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11) 가신 뒤에 꽃이 피고

김현거사 2012. 8. 12. 10:01

<가계사 기행> (11) 가신 뒤에 꽃이 피고

                                                                                                     정 태 수

 

 농포공이 시화사건으로 가신 후, 국가적으로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두 오랑캐 난을 겪었다. 그리고 안으로는 당쟁으로 나라가 흔들렸다. 그러나 이런 내우외환 속에서, 그동안 가로채이고 묻어졌던 농포공의 구국안민의 공훈은 서서히 밝게 비쳐지기 시작하여, 드디어 꽃이 피었다. 사후死後 40여년에 잃었던 명예가 다 회복되자, 그 후 약 300년에 걸쳐 그 공이 현창되었다.

 먼저 후임 북평사 이식李植과 그 아드님 이단하李端夏에 의하여 저술된 북관지北關誌의 완성으로, 함경도에서의 삼난3亂평정의 공적이 문서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3란평정’이란 세 가지 난리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첫째는 가토 기요마사의 2만여 왜병이 남쪽에서 관북엘 쳐들어온 침략, 둘째는 오랫동안 이반되어 쌓여온 관북의 내부민심이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의 민란으로 여러 곳에서 들고 일어난 부역附逆반란, 셋째는 이러한 틈을 탄 북쪽 오랑캐가 무리지어 수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양민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한 난리를 평정한 것을 말한다. 관군과 치안이 무너진 함경도의 임진년은 이러한 안팎의 3란을 오직 정문부선생의 의병단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병만 상대하는 다른 지방 의병과는 달리 함경도 의병은 세 가지 적과 대결하는 특이한 여건하의 의병이었다.

 당시 북관 땅의 백성들은 함경도를 상고할 때 은인 세 사람을 떠올렸다고 한다. 첫째는 윤관尹瓘이다. 윤관은 함경도에 9성을 쌓아 개척한 분이다. 둘째는 김종서金宗瑞다. 윤관의 개척 300여년 만에 몽골의 말굽 아래 짓밟힌 곳을 그가 6진을 개척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문부鄭文孚이다. 6진설치 160여년 만에 왜와 오랑캐의 침범으로 점령당한 북관 땅을 수복하여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이 세분을 “북관3걸(北關三傑”로 일컫는다.

 공이 가신 후에, 먼저 억울함이 풀어지고, 다음으로 묻히고 가로채인 훈공이 잇따라 들어나 꽃이 피니,그 줄거리를 한번 훑어보자.

 

<가신지 15년>에 길주목사 최유해崔有海가 의병장의 자손의 상벌등용을 분명히 할 것을 상주하여 등용령을 내리게 하였다.

<가신지 41년>인 현종6년에는 영의정 정태화鄭泰和의 상소로 억울한 시화詩禍사 건 누명과 원통함을 풀어주는 신원(伸寃 1665)이 이루어지고, 자손에게 등용문이 열리게 되었다.

<가신지 42년>에 백성들이 경성 어랑리에 선생의 사당을 모시고, 이붕수李鵬秀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祐  등 북관대첩 네 장수를 옆에 배향하였다. 뒤에 창렬사彰烈祠라는 사액이 내렸다.

<가신지 43년>에 이단하李端夏가 애써 영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도움을 받아, 1667년 정월에 의정부 좌찬성 증직贈職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였다. 이 증직은,문관과 무관을 겸한 추대직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 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라는 긴 이름이다.

<가신지 43년>에 창렬사 옆에 촉룡서당燭龍書堂을 지어 지방민이 글 읽고 의를 사모하게 하였다. 이는 농포공의 문교시책을 상징화한 것인데, 이단하와 관찰사 민정중閔鼎重이 힘써 세웠다.

<가신지 70년>에 민진후閔鎭厚가 자손등용을 장계 올려 허락을 받았다.

<가신지 80년>에 증손 정삼鄭杉이 시호諡號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가신지 82년>에 회령에 사당을 세워, 주벽에 농포공을 모시고, 신세준申世俊 오윤적吳允迪을 배향하니, 2년 뒤에 현충사(顯忠祠 1707)라는 사액이 내렸다.

<가신지 84년>에 북한 길주 임명에 민립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섰다.(이 비는 러일전쟁 때에 일본으로 약탈되어 갔다가, 100 년후 대한민국을 경유하여 북한 길주 원위치로 환송된 그 비석이다.)

<가신지 90년>에 3개 중 충의忠毅가 선택되어 시호를 받았다.

<가신지 135년>에 민우수閔遇洙 서문의 전5권으로된 문집 <농포집農圃集>이 완성되었다.

<가신지 165년>에 5대손 정근鄭瑾의 상소로 후손에게 부조전不祧典이 내렸다.

<가신지 167년>에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완성되었다.

<가신지 236년>에 부령 숭열사(崇烈祠 1860) 사액사당에 제향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농포공 선양사업은 계속되었다.

<가신지 353년>에 11대손 정태진鄭泰辰의 노력으로 의정부 송산의 농포공 묘역이 경기도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문화재 지정비를 묘 앞에 세웠다.

<가신지 353년>에 진양호 조성으로 종가가 일족을 솔권하고 용암龍岩으로 옮기자, 11대손 정한재鄭翰載와 종손(鄭奎燮) 주도로 부조전을 이전하고 사당 충의사忠義祠를 세워, 박정희대통령 친필사액을 걸고(1977) 해마다 춘향제를 올리고 있다.

<가신지 378년>에 필자(11대손)가 공비를 보조받아 묘전 사당 충덕사(忠德祠 2002) 를 신축하고,그 문을 복지문復地門이라 지어 열고 홍살문을 세웠다. 또 정부 지정의 충의공 영정(국가영정 77호)을 제작하여 닫집에 걸고,안내판을 설치하는 한편, 선산 조성 후 500년 만에 재실 송산재松山齋를 지었다.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한 국역농포집國譯農圃集도 간행했다.

이후 해마다 의정부에서 전국 유림의 추향제秋享祭를 올리고, 의정부 송산의 농포공묘가 비로소 의병장의 묘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해, 참배와 숭모의 열이 일어나고 백일장의 장소로 학생 교육장으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의정부 무용단 축제를 열고있다

송산 묘전 충덕사 북관대첩비 移模碑(송산)

송산 사당이 들어선 후,시호를 따서 인근 도로와 학교 이름이 충의로忠毅路와 충의중학교가 명명되고, 공의 시묘살이가 이 지역 전설이 되어, 그 묘가 있는 산을 효자봉이라 부르고,이를 받아 효자중학교가 명명되었다.

 

 이리하여 북쪽 끝 함경북도에서, 한양과 의정부 등 반도의 중앙에서, 후손들이 살던 진주까지, 세 연고지를 중심으로, 한반도 3000리에 걸쳐 농포공은 현창되고 있다. 이로서 우리 가문사도 억울하게 둘러쓴 폐족廢族지경에서 벗어나서, 국난극복 공신가로 꽃이 활짝 핀 셈이다. 마지막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남북통일의 그날이 와서, 하루 빨리 휴전선을 넘어서,현재 갈 수 없는 북한 땅 함경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농포공의 의병활동의 유적들과  김책시에 복원해놓은 북관대첩비를  남북이 오손도순 갈 수 있게끔 소통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