진 선생의 천성의 발로라 하겠다.
이듬해(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카토키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 22,800이 부산 경주 영천 충주 용인 한양을 지나 6월에는 함경도를 침공해왔다. 함경도 관군은 6월에는 철령鐵嶺에서 겁을 먹고 미리 도망가고, 7월에는 해정창海汀倉에서 한판에 대패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농포공도 이 때 조총에 맞아 얻어먹어가며 떨어진 옷을 입고 산 속 나물을 먹고 지내다가 8월에 무당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피신한 일이 있는데 주인이 평사님 아니냐며 알아보는 바람에 놀랐다고 한다. 그곳 인심이 관리나 군인은 왜군에게 밀고하여 잡아가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추석 차례음식을 공에게 먼저 갖고 올 만큼 존경함을 늦게야 알았다 한다. 그러던 중 선비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등을 만나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의 집으로 옮겨 의병봉기를 논의하였다.
이 무렵의 민정은 매우 이반離反상태였다. 성리학을 섬기면서부터 이씨조선 내내 평안도 함경도의 북변민을 차별한 조정, 백성을 가렴주구한 지방관의 적폐로 민심이 떠난지 오래인데다 왜적을 도리어 해방군처럼 반기며, 복수의 기회로 삼으니, 회령의 아전 국경인鞠景仁 경성의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의 사노 정말수鄭末秀 등이 왜군편에 붙어 각각 형조판서 병사 대장 등의 왜의 관직을 받고 빼앗은 왜성을 지켜주고, 피란 온 두 왕자(임해군 순하군)와 대신을 잡아 적에게 넘기고, 수많은 지방관도 포박하여 왜군에 넘긴 상태였다. 또한 이 기회를 틈타 북변의 오랑캐가 침입하여 생필품을 약탈하고 부녀와 양민을 납치하는 소란이 빈번하였다. 함경도는 밖에서 온 왜란, 안에서의 백성 반란, 북쪽의 오랑캐란의 3란에 휘말리고 수습불능에 빠졌던 것이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선생 창의 토왜도(고려대 소장)
이에 이붕수가 군량을 부담하여 농포공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불러모으니 경성 장사 강문우姜文佑 경성부사 정현룡鄭見龍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니 처믐엔 100명,다시300명으로나중에는6000명으로늘어났다. 북평사보다 관직이 높은 부사급 인사도 많아 사양했으나 문무겸전이라는 이유와 많은 사람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의병대장을 맡고 차장엔 정현룡 오응태, 척후장에 강문우,그밖의여러별장別將을 임명하여 진용을 짰다. 평소 이반된 함경도 민심으로 보아 농포공이 미리 베푼앞선 너그러움이 없었더라면 함경도 의병봉기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기이하게도 왜장 카토와 의병장 농포공은 같은 28세로 동갑내기였다. 왜군은 추위에 약하여 주로 겨울 농성작전을 펴고, 생활터전을 빼앗긴 의병군은 소수지만 작심하고 매복 기습 소규모전투를 감행함으로서 지는 일이 없었다.
각설하고 임진년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의 겨울전투의 결과만을 보자면 의병군은 7전7승에 왜병 1,135명을 베고 말 133필, 군기 20, 갑주 50, 일본도 100, 총통 26, 총탄 646, 투구 8, 약통 15상자를 노획하고 함경도 천리땅을 수복한 대승이었다. 국내에서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문부”라 일컬었으며, 일본 기록은 육지전투중 제일 큰 패배였다고 썼다. 손실을 크게 입은 가등청정(加藤淸正)
북관 7대첩 경성전투(1592.9.16), 길주·장평전투(1592.10.30), 오랑캐토벌(1592.12.15), 쌍포전투(1592.12.20), 길주남문전투(1593.1.19), 단천전투(1593.1.23), 백탑교전투(1593.1.28) |
이 무리를 거두어 밤을 타고 철령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가자 그를 쫓아 영동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도민들은 춤추고 노래했다. 그 때 부른 모듬노래가 ‘칭칭 나네’였다 한다. 가등청정 물러가니 기쁘다며 ‘쾌재快哉라 청정淸正 나가네’ 를 합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의 시기와 훼방을 받은 공은 대부분의 업적을 가로채이고 묻히고, 그 중 한 가지만 장계狀啓를 올려주어 ‘선무원종 1등공신’에 오르고 임란 후 영흥부사 길주목사 안변부사 공주목사 등을 거쳐 나중에는 예조참판에 이르고 또 병조참판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때 인정받지못한 나머지 공적을 찾는데는 사후 400년이 걸렸다. 우리 가계가 폐족廢族 위기에 몰린 사연을 써볼까 한다. (계속)
<가족사 기행> (3) 아, 폐족廢族의 위기
정 태 수
임란 후 ‘선무원종 1등공신’에 오르고 영흥부사직을 받았던 11대조 농포공이 그후 불우한 죽음을 당한 것은 모함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박홍구역모사건 연루 혐의이며, 그 둘은 ‘초회왕’을 읊은 시에서 연유된 시화詩禍사건이다.
