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9) 왜 민립비인가

김현거사 2012. 7. 31. 19:16

<가계사 기행> (9) 100년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

정 태 수

 

 2005. 10. 20일 오후 4시, 북관대첩비가 2005. 10. 20일 오후 4시 인천국제공항에 내렸다. 흰 천으로 만든 사각의 목곽에는 “100년 만의 귀환, 북관대첩비”라 쓰여 있었다. 태극기와 3군 군기, 국군 의장대와 정부요인까지 도열하고 있어 마치 거룩한 유해의 귀환의식 같았다. 이 날 이후 이 비는 그 이튿날의 환국고유제(10. 21. 국립중앙박물관)를 시작으로 남한 내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고 나서 다음 해(2006) 3월 1일에 북한 개성 성균관에 환송함으로서 남쪽 임무를 마치고, 원 위치인 길주(지금은 김책시) 임명臨溟에 복원 건립이 완료(2006. 3. 23) 되었다.

 아시다시피 이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임진왜란(1592) 때 함경도에서 충의공 정문부 의병장이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의 2만 대군을 물리치고 함경도를 수복한 전승기념비다. 그러나 이 비석의 운명은 험난했다. 그 내력을 알아본다.

이 비는 임란이 지난 100여년 후인 숙종 35년(1709)에사 북평사 최창대崔昌大가 비문을 쓰고, 그 지방 백성들이 세웠다. 왜 그리 늦었고, 또 왜 민립비民立碑인가? 그리고 왜 일본군이 러․일 전쟁 때(1905) 유독 이 비의 비신만 떼어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숨겨두듯이 100년을 처박아 두어, 우리 측의 거센 반환운동이 없었으면 영영 잊혀지고 묻혀질 뻔한 고초를 겪었을까?

 

?( 왜 가지고 갔을까? 꼭 훔칠 이유가 있었는가? 끝으로 이 비의 반환문제를 둘러싸고 주는 측과 받는 측 이외에 중간다리 측이 있다. 왜 대한민국이 남의 나라 일에 거간꾼 노릇을 했는가? 그리고 3국이 줄다리기 속에 무슨 힘이 작동하였을까?)

 

 이 몇 가지 매듭을 풀어보면 단순하지 않은 북관대첩비의 기구한 팔자가 들어난다.

우선, 북관대첩비가 임란 100여 년 후에 세워지고 또 함경도, 특히 길주지역 백성들이 세우게 된 사정부터 알아보자. 북관대첩비는 의병활동 직후에 세운 것이 아니라, 또한 왕이나 정부에서 힘써 준 것이 아니라, 임란을 117년이나 지나고 임금도 6명이나 바뀐 뒤에 함경도민이 세운 비다. 제대로 된 왕조였다면 이런 길고 긴 불임기간은 없었을 것이다. 출생부터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셈이다. 금년(2012)은 임진 7갑주(7甲周) 즉, 임란 이후 420년이 되는 해이니, 대첩비의 나이는 300살인 셈이고, 그 중에도 원위치에 마음 놓고 서 있던 기간은 200년 밖에 안 된다. ?(서글프지 않은가.)

