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7) 촉석루에 오르면

김현거사 2012. 7. 26. 06:24

 

<가계사 기행> (7) 촉석루에 오르면

                                                                                                                           정 태 수

 

  진주에 가면 저절로 발걸음이 남강과 촉석루로 옮겨진다. 촉석공원 주차장에 내려 입구의 훤칠한 문루를 넘어서면 절로 신발을 벗고 촉석루 누각 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푸른 강과 바위, 바위 위의 성벽과 강 건너 푸른 대숲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나는 여늬 나그네와 다른 감회에 젖는다. 촉석루에는 나의 직계 선조님들의 흔적이 네군데나 있기 때문이다. 촉석루 누각의 기둥과 천정에는 진주를 다녀간 뛰어난 시인묵객의 현판 글씨들이 많이 부착되어 있다. 그 중 남쪽 벽에 내 11대조 농포공의 “촉석루”라는  한시漢詩의 액자가 있다. 핏줄이 당겨선지 그 앞에 서서 그 난해한 한시를 떠듬떠듬 읽어보곤 한다.

 

촉 석 루

                                 정문부

 

임진년 병화가 전국을 휩쓸어

느닷없이 입은 참화 이 성루가 제일 컸네

돌은 구를 수 없어 우뚝하게 솟았는데

강물은 무슨 마음으로 흐르고 있나

신명은 사람과 함께 퇴폐함을 복구하려 하고

무한한 공간은 땅과 함께 떠 있네

알겠구나, 막부의 경영하는 솜씨가

한 고을만 진압하지 않으려는 장한 뜻임을.

                

                                         이은상 역

 

 농포공은 일생 약 500수 정도의 한시를 남겼는데 농포집農圃集에 대부분이 실려 있다. 과거 합격 후, 요즘 같으면 중앙부서의 4~5급 정도의 문관 주무관이였는데, 임진왜란을 만나자 무에 뛰어들어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셨다. 그 후 요즘 직제로 문교부 차관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았고, 그 후는 국방차관 내무차관을 제수해도 싫다고 거절하고, 시장 군수직에 해당되는 창원부사 전주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마감한 분이다.

 

 농포공의 시를 읽은 후, 누각을 둘러보면 “촉석루 중수기"가 있다. 이 記는 농포공의 동생 정문익鄭文益의 증손, 정식(鄭栻, 1683~1746)이 쓴 것이다. 

 

 “이 누각에서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장사壯士의 충성과 의리 위해 목숨 바친 기생妓生의 절개를 칭송하고, 임진년의 왜환倭患으로 이 집이 기울고 벗겨져 옛 모습이 아니다. 갑진년(1724)에 절도사 이태망李台望이 보좌관과 더불어 이 누각을 새롭게 중수했다. 이태백李太白의 <봉황대> 시는 시인이 아무렇게나 한 말에 불과하고,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는 실 세상 바깥의 고상한 생각에 불과하다. 송나라 정승 범중엄范仲淹처럼 천하의 근심을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하면, 이 촉석루도 썩지 않고 나라도 튼튼해질 것이다” 

 

  정식鄭栻 선생은 영조시대 분으로 호는 명암明庵인데, 온 세상을 두루 주유周遊한 시인 묵객이다. 조실부모로 불우할 때, 8촌 형이며 학자인 정구鄭構에게 배우고, 패랭이 쓰고 명산대천에 유랑생활을 하면서 시서를 즐겼다. 만년에 지리산 구곡산 계곡을 무이계곡武夷溪谷이라 이름 짓고 소요자적하며, 집에는 제갈량과 주희의 초상을 봉안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유고집 5권으로 명암집明庵集이 있다. 필자의 7대 방조로 영남일대 유림의 칭송이 자자한 분이다. 이 중수기는 영조 때의 촉석루 중수를 기념한 글이다.

