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9) 홀로 남은 우국시비

김현거사 2012. 7. 19. 21:16

 

<가족사 기행> (9) 홀로 남은 우국시비

 

                                                                                                                    정 태 수

 할아버지 3대 기념사업 중, 문집 출판과 할아버지 묘 앞에 세운 계자훈비 건립은, 내가 살던 서울에서의 일이라 간편한 편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사업인 시비 건립은, 고향 떠난지 오래되었고, 천리 먼 길 밖 일이라 좀 힘들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제자 한분이 월아산하에 계셔서 그 분 도움으로 숙원사업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세월 따라 서당 용호재龍湖齋는 터도 없이 솔밭이 되고 말았지만, 서당 소재지였던 용심동龍潯洞은 창녕성씨가 많이 사는 곳으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할아버지의 마지막 제자 한 분이 마침 계셨다. 금산면장과 진주향교의 전교典敎로 활동하시던 성환덕成煥德씨다. 그 분은 어릴 때 서당에서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웠다면서 할머니까지도 잘 기억하고 계신 분이었다. 

  그 분은 당시의 회고담도 들려주셨고, 할아버지 문집 출간위원장도 우국시비 건립위원장도 맡아주셨다. 서울로 이장한 조부 조모 내외분 비문도 짓고 서명해주기까지 해주셨다. 스승 가시고, 60여년에 모든 제자들은 가고 없는데, 딱 한 분 마지막 제자가 혼자 남아서, 이승의 두 가지 기념사업과 천장묘의 묘비와 음기陰記까지 지어 제자의 이름을 올려주시니 감사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제간의 아름답고 질긴 인연이 새삼스러웠다. 월계라는 내 자호自號 겸 필명도 그 어른의 심사를 받은 것이니, 삼가 엎드려 성 면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5대 장손(長孫)인 나는 금산을 떠나 서울로 간 지 50년 만에, 흩어져있던 내 소관의 고조 이후의 역대 산소도 모두 경기도로 옮겼다. 그러나 당시 우리집 까꼬실 7대 250년사와 달음동 150년사를 하직하고, 아득한 11대조 농포공 이전의 세거지 한양(서울)으로 다시 되돌아감에, 살던 옛 터에 영구히 비석 하나는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가계의 흔적으로 할아버지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뽑아, 정든 월아산이 내려다보고 할아버지 서당 터가 건너다보이는 금호(琴湖) 호반에 세워두고자 계획했다. 시비 건립 장소는 금호(琴湖) 호반의 물이 한곳으로 몰려 흘러내리는 ‘무넘기’ 옆 이었다. 땅 관리자인 진주시 수리조합에 신청하여 사용허가를 받고, 금산면장과 면의회의 건립결의와 승인을 받았다. 명승지의 풍경에 어울리는 지리산 자연석 강돌바위를 구입하여 친필 한시와 번역시를 새겨 세우고, 2004년 8월 28일에 고향 어른들과 유지 친지 100여분을 초청하여 모시고 제막식을 치렀다. 정든 진주 금산을 떠나면서 그 할아버지 우국시비 하나 그렇게라도 세워놓고 ‘훈장바위’라 이름 짓고 올라왔다. 그 돌비 하나가 ‘우리 가문 3대’의 유일한 흔적이다.

 

亡 國 歎

 

鶴皐 鄭璿敎

 

一國難擯萬國親 遠人風帆已多津

異籍乘機如捲席 吾王何事未終仁

 

智士無言歸獨善 隱倫堅節遠囂塵

海內蒼生啼索莫 權臣安處起靑烟

 

망국의 한탄 (권호 역)

 

학고 정선교

 

물리치기 어려워 만국과 화친하니

멀리서 온 돛단배 나루에 가득하다

기회 틈탄 다른 나라 멍석 말듯 하는데

우리임금 무슨 일로 끝내 현명 못했나

선비는 말 멈추고 혼자 선한 체 왜하며

절개군자 어찌하여 성가시다 멀리하나

백성들은 삭막하여 울부짖고 있는데

매국권신 좋은 집은 푸른 연기 뿜는구나

 

<비석 뒷면> 월아산 삼학사 (月牙山 三學士)

구한말에 월아산 아래 월아동과 용심동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우국의 선비 세 벗이 살았다. 한일합병을 당하자 북방재배하고 죄인이라 하여 갓을 버리고 패랭이를 쓰며 글로서 망국을 한탄하였다. 세인들은 월아산 삼학사라 칭송하였다.

학고(鶴皐) 정선교(鄭璿敎 1856~1931) 월암(月岩) 성환종(成煥鐘1860~1937) 아서(牙西) 성환균(成煥均 1866~1944 2004).

 

      건립위원장 문하생 성환덕

 

 

  되돌아보면, 농포공 후손은 서울서 까꼬실로 옮겼고, 할아버지는 까꼬실에서 월아산으로 옮겼고, 나는 월아산에서 북악산 아래로 옮겼다. 장남은 미국시민이 되었고, 차남은 서울시민이 되었다. 이렇게 부쩍 빨라진 우리 가계의 이동속도로 보아, 앞으로 손자대에서는 달님으로 화성(火星)으로 이사를 가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혹시 앞으로 그런 우주시대가 전개되면 조상의 뿌리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 5대 장손이라 그런지, 그런 생각이 들 때 마다,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에 지구촌 포천의 선대 묘역 겸 가족 공원에서 열리는 시사(時祀)에 후손들이 다 모였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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