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사 기행> (10) 농포공 영정 제작의 체험
정 태 수
의정부 송산의 농포공 산소 앞에 충덕사忠德祠를 세우자, 사당에 안치할 영정 제작에 착수하였다. 요새 같이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자료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400년 전 농포공 할아버지의 얼굴을 복원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복잡한 이 과정은 훗날 다른 사람을 위한 참고자료로 남기어야 할 것이라 사료된다.
그동안 두번 제작한 영정이 있었으나 둘 다 적절치 못했다. 첫번째 진주 부조 묘에 걸린 영정은 당시 제작을 주관했던 분의 자기 개인 얼굴 사진과 너무 비슷하게 만들어 부정적 목소리가 높았다. 두번째는 정부 주관 행사에 내걸었던 급조품인데, 이것은 어느 낯선 옛날 무장 같기만 하고, 혈연적 연대감이 전무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침 내가 해주정씨 송산종중 회장 일을 맡은 때라, 이사회의 일임을 받아, 한번 농포공의 이미지를 충실히 재현하여, 자타가 공인하고, 국가도 인정할 수 있는 완벽한 영정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먼저 이 일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한서대학교 얼굴연구소장 조용진趙龍鎭 교수를 만났다. 그 분은 내가 서울교대 총장 당시 그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동료였다. 우리 두 사람은 역사적 인류학적 유전학적 이론에다, 과학적 분석을 접목시켜 어디 내놓아도 괜찮을 문화관광부 지정 표준 영정을 제작하기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조교수와 내가 협의하여 정한 사항을 다음과 같았다.
인류는 유전인자를 대대로 전해가며 신체적 정신적 혈통을 이어간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자녀 한 사람은 부와 모의 유전자를 반반씩 받아 형성된다. 그 중의 두 가지 인자는 각각 동성에게만 물려준다. 미트콘트리아(Mt)와 Y염색체이다. Mt는 어머니로부터 딸로 이어져 모전여전하고,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만 이어져 부전자전하는 셈이다. 나는 졸저 <어디서 내가 왔나>라는 과학시조집에서 현 인류의 발생과 그 이동경로를 과학적으로 밝힌 적 있다. 원래 이 문제에 대한 고고학적 해답은 각양각색이다. 원래는 인류는 각 지역단위로 발생하여 각기 이동하여 지금의 흑백과 민족 분포가 이뤄졌다는 설이 우세하였다. 그러다가 유전공학의 발달로 수정되었다. 인류의 아프리카 발생설로 단일화 되었는데, 그 이론의 씨앗이 미트콘트리아 이동경로와 Y염색체 이동경로 추적이었다. 이동지도가 완성됨으로서 현재의 인종분포가 입증된 것이다.
우리나라 가계家系는 모계사회가 아니라 부계중심이다. Y염색체의 유전을 가계의 줄기로 삼아 그 신체적 특징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전해지는 얼굴모습은 Y염색체를 통해 줄줄이 내려온다고 생각된다. 우리 가계는 농포공의 Y염색체가 흐르고 전해지고 있다. 유전되어 내려온 Y염색체 중 어느 것이 얼굴모습이나 귀 눈 입 코의 유전을 담당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아직 연구된 바 없으나, 용모의 특징 일부가 Y염색체에 들어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농포공 후손들이 갖고 있는 용모상의 특징을 소급해 올라가면 농포공의 Y염색체의 특징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후손들의 용모의 특징을 집계하고 추출하면 선조인 농포공의 얼굴 모습의 특징을 소급하여 복원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400년 전에는 농포공 한 분이지만 1625년에 아들 둘이 낙남해 진주에 내려오고 지금은 여러 지방에 퍼져 천 여 호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 모두를 모을 수는 없고 하여, 종회가 열리는 2004. 2. 22일 서울 서초동 소재 해주정씨 대종친회 사무실에 후손 대표들을 초대해 놓고, 조용진 소장과 그 연구소 직원들이 와서 두상과 얼굴 특징을 측정 채록 하였다. 그 날 71명을 초청했으나 59명이 참여해 측정을 완료하였다.