임란 후 공은 37세에 예조참판을 지내고 48세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또 51세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손사래를 저었다. 58세에 지방관인 창원부사에 부임하였다. 여기서 여가에 서사시 10수를 지었다. 그 중의 한 수는 “촉석루”라는 시제로 지금 촉석루에 액자로 걸려있다.
촉 석 루 矗 石 樓
임진년의 병화가 팔도를 휩쓴 그때 龍歲兵焚 捲八區
무고한 재앙으로 참혹했던 이 성루 魚殃最慘 此城樓
돌은 구르잖고 첩첩 쌓인 그대론데 石非可轉 仍成矗
강은 또 무슨 맘에 스스로 흐르는가 江亦何心 自在流
폐허 살리기에 신과 사람이 힘을 보태 起廢神將 人工力
허공 찢고 하늘과 땅이 함께 떠올랐네 凌虛天與 地同浮
모름지기 알리라 수어장이 맡은 일을 須知幕府 經營手
한 고을의 장려한 수장만이 아님을··· 壯麗非徒 鎭一州
또 한 수는 “초 회왕(楚 懷王)”이라는 시다. 이 시가 뒤어 농포공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될 줄을 그 뉘가 알았겠는가.
광해조를 지나고 인조반정(1623년)의 해가 되자, 조정은 공을 원수(元帥) 물망에 올려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공은 편모 봉양을 위하여 또다시 지방의 원을 희망하여 59세에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그 후 재임 3개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사임하고, 관을 모시고 의정부 송산에 올라와 3년의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상중인 다음 해 인조2년(1624) 정월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 그러자 조정은 이를 토벌할 부총관으로 공을 기용했다. 이때도 공은 왕의 행차를 용인龍仁까지 좇아가 알현하고, 등창으로 운신이 어렵다며 사양하고 이를 허락 받고 돌아왔다.
그 뒤 공은 어머니 상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했다. 그 해 10월, 박홍구 역모사건 연루 혐의로 투옥되어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추국청推鞫廳의 ‘박홍구 옥사문서’라는 기록에 의하면, 애초에 농포공은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한다. 박홍구 일당의 역모 사건 문초 중에 공의 이름이 나와 공도 체포되어 함께 국문을 당한 것이다. 내용인즉 역모 도당들은 그들끼리 문무겸전을 이유로 농포공을 그들 반군의 선봉장으로 추대하기로 의논을 정하고, 그 임무를 선생의 종기 치료를 위하여 공의 집에 출입하던 침의鍼醫 이대검李大儉에게 공의 허락을 받는 일을 맡겼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인조 어전에서 고변자(심일민 이이 김인 이대온) 증언이 열리고 추국 왕명과 국문 조칙詔勅이 내려졌다. 추국청推鞫廳 정국庭鞠 관원도 정해졌다.