함경도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윤관尹瓘의 9성 설치와 김종서金宗瑞의 6진 개척 등을 통하여 넓혀진 영토로, 역사적으로 변방시 당하고 본토와는 괴리감이 있었다. 간혹 중앙정부의 위무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정도가 미미한데다가, 파견된 관료의 학정으로 민심이 만성적으로 이반되어 있었다. 그래서 임란에 적장 가등청정이 침입해오자, 설원의 기회라 싶어 왜적에 아부하고 왕자와 관리를 잡아 왜군에게 넘기고, 왜군이 주는 벼슬을 받는 등 부역附逆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돌출 사건이다. 이는 북평사 농포공과 유생 교생校生 등 사제 간의 정과 의리에서 우러나온 결과였지, 근왕정신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임난 중 7월에 선조의 신임이 두터운 윤탁연尹卓然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고, 관군이 왜군에게 완패한 후, 9월경에 정문부 의병군이 활동하자, 관권과 의병의 대립이 일기 시작하였다. 윤 감사는 정 의병장을 자기의 부하인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보고 의병을 지휘 감독하려 하고, 정 의병장은 왜군에 연패하는 관군 대신, 민간 의병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려고 감사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런 속에 왜군에 비해 소수이고 열세인 의병은, 복병과 기습작전으로 7전 전승의 전과를 내고 그 공적을 쌓아 갔고, 윤감사는 의병의 공을 자기의 공으로 왕에게 보고 할 수도 없어 시기질투가 날로 높아갔다. 급기야 양자 대립관계로 발전된 것이다. 전쟁 중, 윤탁연 감사는 의병장 정문부를 자의로 경질하고 한번은 부사 정현룡鄭見龍에게 또 한달 뒤에는 부사 오응태吳應台로 하여금 의병장을 맡게 했다가 또 한달 뒤에는 부득이 농포공을 의병장으로 복귀시킨 일도 있었다.

이같은 백성과 의병과 감사 3자의 알력관계 중에, 선조는 중신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윤 감사의 보고에 의존하여 편향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중에 특이한 분이 부장副將 정현룡이다. 그는 종성부사 당시에 임진년을 맞았다. 전세가 불리하자 가등청정에게 항복서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정현룡이 가등에게 보낸 항복 시

撫我則后 虐我則讐 나를 위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何使非臣 何事非君 누구를 부린들 신하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 아니랴

그러나 후에 적진에서 도망 나와 정문부 의병에 합류하여 부장副長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전후에는 북병사北兵使가 되어 북쪽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죽어 애마가 그의 머리를 달고 왔다 한다. 순국한 뒤에 정문부와 함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이상은 선조실록과 수정선조실록의 기사내용들이다.

 당시 선조의 자세는 어떠했던가. 결론부터 말하면 대신들이 정문부 선생의 공을 인정해도 유독 선조는 다른 견해로 일관했다. 선조실록과 수정선조실록을 보면, 선조 28년 6월 15일에 왕이 후임 함경감사 홍여순洪汝淳을 인견할 때, “경성 사람들이 북관대첩의 큰 공로를 세웠을 때 감사 윤탁연이 정문부가 보고한 내용을 고치거나 덮어 버리고 장계를 올림으로서 수년이 되도록 조그마한 상조차 없었고 상이 고르지 않는 이유가 대게 여기에 연유합니다”라고 고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는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라”하였다. 또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선조 26년 2월 27일, 정문부의 공이 매우 크다고 보고하고 조정 대신들이 여러 차례 북관대첩을 “정문부의 공이라”고 해도 ,선조는 “아니다”고 하면서 완강하게 이를 부정 하였다. 그리고 선조 28년 2월 20일, 우의정 정탁鄭琢이 “정문부는 장수의 재목이며 맨손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이 같은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없다”고 고하자, 선조는 “내가 듣기에는 그렇지 않다. 북도의 일은 바로 정현룡 등의 공이요, 정문부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룬 것이다” 하였다. 한편 이항복李恒福은 “(정문부는) 대개 위인이 당돌하고 휘하의 제장들이 다 날쌔고 용맹스럽다 합니다” 하였고, 동지중추부사 유영경柳永慶은 “정문부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루었으니 장수의 재질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였고, 선조 28년 6월 15일, 함경도 감사 홍여순은 임진란 때 여진족과 반호潘胡 및 왜군의 3자 관계를 설명하고, “관북대첩은 정문부와 경성 사람들의 공적”임을 분명히 했으며, 윤탁연이 정문부의 공을 인정치 않고 덮어둔 것이 이 지역에의 상이 고르지 않게 된 계기이며, 그것이 이 지역 인심을 나쁘게 하고 반호가 조선에 반항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또 선조25년 회령부사 인선 논의 끝에 선조가 “정문부가 어떠한가, 어떤 자는 북도에서 이긴 것은 남 때문에 이룬 것이고 본디 그의 지용이 아니라고 하니 다시 헤아려 품신하라” 하였다. 선조 30년 함경도 순무어사 유인몽柳寅夢이 “길주목사 정문부는 정사에 밝고 백성을 은혜롭게 다스려 부역을 공평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포상을 건의했다. 선조의 이와 같은 오해와 편견은 선조 26년 2월 10일에 밀서로 제출한 “윤탁연 감사의 비밀문서보고”가 있었는데, 이 보고서를 읽은 후, 선조가 북관대첩의 실상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견해를 갖게 되었음이 틀림없다고 한 연구는 지적하고 있다.

