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8) 마지막 훈장訓長

김현거사 2012. 7. 19. 21:13

 

<가족사 기행> (8) 마지막 훈장訓長

정 태 수

 지금까지 이야기는, 서울에서 살던 우리 해주 정가가 진주 까꼬실에 와서 살게 된 내력이다. 여행 3일째  날에는 할아버지가 뿌리내린 땅 월아산(달음산) 아래의 옛 동네 월아동(달음동)을 찾았다.  월아산 토박이말은 “달음산”인데 옛 진주와 진양군을 합한 현 진주시에서 제일 높은 산(482m)이다. 정상은 우람하고 준수한 암수 두 쌍봉이 역 포물선의 유연한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이 고개를 ‘질매재’라 부른다. 말안장 같이 생겼다고 길마에서 따온 사투리인 것 같다.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서 진성면과 금산면을 동서로 이어 10분이면 넘지만, 옛날에는 10리를 오르고 10리를 내려가야 하는 긴 고개였다. 이 월아산이 서쪽 금호琴湖 호수 속에 거꾸로 비친 산 그림자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진주 8경의 하나 이다. 산속에 있는 청곡사 역시 시민들이 즐겨찾는 명승지인데, 지금 사하촌에는 멋진 찻집들이 몇개 보였다. 이 월아동이 내 탄생지 이다. 내 필명이 월계(月溪)인 것은 월(月)아산 계(溪)곡에서 생을 얻었기에 지은 자호(自號)이다.

월아산과 금호

  월아산은 나의 성지 이다. 내가 태어난 땅이다. 바쁜 걸음으로 그곳에 이르니, 성지는 남새밭으로 변해 있었다. 허전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내 맘 속에 환상의 초옥 한 채가 떠오른다. 월아산 사이 산기슭은 길고 구부정한 개울을 이루고 있다. 개울 옆의 아늑한 땅에 초가집이 있으니, 여기가 할아버지 7언 시에 나오는 월아모옥月牙茅屋이다. 내가 첫 고고성을 낸 곳이다.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이 땅을 사들여 출생지 기념비 하나 세우고 독서실을 열어 동네사람 찾는 곳이 되게 하고 싶지만··· 글쎄다. 그 앞집 문패를 보니 ‘달음산로 53번길 62’라고 씌어있었다

 100여년 전 이 초막의 풍경을 그려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여기로 이사를 오자, 할아버지는 옆 동네 호숫가 숲속의 서당에 매일 출근하시어 한시漢詩도 짓고, 할머니는 흐르는 개울물을 퍼서 밥 짓고, 아버지 4남매가 자랐다. 이 월아산 자락은 우리 집 현대사의 산실이다. 할아버지 시대는 대한제국이 쇠하고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던 때다. 서당식 구교육이 사라지고 신식학교가 생겨나던 구한말에서 일제 식민지교육이 터잡아가던 어려운 시대였다. 할아버지는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던  조선의 ‘마지막 훈장’이셨다.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넉넉한 창원의 해주 오씨 집에서 어머니가 소를 몰고 시집오고, 미인처녀 큰 고모는 지수면 재령이씨 약국댁에, 작은 고모는 행세 깨나 한다는 반성면 진양 정씨 댁에 각각 시집가고, 숙부는 우리 가문 최초로 신식교육 받으러 금산보통학교에 십리 길을 오갔다.

얼마 후 어머니가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나다. 어머니는 꿈에 어사화御史花 를 쓴 나를 태운 말을 숙부가 몰고 집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셨다고 한다. 훗날 나는 옛날로 치면 참판 벼슬에 올랐으니, 그 태몽이 적중한 셈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할아버지 3년상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가계家系를 이을 이 장손을 만나보지도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적적하던 집안에 새 손자가 태어나자, 할머니가 “너는 할아버지가 다시 태어난 아이다”라고 자주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할머니의 손자사랑은 유난하셨다. “우리 집안은 대단한 양반집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아주 훌륭하신 학자이시다”고, 늘 말씀해 주시어 어린 내가 우쭐우쭐하던 기억이 새롭다.

 

억 새 꽃

1. 한들한들 억새꽃에 할머니가 겹친다 

하아얀 치마 적삼, 곱게 빗은 백발하며 

장독에 정화수 떠놓고 손 모아 비시더니.

 

2.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새끼-새끼야”

토닥이던 추임새에 우쭐 우쭐 자랐지

억새가 가슬거린다 산소라도 가뵐까.

 

할머니의 시가집 자랑과 할아버지 선비 자랑 속에 자란 나는, 중2에 해방이 맞고, 몇 년 뒤에 교단에 서게 되어 신생 대한민국의 초기 교사가 되었다. 그 후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문교부 차관을 거쳐, 서울 교육대학교, 대진대 총장을  지냈다. 조손간이 대를 이어 육영사업에 참여한 셈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서당 교재와 7언 시들을 달라고 졸라 숙부로부터 일찍 인계받았다. 그리고 부산 서울로 빈번히 옮겨다니면서도 이사 때마다 직접 싸들고 가는 등 평생 소중히 보관해 왔다. 환갑 넘어서는 할아버지를 위한 세 가지 추모사업을 실천했다. 첫번째는 나의 마지막 공직인 대진대학교 총장 시절 8년간에 교수들 도움을 받아 1999년 할아버지 유고문집 「학고집(鶴皐集)」을 발간했다. 저자 이름은 가신지 60년이 넘었지만 정선교鄭璿敎란 할아버지 이름이고, 간행위원장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제자 성환덕(成煥德, 성균관 전의) 이다. 국역 출간되었다. 두번째는 자손들에게 타이르는 계자훈誡子訓이란 짧은 훈시의 원문과 이를 번역한 나의 시조 한 수를, 한 지리산 돌에 새겨, 할아버지 묘 옆에 세워서 자손들이 오가며 읽도록 설치한 일이다. 이 계자훈이 우리집 가훈이다. 

 

誡 子 訓 (자손들에게)

 

一日之計 在於寅 寅起端坐  말 삼가기 깊이 생각 분노경계 세 가지를 (하루의 계획은 인시(새벽 3시부터 5시)에 있나니, 인시에 일어나 단좌하여)

先念謹言 詳審戒忿怒 새벽 일찍 바로 앉아 명상으로 다짐하면(먼저 말을 삼가할 것을 염두에 두고, 두번째 깊이 생각할 것이요, 세번째 분노를 경계하면,)

三件事 日日無咎 하루가 무탈할지니 나날이 행할진저.(이 세가지로 하루하루가 무탈할 것이니라)

 

1927 鶴皐 鄭璿敎

2004 嗣孫 泰秀 근역

 

세번째는 할아버지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서당이 있었던 금호琴湖 호수 가에 세운 일이다. 우국시비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미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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