영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 대사헌 이수광李睟光 동지사 이경함李慶涵 행판사 이정구李廷龜 동지사 윤훤尹暄 행판사 김류金瑬 행방승지 김덕성金德誠 사간 이명한李明漢 직강 오준吳竣 전의 조익趙翼 별형방경력 권훈權勳 부교리 이기조 부사직 김영조金榮祖 ―이하 생략― |
여러 날의 조사와 문초를 거쳐나갔는데, 11월 11일부터 9일간 열어 진행된 이 정국에서 일부는 무혐의로 석방도 되었지만, 여럿이 극형을 당했다.
능지처참 7명; 박윤장 이계종 김원 박지장 박선장 이대검 이내온 자진 1명; 박홍구 물고 4명; 박일장 박유장 이시망 박진장 |
이 때 농포공도 9일간 신장(訊杖, 몽둥이) 30대씩 5회, 압슬(壓膝) 3회라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압슬이란 무릎 밑에 사금파리를 깔고 무릎위에 무거운 널빤지와 돌을 놓는 중고문이다. 이런 모진 고문 끝에 반역자 중 유일한 접촉자인 침의사 이대검을 대질한 결과, 이대검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공이 어렵고 겁나 감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는 진술을 하였고, 그래서 이대검과 농포공 간의 이에 관한 대화가 없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공의 역모 연루가 없고 무고함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하여 11월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좌의정 윤방尹昉이 “정문부는 역모 선봉장 제의에 응한 흔적이 없다”는 결과를 보고 하였다. 이로서 이 역모 연루 사건은 종결되었다.
후손으로서 지금 생각해도, 참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때 만약 우리 11대 할아버지 농포 할아버지가 매를 못 견디거나 심약하여 사실여부를 떠나 굴복함으로서 대역죄大逆罪를 뒤집어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일족 또는 직계자손이 몰살당하고, 여자는 노비가 되는 비운을 맞았을 것이었다. 반역죄인으로 확정되어 능지처참형에 처해지고, 두 아들도 연루자가 되어, 우리 집안은 대가 끊어져 폐족廢族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계속)
<가족사 기행> (4) 가문의 한, 시화詩禍 사건
정 태 수
인조2년(1624) 11월 17일의 어전회의로 농포 공에 대한 역적몰이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이때, 낭패감을 느낀 것은 대관(臺官) 박정(朴炡)과 그 하수인 윤훤(尹暄)이었다. 그들은 이번에는 공이 지은 ‘초회왕(楚懷王)’이라는 시가 인조에게 반역의 뜻을 품은 흉시(凶詩)라는 누명을 씌워, 급히 죄목을 추가하였다. ‘초회왕’ 시의 작시 의도가 인조 비방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원래 이 시는 공이 5년 전 창원 부사 시절 심심풀이로 지었다가 휴지와 함께 농포공이 시묘侍墓살이하는 여막廬幕의 벽지로 발라졌던 것인데, 공의 장남 정대영의 동서(익성군의 사위들)인 최내길(崔來吉, 최명길의 아우)이 문상 왔다가 오래 앉아있으면서 보고 가서 퍼뜨린 것이다. 이것을 대관 박정과 윤훤이 무슨 목적있는 시라며 문초를 청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인 18일 다시 정국문초로 넘어갔다. '박홍구 옥사문서'에 의하면, 이날도 정국을 열어 ‘초 회왕’ 시가 곧 인조를 비방한 시가 아니냐는 물음으로 4차 형문을 열고 신장 30도와 압슬을 가하던 중, 추국청은 농포공의 몸이 혹형을 감당할 형편이 아님을 감안하여 “내일 가형할 것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 당시 임금의 측근인 대관(臺官) 박정(朴炡)과 그 하수인 윤훤(尹暄)이 농포 공을 '박홍구의 반란'에 참가했다는 대역죄를 씌웠다가, 그것이 어렵게 되자 ‘초회왕’ 이란 시가 인조를 비방한 것이라고 계속 몰아부쳤을가. 족보의 기록을 보면 그 연유를 알 수 있다. 바로 1년 전, 공이 전주부윤 당시 환곡(還穀)을 갚지 않는 불법거간꾼을 감금했는데, 그를 풀어주라는 인조 반정공신 박정(朴炡)으로 부터 열흘에 세 번이나 압력을 받고도, 이를 특사로 내보내지 않고 거절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의 청탁과 압력을 받고도 이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농포공의 성품 때문에 그들은 이에 원한을 품었다가 이때에 되갚은 것이다. 윤훤은 최내길 형제의 수족이었기 때문이라고 농포집 연보가 밝히고 있다.