 북관대첩에 대한 당시 감사(윤탁연)의 이 같은 행위, 그리고 선조의 태도, 이에 대응하는 함경도 민심, 반민의 동향, 안에 있는 반호와 밖에 있는 오랑캐의 반응 등이 얽혀 북관대첩에 대한 당대의 표창은 혼미한 것이었다. 농포공에게는 국세필鞠世弼의 반란 평정의 공 하나만 인정하여 정란 1등 공신 반열에 올리고 함경도의 한 지방 군수를 주고, 의병단의 부장 별장 척후장 매복장 등을 지낸 사람들은 표창도 없거나 미미하였다. 그 후,  감사 윤탁연은 임란 3년째(1594)에 죽었으나, 북관의병에 대한 별다른 포상도 없이 100년 세월이 흘렀다. 40여년이 지나자  그동안 땅에 매몰되었던 의병의 기록을 캐고 현창사업이 일기 시작하였다. 100년이 지나서야 백성들이 북관대첩비를 세우게 된다. 못난 감사와 어리석은 군주가 가자, 늦게나마 빛을 발한 것이다.

다음으로, 러․일 전쟁(1905) 중에 일본군이 왜 북관대첩비를 강탈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는가를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 땐 대한제국시대였는데 제대로 된 나라 같았으면 외국군대가 함부로 상륙도 못하지만, 더구나 남의 나라 비를 멋대로 강탈해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왜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 1905년 3월 31일, 일본군 육군소장 이께다 마사스케(池田正介)가 육군대신 데라우찌(寺內正毅)에게 보낸 문서를 보면, “이 비에 가등청정의 조선 정벌 때 이 지역 주민들의 의병을 모집하여 가등의 군대를 격퇴했다는 내용이 명기되어 있는데, 이 비의 존재가 일․한 양국 친선에 방해되거나, 일본군 병참선을 방해할 우려가 있어, 비를 건립한 자손들의 상의를 거쳐 본국으로 보내니, 역사상 참고자료로 쓰이면 좋겠다'며, '병참 수송선에 실어 보낸다”는 요지가 적혀있다.?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강탈사실을 숨기고 있다.) 그리하여 이 비는 그들의 전쟁박물관인 유취관遊就館에 두었다가 나중에 야스쿠니 신사로 옮긴 것이다.

원래 야스쿠니의 비 인도 직전 야스쿠니의 비 원 위치에 세워진 비(김책시)

 일본군은 수많은 비 중에 유독 왜 북관대첩비만을 본국으로 뜯어 옮긴 것일까?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을 그들은「조선 정벌」이라 하며 불패의 승리전으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임진년의 왜장 중에 가등청정은 일본 제일의 무장으로 누구에게도 져본 일이 없는 불패의 영웅 이다. 당시 한양을 점령한 왜장들 중 두 주축인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제비를 뽑아 평안도와 함경도 두 행로를 분담하여, 청정의 함경도행이 정해졌다. 그러한 일본 제일 사무라이가 조선의 선비가 이끄는 농민 혼성 의병군에게 7전 전패했다는 기록은 믿을 수도 없거니와 사실이라면 수치의 극치였다. 그래서 러일전을 구실로 조선 땅을 재침한 일본군은, 이 비석을 지금 사람이나 후세에라도 보여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훔쳐간 것이다. 그러면서 건립자의 후손과 협의 반출했다느니, 이 비의 내용을 역사가들의 연구자료로 제공하는 뜻도 있다느니 사실을 미화했지만, 사실은 이 비의 존재가 왜군의 명예손상이 된다고 보고, 이를 본국으로 옮겨놓고, 숨기고 처박아 둔 것이다. 이미 이야기 되었지만, 1930년대쯤에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이 비 옆에 나무비를 세워 “의병 대첩”이란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설명을 달아놓기도 하였다.