<참여자 59명 명단>
측정 항목은 두폭(두상의 폭), 두장(두상의 앞뒤 길이), 두이고경(귓구멍에서 정수리까지의 높이), 등고선 사진(얼굴의 좌우치 촬영), 고경(얼굴의 세로 높이), 폭경(얼굴의 가로 폭), 방사경(얼굴의 도드라짐 측정) 등 70군데나 되었다.
얼굴 측정의 결과는 네 가지로 요약되었다. 첫째는 고경의 특징이다. 고경이란 얼굴의 가로 세로 높이의 치수를 말하는데, 22개 항목이 모두 길었다. 농포공 후손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얼굴이 길고 특히 중안中顔과 하안下顔의 턱이 긴 특징이 있었다. 긴 얼굴에 큰 턱은 한반도의 내륙과 산지에 많고, 위도 상으로는 북부의 요소가 많아 북방계 가계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폭경이다. 18개 항목을 분석해본 바, 체격은 크고 광대뼈는 크지 않기 때문에 얼굴 길이에 비하여 폭이 좁고, 두상의 폭은 얼굴에 비하여 넓은 편이었다. 한국인 중 눈이 작은 편에 속하며, 이 또한 북방계와 상관이 높다 하겠다. 셋째는 방사경으로, 귓구멍을 중심으로 얼굴 윤곽의 굴곡을 측정하기 위한 19개 항목이다. 중안과 하안의 방사경이 크고 턱이 큰 편이어서 역시 북방계 형이었다. 결론은 이랬다. 공통점은 얼굴이 길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부분이 아니라, 상안 중안 하안 모두 긴 얼굴이었다. 또한 좁고 높은 이마가 공통점이었고, 입은 큰 편이며 입술은 얇았다. 귓불은 길에 늘어진 경우가 거의 없는 중간형이며, 치아는 큰 편이었다. 농포공과 그 후손은 우리 민족의 7할인 북방계라 할 수 있었다.
이런 후손들의 얼굴 집계 분석 결과로 나온 농포공 용모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얼굴이 길고, 이마가 좌우로 좁으며, 눈 사이는 넓지 않고, 콧날은 높았다. 중안이 길고 볼록하여 적극적인 인상을 주며, 입은 크나 인중은 뚜렷하지 않고 넓은 편이다. 특히 턱이 크고 길어 보이며, 귓불은 크지 않았다. 후두부는 돌출하지 않고, 머리 정상은 돌출형이다. 눈썹은 진하지 않고, 수염은 많지 않은 편이다. 모발은 굵지 않고 직모형으로 추정되었다. 하안부의 피부가 약간 두텁고, 이마는 우측이 더 도드라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것이 조용진 박사가 결론지은 농포공의 영정 요소이다. 이같은 농포공의 두상 복원 데이터에 의해, 석고상이 만들어졌다. 우리 종중 사람들은 석고상을 만든 한서대 얼굴연구소(서울 명동소재)에 2004년 5월 4일,방문하여 농포공이 60세에 돌아가셨으니 58세 기준으로 제작해주고, 흉상으로 제작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영정 제작자는 윤여환(尹汝煥, 충남대)교수였다. 그 분은 논개 초상, 유관순 초상, 김만덕 초상, 박팽년 초상, 조헌 초상 등을 제작한 분이다.