그럼 문제의 초회왕楚 懷王이란 칠언절구 내용은 어떤 내용인가.
楚 懷王
楚地靑山 有九疑 초나라 청산에 구의산이 있는데
楚有三戶 亦秦亡 초 망하여 3호뿐이나 진 역시 망했으니
懷王何事 信張儀 회왕은 어찌하여 장의를 믿었던가.
未必南公 說得當 남공의 이간질 설득까지 굳이 필요했을까
商於六百 終難割 오의 육백리 땅 떼어주기 어려웠지.
一入武關 民望絶 한번 무관 들어가자 백성 희망 끊겼는데
湘水空流 不盡悲 상강만 덧없이 흘러 슬프기 그지없네.
孱孫何事 又懷王 잔약한 손자 세워 어찌 또 회왕이라 했던가.
농포집農圃集에 의하면 이 시는 인조반정 5년 전 창원부사 당시에 심심풀이로 지은 10수 중의 하나이다. 이 시는 속이고 먹히고 하는 전국시대 중원의 덧없는 역사를 읊은 단순한 영사시(詠史詩)라고 한다. 그 내용 중 마지막 부분, <잔약한 손자>라는 부분이 인조를 의미하는 불충한 시라고 몰아부쳤지만, 아직 생기지도 않은 훗날의 인조반정을 거사 5년 전에 어찌 미리 알고 시로 읊어 비난 할 수가 있었겠는가. 녹피에 가로왈처럼, 이리 저리 제멋대로 아전인수격으로 만든 어처구니 없는 죄목이었다. 참으로 무능하고 혼탁한 군주와 간신배 였다.
어쨌던 농포공을 해치려는 자는 인조 반정의 혁명주체세력이며 언제나 인조 편인 대관臺官 박정朴炡이었다. 그는 농포공에 대한 인조의 불편한 마음을 잘 알고 무슨 진언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농포공에게 설욕의 기회를 노려보고 있었던 자 였다. 이것이 시화사건 전야의 터전이었다. 당시 임금인 인조 역시 문제였던 것 같다. 그들은, <국난극복의 충신으로 요직에 출사한 농포공이, 인조반정 후 원수에 앉히려 해도 듣자않고 전주부윤을 제수했는데도 얼마 안가서 모친상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괄의 난 진압에 부총관을 임명했는데도 칭병 거절하고, 자기편인 반정공신들의 빈정댐은 자주 들어온 터> 였다. 그래서 처음 옥사는 죄가 입증되지 않아 반역죄는 되지 않았지만, 인조정부에 비협조적인 반대성향의 인물로 각인된 농포 공을 이 참에 처단하려는 분위기가 되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요즘 말로 일종의 괘씸죄였던 것이다.
임란 때 서울을 버리고 압록강을 넘어 남의 나라로 꼴사납게 피신하려던 선조가 나중에 바다를 지킨 이순신 장군을 핍박한 사례와 유사한 대목이다.
그리하여 11월 19일 농포공의 5차 정국 문초가 시작되었다. 이날도 신장 30도에 압슬을 가하고 난 후, 추국청은 또다시 “불면과 병세 방중하여 내일 가행함이 여하?”라는 품위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뜻밖의 답이 내려왔다. “정문부 물고 집행하라”는 영이 내린 것이다. 물고(物故)란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물고령은 인조가 내린 것이다. 물론 측근의 건의를 받아 재가를 내린 것일 것이다. 이때 문사랑(問事郞, 문초관) 이식(李植)과 조익(趙翼)은 이 <초회왕> 시가 다른 뜻이 없는 단순한 영사시(詠史詩)이니 어찌 죄가 될 수 있겠느냐며 힘써 다투었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그날 바로 임진난의 의병대장 농포선생은 죄의 자백도 입증도 증거도 없이 시화詩禍로 60세의 병든 몸이 만신창이의 시신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새 죄목을 추가한지 불과 이틀 사이에 속전속결한 불법살인이었다. 필시 무고한 형벌에 대한 후일의 당사자 항변과 형벌현장의 증언이 있을 경우, 소명과 대응방도가 궁할 것이 명백하므로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당사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계산에 따라 무리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 추정된다.