 이렇게 북관대첩비는 만들어진 시작부터 타국 볼모생활까지 모두 기구한 운명이었다. 의병 대첩 후 임금의 편견으로 100년 늦게 세워졌고, 그 후 침략자의 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100년을 살다가 2005년에 겨우 조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절차도 까다로웠다. 일본은 남북한의 관계가 대치된 것을 계산하여, 이 비석 반환조건에 북한과의 합의를 요구하였다. 남한 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978 정부 문서를 통한 후손들의 반환요청을  30년간이나 묵살하였다. 그러다가 노무현 친북정부가 출범하여,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행사를 핑계 삼아 북쪽의 동의를 구한 것이 결정적 전환요인이 되었다. 남북 불교단체의 합의서(2005. 3. 28)가 체결되고,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와 야스쿠니 신사 궁사宮司, 그리고 일본 외무성 정무관 간의 북관대첩비 인도 합의서(2005. 10. 12)가 교환되어, 비석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2005년 10월 20일 이다. 그리고 여러 국내 행사를 거친 후, 해를 넘겨 2006. 3. 1일 개성 인도인수행사를 끝내고, 2006. 3. 23 원 위치 복원 건립을 마치게 된 것이다.

 

?(북관대첩비는 일본이 주고 북한이 받으면 끝날 것을 왜 그 중간에 한국이 끼여들어 30년 간이나 힘들여 중개하게 되었을까. 그 답 뒤에는 충의공 농포선생의 후손의 반환 발의가 있고 민족정기가 가세하고 친북정부의 정책이 있다고 평가해도 될까. 어떻든 잘된 일이다. )?

 

 북관대첩비는 비의 일생이 비의 주인공 충의공 정문부 선생의 궤적과 매우 흡사하다. 28세의 선비가 갑자기 의병장이 되어 왜국 제일의 무장과 싸워 7전7승으로 실지를 회복했지만, 공은 가로채이고, 말년에는 간사한 신하 못난 임금에 의하여 억울한 물고物故까지 당하셨다. 그 후 오랜 기간에 걸쳐 명예를 회복하셨지만, 비석도 출생부터 해외 볼모까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생과 사, 두 편 다 기구한 쌍둥이 드라마 이다.  앞으로 이 비의 연구와 선양만이 과제로 남았다.

 

<가계사 기행> (9) 북관대첩비의 기구한 팔자

정 태 수

   2005. 10. 20일 오후 4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왔다. 흰 천으로 둘러 싼 사각의 목곽에는 “100년 만의 귀환, 북관대첩비”라 쓰여 있었다. 태극기와 3군 군기, 국군 의장대와 정부요인까지 나와 도열하여 비석의 귀환을 지켜보았다. 마치 거룩한 유해의 귀환의식 같았다. 친북 정권이던 노무현 정부는 사상 최초로 이북과 합의하여 일본에서 문화재를 반환한 일을 큰 업적으로 생각하는듯 했다. 이 비석은 이 날 이후 여러 행사를 치루고 이듬 해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튿날인 10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환국고유제를 치르고, 많은 귀환 행사를 치룬 후, 포천에 있는 농포공의 묘소에서 하루 밤을 보낸 후, 다음 해(2006) 3월 1일에 북한 개성 성균관으로 환송되었다. 그 후 원 위치인 길주(지금은 김책시) 임횡臨橫에 복원 건립(2006. 3. 23) 되었다. 북한은 개성까지는 남한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나도 초청자 명단에 들어 있었으나, 비석의 원위치를 포천의 농포공 묘소로 주장한 나는 가지 않았다.