 

 

 

 

 

 

촉석루 중수기 (정 식)

 촉석루에서 돌계단을 내려와 남강으로 내려가면, 수백년 푸른 강물 속에 의암이 무게있게 앉아 있다. 이 바위의 서쪽 면에 전자체篆字體로 의암義巖이란 바위 이름이 명필로 새겨져있다. 이 글씨는 농포공의 둘째 아들 정대륭鄭大隆이 인조7년(1629)에 쓴 글씨를 바위에 서각한 것이다.(남쪽 면에도 義岩이란 각자가 있는데, 이는 후대에 와서 한몽삼韓夢參이 쓴 것으로 해서체이다) 승지공 정대륭은 나에게는 10대 방조이다.

 

 의암이란 무엇인가. 논개論介의 절개가 시퍼렇게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바위를 말한다. 잘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진주성은 두 번의 큰 싸움이 있었다. 첫 번째는, 선조 25년(1592)으로 왜군이 군량미를 위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군하려고 진주성을 공격한 일로, 나가오카(長岡)의 왜군 3만을 맞이하여 정규군인 김시민金時敏장군의 3,800 군사가 싸워 대승한 싸움이다. 두 번째는 이듬해(1593)에 왜군이 지난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특명으로 들이닥친 10만 왜병과의 싸움이다. 당시 우리는 경상우도 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합동군 3,500명과 진주시민 6만명이 힘을 합쳐 싸웠으나, 비참하게 참패하고 군졸과 시민은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풍신수길의 복수의 칼에 온 진주 관민이 다 희생된 것이다. 당시 왜군이 승전보를 울리고 자축연을 벌일 때, 이 연회에서 논개가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에 함께 투신했던 바위가 바로 의암이다. 그 바위에 의암義巖이라 쓴 글씨가 농포공의 둘째 아들 정대륭鄭大隆의 글씨인 것이다. 논개의 이름은 1620년 무렵에 나온 유인몽柳寅夢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처음 채록되어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공의 글씨를 바위에 서각한 것은  인조7년(1629)이니, 9년 뒤의 일이다.

 

 의암에서 옆으로 눈을 돌리면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란 간판이 붙어있는 작고 참한 비각 하나가 있다. 그 비각 속에 새겨진 옛 시는, 참으로 고풍스러운 기량이 돋보이는 명시이다.

 

   義 巖 (의 암)

 

獨峭其巖 特立其女 독초기암 특립기녀 (홀로 가파른 그 바위, 우뚝 서 있는 여인)

女非斯巖 焉得死所 여비사암 언득사소 (이 바위 아니면 그 여인, 어디서 죽을 곳을 얻으랴)

巖非詐女 烏得義聲 암비사녀 오득의성 (이 여인 아니면 그 바위, 어디서 의롭단 말 들으리)

一江高巖 萬古芳貞 일강고암 만고방정 (한 줄기 강의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우리라.)

 

  이 비는 경남 유형문화재 353호인 의암사적비義巖史跡碑다. 이 사적비 비문을 쓴 분은 앞서 '촉석루 중수기'를 쓴 명암 정식鄭栻이다. 나는 정식鄭栻 선생의 이 義 巖이란 시를 외고있다. 한번은 어떤 장소에서 이 시를 읊었더니, 좌중이 모두 놀라며, 시가 득의의 경지에 오른 명시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여하간 진주에 가면 촉석루에 아니 갈 수 없다. 촉석루에 가면, 네 가지나 되는 내 조상님의 흔적들을 보면서 온 마음이 간잔지런해지곤 한다. 진주의 자랑인 촉석루에서 많은 조상님의 흔적을 볼 수 있어서 가슴 뿌듯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자신의 몸가짐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촉석루는 그 문화재와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 그 풍광의 의미 이외에도, 나에겐 가문의 흔적이 소롯이 담긴 의미 깊은 곳이다. 촉석루는 누각도, 비석도, 의암도, 강물도, 나에겐 그냥 무의미한 풍경이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