이 때 모진 매타작과 압슬의 고통을 면하고 속히 죽어버리고 싶다는 극한상황으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초지일관 무죄 사실을 굽히지 않고 버틴 농포 할아버지의 그 아픈 마음을 지금도 짐작할 수 있다. 그때 만약 공이 고통을 못견뎌 거짓 승복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3족을 멸한다는 대역죄를 둘러쓸 경우, 자손과 일족이 당할 위해를 염려한 고뇌에 찬 항거가 없었더라면, 끝내 우리 가문의 까꼬실시대는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계속)
<가족사 기행> (4) 의병대장의 수모
정 태 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일족이 서울에서 진주로 낙남하게 된 데에는 나의 11대조 농포공이 불우하게 걸려든 두 가지 혐의사실에서 연유한다. 그 하나는 박홍구역모사건 연루혐의이며 그 둘은 ‘초회왕’ 시화詩禍사건이다.
初月 (8세 작) 초승달 誰斲崑山玉 수착곤산옥 그 누가 곤륜산의 옥을 쪼아다 磨成織女梳 마성직녀소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가 牽牛離別後 견우이별후 견우와 이별한 뒤로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시름겨워 벽공에 던져버렸네 (이은상 역) |
그리하여 함경도를 낙후된 변방으로 멸시하는 종래의 엄격한 지배복종식 교화방식을 지양하고, 민도가 낮은 원인이 국경지대에의 중앙의 시혜부족에 있는 만큼 이에 상응하게 낙제와 퇴학을 완화하고 학생군역을 면제하는 등 인정仁政을 베풀고 촉룡서당燭龍書堂이라는 서민하교와 길주에 경학진흥을 위한 명륜당明倫堂을 신설하여 감동과 존경을 받았다. 이는 강자엔 엄격하고 약자에겐 어진 공의 천성의 반영이라 하겠다. 여기서 농포공의 8세작 5언절구 시 한 수를 올린다.
북관 7대첩 경성전투(1592.9.16), 길주·장평전투(1592.10.30), 오랑캐토벌(1592.12.15), 쌍포전투(1592.12.20), 길주남문전투(1593.1.19), 단천전투(1593.1.23), 백탑교전투(1593.1.28) |
그러나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의 불화와 훼방을 받아 대부분의 공을 가로채이고 묻히고, 그 중 한 가지만 보고되어 ‘선무원종 1등공신’에 오르고 임란 후 길주목사 안변부사 공주목사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고 또 병조참판을 제수 받았다.
충의공 농포 정문부선생 창의 토왜도(고려대 소장)
또 1623년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하자 사임하고 의정부 송산에 올라와 3년을 시묘(侍墓)살이 하였다. 인조2년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할 부총관으로 기용되셨으나 왕의 행차를 용인龍仁까지 좇아가 알현하고 병으로 운신이 어렵다며 사양하고 허락 받았다. 그러나 그 해 인조2년 11월, 60세에 무리한 물고物故를 당하여 생애를 마쳤으니 그 억울함은 하늘에 닿았다.