 

  여기서 북관대첩비의 '기구한 팔자'에 관하여 한번 알아보자. 북관대첩비의 본명은 “조선국 함경도 임진의병대첩비”이다. 의병활동이 있던 해(1592) 당시 세운 것이 아니라, 107년이나 지난 1707년(숙종34년)에 함경도민이 세운 민립民立의 비다. (?임진 7갑년 즉, 임란 이후 420년이 되는 해인데 대첩비의 나이는 300살인 셈이다?). 제자리에 서 있던 기간은 195년. 그 후 1905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강탈하여 히로시마항을 경유 야스쿠니 신사( 神社)에 꼭 100년을 버려지고 가둬지고 있다가, 2005년 4월 한국에 왔다. 그리고 2006년 3월에 본디 자리로 돌아가 안치되었다. 이 비는 임진 후 100년 뒤에 만들어져, 길주에 200년 서 있다가, 일본으로 잡혀가 100년을 갇혔다가, 한국 경유 원 위치로 돌아간, 험난한 300년 역사를 지녔다.

 

 대첩비란 전쟁에 크게 이겼다는 것을 축하 하고 이를 길이 기억하기 위해 돌에 새긴 글이다. 그런데 왜 100년 후에 이 비석을 세웠을까. 거기에는 임란 시의 농포공의 공적을 놓고, 임금과 조정과 민간, 3주체 3자의 인식차이와 충돌이 있었다. 원래 선조는 수군의 이순신과 육지의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를 라이벌 의식으로 견제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거의 정설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선조는 자신은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서 백성들의 불신이 가득하였다. 그에 반해, 이순신과 곽재우는 바다와 육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백성들의 신망이 가득하였다. 그 틈에 상대적인 컴플렉스가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순신과 곽재우, 농포공의 공을 깍아내리려 한 여러가지 흔적이 보인다.

 원래 함경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윤관과 김종서에 의하여 개척된 땅이다.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점령지 회유정책을 써왔으나, 관료들은 언제나 민중을 경계 감시하였고, 대민 훈육이 혹독하여 민심은 저항적이었다. 동화되고 섞이면서도 민심은 차별대우와 등용의 길이 막힌데 대한 섭섭함이 그치지 않았다. 더군다나  왜가 이덕형을 왕을 삼고 김성일을 정승을 삼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돈 후에는 더욱 이반되었다. 그래서 왜적이 북상하자, 왕은 서쪽인 평안도로, 두 왕자는 동쪽 함경도로 나눠 피란가고 사대부들도 동서로 나뉘어 피신한 것이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간 격이었다. 함경도민들은 기회가 왔다 싶어 왜군에 협조하고 관리와 왕자, 그리고 피난 온 관원을 죽이거나 잡아서 왜군에 넘겼다. 예백禮伯 형백刑伯 같은 왜의 관직을 받고 부역附逆하는 분위기였다. 관군은 연패하여 흩어지고 피신에 바빴다. 여기서 의병이 일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에 정문부 선생의 의병활동이 전과를 올려나가고, 마침 명나라 이여송의 10만 응원군이 입국하고 이어 평양선이 무너지고 전세가 회복되어 의병의 수가 늘어나자, 견제가 온 것이다. 처음 농포공은 사제 간이거나 유생儒生 이었던 교생校生 사람들 곧 이붕수 최배천 지달원 등이 공을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으나, 함경감사 윤탁연은 정문부 의병장을 자기 부하 북평사로 인식하고 간섭과 복종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공은 그 명에 순종하지 않고 독자적 활동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윤감사는 한번은 부사 정현룡에게, 또 한 번은 부사 오응태로 하여금 의병장을 맡게 하고, 정문부 선생은 오랑캐 선두에 나서게 한 일도 있었다. 그러다 의병들의 요구로 다시 농포공을 의병장으로 복귀시킨 일도 있었다. 한 연구에서는 일본 기록을 인용하여 번호 즉, 오랑캐를 의병으로 다수 썼다고 하나, 이를 입증하는 우리 측 기록은 전혀 없다.