윤교수의 영정 제작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얼굴 고증은 조용진 교수의 연구결과와 석고상에 따른다. 농포공은 키가 크고 체격도 큰 편이어서 176Cm로 하고, 얼굴 길이에 있어 중안과 하안 비율은 한국인 평균의 1:1.32 보다 약간 긴 1:1.4로 한다. 중안이 약간 불룩하고 하안의 피부가 두텁고 양미간이 약간 좁고 코끝과 귓불은 크지 않게 그린다. 그 밖에 학자적인 인상과 무인의 품격을 동시에 갖추도록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복식 고증 이었다. 경국대전 기준으로 임란 후 추증된 종1품에 맞춘 모습으로 그린다. 사모에 단령을 착용하고, 공작에 구름무늬와 목단을 그려 넣고, 대는 서대를 착용한다. 흉배의 크기는 가슴을 덮을 정도로 크게 그리고, 사모는 위가 평평하게, 단령은 다소 넓고, 깃은 많이 패이지 않게 하고, 의자와 신발도 임진왜란 당시의 다른 문관 영정을 참조하여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작된 농포공 영정은 여러 단계의 검토와 전문가의 심사를 거쳤다. 먼저 의정부시를 경유하여(2004. 6. 28, 제출), 그 다음에 문화관광부 동상․영정 심의위원회 1차 심사에 들어갔다. 문광부에 접수된 영정초안은 그 해 8월 9일에 심의위원 10명(안희준 류희경 박성실 조용진 추원교 이강철 이기동 최만련 이만열 이성원)의 심사를 받았다. 나도 송산종중 사무국장과 의정부시의 담당자(박현숙)와 함께 방청하였다. 회의 결과, 너무 부드럽고 미남으로 그려졌으니 강건한 표정과 날카로움이 가미되면 좋겠다는 것, 흉배는 공작으로 하고, 복식이 맞지 않아 자료를 드릴 테니 참고하여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이 요청에 의해 세 사람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서 다시 상세히 심의 하였다. 소위원회는 영정 제작자인 윤 교수의 설명을 듣고 많은 주문을 해왔다. 즉, 무릎 사모 높이 낮출 것, 모란 무늬는 실물답게, 서대부분에 물소 뿔은 실감나게, 소매 안에 양 손이 보이게, 사모 양각에 무늬가 이중으로 겹치게, 옷 주름 정리, 입체감 있는 의복으로, 키를 좀 더 늘릴 것 등이다. 끝으로 윤 교수에게 옛 것을 살리면서도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기법으로 완성해 제출해달라는 당부하였다. 마지막 3차 심사를 앞두고, 나와 후손 대표들이 윤 교수의 화실이 있는 대전을 방문하여, 우리들 눈에는 대체로 만족하다는 결론을 내고 격려하고 돌아왔다.
그런 후에 정부의 마지막 심사가 있었다. 이듬해 2005년 4월 26일이었다. 거기에서는 윤 교수 제작의 농포공 영정이 만정일치로 무수정 통과되었다. 영정지정번호 제 77호가 부여되었다. 이 날 회의에는 나와 정윤근 사무국장이 참석했다.
영정은 농포공 묘 앞 사당 충덕사의 벽면에 닫집을 짓고 모시기로 결정 되었다. 원래 영정은 영당影堂을 지어 모시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닫집에 모시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이 닫집 제작의 예비지식을 얻기 위하여 우리 종중 간부들이 춘천에 있는 풍양 조씨 사당을 미리 가보기도 했다.(2004.9.7) 그 제작 경위, 제작비, 형태, 제작 기간, 자재의 재질들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의정부에 있는 현대불단조성소(대표 이수녕)에 계약 제작하였다. 닫집이 완성되자, 대전에서 농포공 영정을 모셔오고, 서울 명동에서 농포공 석고상도 모셔왔다. 그리고 2005년 음력 9월 15일, 하유집 성균관 부관장의 주재로 유림의 봉안행사와 고유제가 모셔졌다. 그런 후 영정은 제자리에 모셔졌다. 그 어른 돌아가신지 380년 만이었다. 국가 인증 77호 영정을 조상 묘 앞 사당에 모시어 후손으로서의 노릇 일부를 다한 것 같은 흐뭇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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