추국청의 ‘박홍구옥사문서’라는 기록에 의하면 박내장朴來章 일당의 역모가 발각되었는데 문초도중에 그들끼리 문무겸전을 이유로 농포공을 반군의 선봉장으로 추대하기로 정하고, 그 임무를 선생의 종기 치료를 위하여 농포가에 출입하는 침의鍼醫 이대검李大儉에게 공의 허락을 받는 일을 맡겼다는 실토를 받았다. 그러나 이대검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공이 어렵고 겁나 감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이 혐의로 농포공도 인조2년 10월에 투옥되고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영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 대사헌 이수광李睟光 동지사 이경함李慶涵 행판사 이정구李廷龜 동지사 윤훤尹暄 행판사 김류金瑬 행방승지 김덕성金德誠 사간 이명한李明漢 직강 오준吳竣 전의 조익趙翼 별형방경력 권훈權勳 부교리 이기조 부사직 김영조金榮祖 ―이하 생략― |
능지처참 7명; 박윤장 이계종 김원 박지장 박선장 이대검 이내온 자진 1명; 박홍구 물고 4명; 박일장 박유장 이시망 박진장 |
농포공은 신장(訊杖, 몽둥이) 30대씩 5회, 압슬(壓膝, 무릎 밑에 사금파리 놓고 무릎위에 무거운 널빤지와 돌을 놓는 중형) 3회라는 모진 고문 끝에, 반역자 중 유일한 접촉자인 침의鍼醫 이대검李大儉을 대질한 결과, 역모연루는 무고함이 밝혀져 11월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좌의정 윤방(尹昉)이 “정문부는 역모 선봉장 제의에 응한 흔적이 없다”는 결과 보고를 함으로서 종결된 듯하였다. (계속)
<가족사 기행> (5) 천추의 한, 시화詩禍
정 태 수
인조2년(1624) 11월 17일의 어전회의로 역적몰이가 실패로 끝나자 낭패감을 느낀 대관(臺官) 박정(朴炡)과 그 하수인 윤훤(尹暄)이, 공이 지은 ‘초회왕(楚懷王)’이라는 시가 인조에게 반역의 뜻을 품은 흉시(凶詩)라는 누명을 씌워 급히 죄목을 추가하였다. 높은 자리에 있는 고관들도 왕의 마음에 유의할 뿐 아니라 유력한 반정공신의 말을 함부로 꺾지 못했다. 이어 18일의 정국문초로 넘어갔다.
박홍구 옥사문서에 의하면 이날도 정국을 열어 ‘초 회왕’ 시의 작사 의도를 추궁했다. 곧 인조를 비방한 시가 아니냐는 물음으로 4차 형문을 열고 신장 30도와 압슬을 가했다. 그러나 추국청은 농포공의 몸이 혹형을 감당할 형편이 아님을 감안하여 “내일 가형할 것을 요청”하여 승인받았다. 다음날 11월 19일은 농포공 5차 형문일로서 오늘도 신장 30도에 압슬을 가하고 난 후, 추국청은 또다시 “불면과 병세 방중하여 내일 가행함이 여하?”라는 품위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뜻밖에도 “정문부 물고 집행하라”는 영이 내려왔다. 이에 따라 그날 바로 물고를 집행하고 말았다. 임난 의병대장 농포선생은 죄의 자백도 입증도 없이 시화를 입어 만신창이의 시신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때의 물고령은 인조왕이 내린 것이다. 물론 신하의 건의를 받아 재가를 내린 것일 것이다. 추측컨대 그 무리한 건의에 동감하고 극형을 결심한 인조의 심사를 감히 헤아린다면, 선조조와 광해조에 국난극복의 충신으로 요직에 출사한 농포공이,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을 제수했는데도 얼마 안가서 모친상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괄의 난 진압에 부총관을 임명했는데도 칭병 거절하고, 자기편인 반정공신들의 빈정댐은 자주 들리고, 이번 옥사에서 죄가 입증되지 않아 반역죄는 Tm지 않았지만, 인조정부에 비협조적인 반대성향의 인물로 각인되어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기에 고자질하는 자는 혁명주체세력이며 언제나 인조 편인 대관(臺官) 박정(朴炡)이었다. 그는 농포공에 대한 인조의 불편한 마음을 잘 알고 무슨 진언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농포공에 설욕의 기회를 노려보고 있었던 때이었다. 이것이 시화사건 전야의 터전이었다. 문제의 칠언절구는 다음과 같다.