 

撫我則后 虐我則讐 나를 위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何使非臣 何事非君 누구를 부린들 신하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 아니랴

 

  당시 임금인 선조의 자세는 어떠했던가. 결론부터 말하면 대신들이 정문부 선생의 공을 인정해도 유독 선조는 다른 견해로 일관했다. 선조 26년 2월 10일에 “윤탁연의 비밀문서 보고”가 있었는데, 윤탁연은 농포공의 독자적 의병활동을 견제했던 함경감사였다. 왕은 이 보고서를 읽은 후 북관대첩에 대하여 왜곡된 견해를 갖게 되었음이 확실하다. 선조 28년 6월 15일에 왕이 후임 함경감사 홍여순을 인견할 때, “경성 사람들이 북관대첩의 큰 공로를 세웠을 때, 감사 윤탁연이 정문부가 보고한 내용을 고치거나 덮어서 장계를 올림으로서 수년이 되도록 조그마한 상조차 없었고 상이 고르지 않는 이유로, 그것이 이 지역 인심을 나쁘게 하고, 번호가 조선에 반항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고 고하자, 임금은 “이 뒤로는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라”하였다. 전임 윤연탁을 옹호한 것이다. 좌의정 윤두수가 선조 26년 2월 27일, '정문부의 공이 매우 크다'고 보고하고, 조정 대신들이 여러 차례 북관대첩을 “정문부의 공이라”고 해도, 선조는 “아니다”로 완강하게 부정 하였다. 선조 28년 2월 20일, 우의정 정탁이 “정문부는 장수의 재목이며 맨손으로 큰 공을 세웠는데, 이 같은 사람은 쉽게 얻을 수 없다”고 고하자, 선조는 “내가 듣기에는 그렇지 않다. 북도의 일은 바로 정현룡 등의 공이요, 정문부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룬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은 “대개 위인이 당돌하고 휘하의 제장들이 다 날쌔고 용맹스럽다 합니다” 하였고, 동지중추부사 유영경은 반대로 “정문부는 남의 힘으로 일을 이루었으니 장수의 재질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선조25년 회령부사 인선 논의 끝에 선조가 “정문부가 어떠한가, 어떤 자는 북도에서 이긴 것은 남 때문에 이룬 것이고, 본디 그의 지용이 아니라고 하니, 다시 헤아려 품신하라” 하였다. 선조 30년 함경도 순무어사 유인몽이 '길주목사 정문부는 정사에 밝고 백성을 은혜롭게 다스려 부역을 공평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포상을 건의했다.

  선조의 이런 태도, 그리고 당시 감사 윤탁연의 질시, 그리고 농포공을 지지하는 함경도 민심, 이 3주체 3자의 의견은 완전 상반되었다. 당시 함경도에 들어와 사는 번호와 밖에 있는 오랑캐의 반응 등도 복잡하였다. 그래서 당대에 이 북관대첩에 대한 건립은 미뤄진 것이다. 겨우 농포공에 대한 국세필의 반란 평정의 공만 인정하여 정란 1등 공신 반열에 오르게 하여, 함경도의 한 지방 군수가 주어지고, 의병단의 부장 별장을 지낸 사람은 표창도 없거나 미미하였다.

 그러나 노자 도덕경 73장의 말이 옳다. '하늘이 친 그물은 눈이 성기지만, 그래도 빠트리지 않는다(天網恢恢 疎而不失)'고 한다. 결국 당시 감사였던 윤탁연이 임란 3년째(1594)에 죽고, 그 뒤 100년 세월이 흐르면서 임금이 바뀌자, 의병의 기록을 캐고 현창사업이 일기 시작하고, 백성들이 북관대첩비를 세운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북관대첩비는 이렇게 세울 때부터 우여곡절을 겪은 기구한 팔자였다. 그 후 왜국에 볼모로 100년 간 갇혔다가, 귀국하여 북한으로 갔으니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