楚 懷王
1. 楚地靑山 有九疑 2. 楚有三戶 亦秦亡
懷王何事 信張儀 未必南公 說得當
商於六百 終難割 一入武關 民望絶
湘水空流 不盡悲 孱孫何事 又懷王
초 회왕
1. 초나라 청산에 구의산이 있는데 2. 초 망하여 3호뿐이나 진 역시 망했으니
회왕은 어찌하여 장의를 믿었던가. 남공의 이간질 설득까지 굳이 필요했을까
오의 육백리 땅 떼어주기 어려웠지. 한번 무관 들어가자 백성 희망 끊겼는데
상강만 덧없이 흘러 슬프기 그지없네. 잔약한 손자 세워 어찌 또 회왕이라 했던가.
농포공의 이 시는 속이고 먹히고 하는 전국시대 중원의 덧없는 역사를 읊은 영사시다.
농포공 모함에 이용된 구절은 2절의 잔약한 손자 부분인듯 하나 인조와 걸맞지도 않는다.
농포집에 의하면 이 시는 인조반정 5년 전 창원부사 당시에 심심풀이로 지은 10수 중의 하나로, 휴지와 함께 농포공이 시묘侍墓살이하는 여막廬幕의 벽지로 발라졌던 것인데, 공의 장남(정대영)의 동서(익성군의 사위들)인 최내길(崔來吉, 최명길의 아우)이 문상 왔다가 오래 앉아있으면서 보고 가서 퍼뜨린 것으로, 대관 박정과 윤훤이 무슨 목적있는 시라며 문초를 청한 것이었다. 이때 문사랑(問事郞, 문초관) 이식(李植)과
조익(趙翼)이 다른 뜻이 없는 단순한 영사시(詠史詩)이니 어찌 죄가 될 수 있겠느냐며 힘써 다투었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19일에 물고(物故, 몽둥이로 때려서 죽임)령이 내리고 마니 새 죄목을 추가한지 불과 이틀 사이에 속전속결한 불법살인이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인조반정을 거사 5년 전에 어찌 미리 시로 읊어 비난했겠는가? 필시 무고한 형벌에 대한 후일의 당사자 항변과 형벌현장의 증언이 있을 경우, 소명과 대응방도가 궁할 것이 명백하므로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당사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는 계산에 따라 무리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 추정된다. 그리고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바로 1년 전쯤 공이 전주부윤 당시 환곡(還穀)을 갚지 않는 불법거간꾼을 감금했는데 그를 풀어주라는 인조반정공신 박정(朴炡)으로 부터 열흘에 세 번이나 중앙의 청탁과 압력을 받고도,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농포공이 이를 특사하지 않고 끝내 환곡을 회수하고 말자 원한을 품었다가 이때에 되갚은 것이며, 윤훤은 최내길 형제의 수족이었기 때문이라고 농포집 연보가 말하고 있다.
또한 모진 매타작과 압슬의 고통을 면하고 속히 죽어버리고 싶다는 극한상황으로 내몰린 상황에서도 초지일관 무죄 사실을 굽히지 않고 버틴 까닭은, 명예사수와 거짓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공의 꿋꿋한 성품도 작용했겠지만, 3족을 멸한다는 대역죄를 둘러쓸 경우, 자손과 일족이 당할 위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고뇌에 찬 항거였을 것이다. 그 아픈 마음을 지금에 와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만약 공이 고통을 못견뎌 거짓 승복했더라면 우리 가문의 까꼬실시대는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가족사 기행> (6) 폐족廢族에서 공신가功臣家로
정 태 수
농포공의 시화사건 그 후 우리 가문은 먹구름에 덮였다. 가히 폐족廢族 지경에 빠졌던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겪고 안으로는 4색당쟁으로 내우외환이 겹쳤다. 그러나 가로채고 묻혀졌던 선생의 구국안민의 공훈은 기어이 빛을 보고 현창되고 말았다. 이 회복은 실로 사후에 400년이 걸렸다.
먼저 후임 북평사 이식(李植)과 그 아드님 이단하(李端夏)에 의하여 저술된 북관지(北關誌)의 완성으로 3란평정의 공적이 문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3란 평정’이란 세가지 난리를 다 다스렸다는 것으로, 카토 키요마사의 2만여 왜병이 관북엘 쳐들어오자, 오랫동안 이반되어온 관북의 민심이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이 여러 곳에서 부역附逆반란하고, 이 틈을 탄 오랑캐가 무리지어 수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양민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해 갔다. 관군과 치안이 무너진 함경도의 임진년은 이러한 안팎의 3란을 오직 의병단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군만 상대하는 다른 지방 의병과 달리 정문부 의병장은 왜란 내란에 오랑캐란까지 합쳐 이렇게 3란을 평정한 것이 특이하다 하겠다.
공의 사후 41년인 현종6년에는 영의정 정태화(鄭泰和)의 상소로 억울한 누명이 신원(伸寃 1665)이 이루어져 자손에게는 등용문이 열리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단하가 애써 영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도움을 받아 사후 43년만인 1667년 정월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라는 문무를 겸한 긴 증직贈職을 받았다.
증손 정삼(鄭杉)의 상소가 받아드려져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를 받게 되었다.
한편 이듬해부터 농포공은 함경도에 경성 창렬사(彰烈祠 1667), 회령 현충사(顯忠祠 1707), 부령 숭열사(崇烈祠 1860), 모의사(慕義祠) 등에 사액사당에 제향되셨고, 좌찬성에 추증되고 까꼬실 후손에게는 부조전(不祧典)을 내렸다. 이로서 우리 가문사도 억울하게 둘러쓴 폐족廢族지경에서 짧게는 40년에서 길게는 400년이 걸려 국난극복 공신가로활짝꽃이피었다.
돌아온 북관대첩비 400년 전 관북의병 인천공항을 내린다 승전비가 볼모되어 100년간을 갇혔다가 충의공 앞세우고 6000명이 무리되어 후손이 시동걸고 온 나라가 핏대올려 돌 하나 북관대첩비에 모두가 뭉쳐있네. 30년 반환운동이 열매 맺어 돌아온 비.
2만 왜에 7대첩 함경도 땅 찾았지만 다투던 남북한이 이 비로 마음 합쳐 공훈은 훔쳐가고 모함으로 물고사 금줄 넘어 임명 땅 본디 자리 가시니 땅치고 울고울어도 그 한 어찌 씻으랴. 그 날의 구국정신을 후세에 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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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후 진양호 조성으로 일족이 솔권하고 종가가 용암(龍岩)으로 옮기자, 11대손 정한재(鄭翰載) 주도로 부조전과 사당을 이전하고 박정희 대통령 친필사액의 충의사(忠義祠 1977)를 세워 해마다 춘향제를 올리고 있다.
의정부 송산의 농포공 묘역은 11대손 정태진(鄭泰辰)의 노력으로 경기도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문화재지정비를 묘앞에 세웠다.
필자(11대손)가 송산종중 소임을 맡자 도비와 시비를 보조받아 묘전 사당 충덕사(忠德祠 2002)를 짓고 복지문(復地門)을 열고 홍살문을 세웠다. 또 정부 지정의 충의공 영정(국가영정 77호)을 닫집에 걸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한편 종재를 들여 재실 송산재(松山齋)를 지었다. 이은상李殷相 국역은 해놓고 인쇄가 중단되어있던 시집 겸 문집인 국역농포집(國譯農圃集)도 간행했다. 그리고 해마다 유림(河有輯씨 주도)의 추향제(秋享祭)를 올리고 의정부 무용단체가 축제를 열기도 하게 되었다.
송산 묘전 충덕사 북관대첩비 이모비(송산)
송산 사당이 들어선 후 시호를 따서 인근에 충의로(忠毅路)와 충의중학교가 명명되고, 공의 시묘살이가 이 지역 전설이 되어 그 산을 효자봉이라 불러왔었는데 이를 받아 효자중학교가 명명되었다.
이리하여 평소에 갈 수도 없는 북한 땅 함경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충의공의 의병활동의 역사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남한 땅 의정부 송산의 충의고묘가 비로소 의병장의 묘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해, 참배와 숭모의 열이 일어나고 백일장으로 학생 교육장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남북통일의 그날이 기다려진다. 북의 사적과 남의 의병장묘가 소통되는 날이 기다려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