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13) 시비 하나 남겨놓고

김현거사 2012. 8. 14. 13:03

 

<가계사 기행> (13) 월아산하에 할아버지 시비 하나 남겨놓고

 

                                                                                                               정 태 수

 

 진주8경 중 하나는 월아산 아래 금호의 호수물이 남강으로 흘러내려가는 풍경이다. 명소인 이곳,  ‘무넘기’에 커다란 강돌로 만든 시비 하나가 있다. 학고(鶴皐) 할아버지의 시비다. 거기서는 할아버지가 훈장으로 계시던, 용호재(龍湖齋) 터가 빤히 건너다보인다.

 

시비 뒷면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월아산 삼학사 (月牙山 三學士)

 

 구한말에 월아산 아래 월아동과 용심동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우국의 선비 세 벗이 살았다. 한일합병을 당하자 북방재배하고 죄인이라 하여 갓을 버리고 패랭이를 쓰며 글로서 망국을 한탄하였다. 세인들은 월아산 삼학사라 칭송하였다.

 

학고(鶴皐) 정선교(鄭璿敎) 1856~1931

월암(月岩) 성환종(成煥鐘) 1860~1937 

아서(牙西) 성환균(成煥均) 1866~1944

 

                                                                                2004. 7.건립위원장 문하생 성환덕

 

 

앞면에는 학고(鶴皐) 할아버지의 망국을 탄식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亡 國 歎

                         鶴皐 鄭璿敎

 

   一國難擯萬國親 遠人風帆已多津

   異籍乘機如捲席 吾王何事未終仁

 

   智士無言歸獨善 隱倫堅節遠囂塵

   海內蒼生啼索莫 權臣安處起靑烟

 

 

학고공의 우국 시비 (앞면) 확대한 시비의 뒷면

 

     

         망국의 한탄

                          권호 역

 

    물리치기 어려워 만국과 화친하니

    멀리서 온 돛단배 나루에 가득하다

    기회 틈탄 다른 나라 멍석 말듯 하는데

    우리임금 무슨 일로 끝내 현명 못했나.

    선비는 말 멈추고 혼자 선한 체 왜하며

    절개군자 어찌하여 성가시다 멀리하나

    백성들은 삭막하여 울부짖고 있는데

    매국권신 좋은 집은 푸른 연기 뿜는구나.

 

 

 정든 월아산이 내려다보고, 할아버지 서당 터가 건너다보이는 금호(琴湖) 호반의, 이 시비는 내 손으로 세운 것이다. 5대 장손으로 서울로 떠나간지 50년 만에, 흩어져있던 내 소관의 고조 이후 역대 산소를 모두 경기도 포천으로 옮기면서, 고향을 떠나는 우리 가계의 흔적으로 할아버지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돌에다 새기어 남겨놓은 것이다. 이 시비는 우리집의 까꼬실 9대 300년사, 달음동 100년사가 끝나고, 아득한 11대조 농포공 시절의 옛 세거지 한양(서울)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그동안 살던 현장에 남긴 비다. 사실 우리 가계의 진주살이 흔적은 오직 이 시비 하나 뿐이다. 한 가문의 흔적이 담긴 마침표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 3대 기념사업 중, 문집 출판과 묘앞 계자훈비 건립은 좀 단순한 편이었다. 그러나 세번째 사업인 시비 건립은 좀 힘들었다. 그런데 이 비를 세우는 데는,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할아버지의 마지막 제자 한 분이 마침 계시어 가능했다. 그 분은 금산면장과 진주향교의 전교(典敎)로 활동하시던 성환덕(成煥德)씨다.  성씨 어른은, 스승이 가고 60여년에, 모든 제자도 가고 없는데, 딱 한 분 마지막 제자로 남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스승의 기념사업을 마무리 짓는데 도움을 주신 것이다.

 서당 소재지인 용심동(龍潯洞)은 창녕성씨가 많이 사는 곳으로, 할아버지의 친구도 제자도 성(成)씨가 많다. 성환덕 어른은 어릴 때 할아버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다면서, 할머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많은 회고담을 들려주시기도 했다. 이 분 도움을 받으며 나는,  ‘무넘기’ 땅 관리자인 진주시 수리조합에 신청하여 사용허가를 받고, 금산면장과 면의회의 건립결의와 승인을 받아, 명승지의 풍경에 어울리는 지리산 자연석 강돌바위를 구해다가 친필 한시와 번역시를 새긴 시비를 무사히 세웠다. 그리고 2004년 8월 28일에 고향 어른들과 유지 친지 100여분을 초청하여 모시고 제막식을 치렀다.

 세월 따라 그 서당 용호재(龍湖齋)도 터도 없이 솔밭이 되고 말았는데, 오직 제자 한 분이 장수해주신 바람에 할아버지 숙원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진주 금산을 떠나면서, 할아버지 우국시비 하나 그렇게라도 세워놓고, 그 비를 「훈장바위」라 이름 짓고 왔다. 그 돌비 하나는 우리 ‘가문사 3대’의 유일한 흔적이다. 

 

  성환덕 어른은. 할아버지 문집출간위원장도 우국시비건립위원장도 맡아주셨고, 서울로 이장한 조부 조모 내외분의 비문도 짓고 서명?해주기까지 하셨다. 월계라는 내 자호自號 겸 필명도 그 어른 심사를 받은 것이다. 학고 할아버지는 제자복을 타고 나셨던 것 같다. 사제간의 아름답고 질긴 인연에 새삼 감탄하면서, 이 자리를 빌어, 엎드려 성 면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떠나온 고향

유목의 길 떠나오고 초막은 사라지고

할아버지 시비 하나 호반에 홀로 남아

내력을 얘기하고 있다 내 맘도 거기 있고.

 

 나는 진주에 갈 때마다 이 시비를 만져보려고 달려간다. 이 시비를 내려다보고 있는 월아산도, 받들고 있는 금호 호수도, 이 비와 조화를 이루면서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참 편안한 곳이다. 시비 언저리는 어느덧 우리 가문의 성지가 된 셈이다. 나는 이 비의 앞면과 뒷면을 둘러보고, 나의 조부모와 부모를 포함한 낙남落南 10대 선조님들에게 예를 올리며, 나의 불효를 자책하고 다잡으면서, 조용히 묵념을 드리곤 한다.

 

    못 잊어

 

월아산에 태어나 남강에서 자랐으니 월아산 두 봉우리 아침 해를 받쳐 올려

이 몸에 짙게 배인 고향 강산 흙 내음 그 햇살 기를 받아 작은 가슴 키웠으니

떠나도 잊지 못한 연유 이제 서야 알겠네. 한평생 얻어진 열매 그 은덕 아니런가.

 

청곡사 인경소리 눈과 귀를 열어주고 내 고향 그 언덕에 저녁노을 짙어지면

금호 가의 맑은 바람 슬기를 불어넣어 할머니와 둘이서 별하나 콩콩 별둘 콩콩

티 없을 인생이련만 이내 홍진 어인 일고. 아련히 되살아나는 백발 동심 애달다.

 

 때로는 내 자식들과 손자들의 가계 계승정신을 기원하며 명상에 젖어보기도 한다. 서울에서 까꼬실로, 까꼬실에서 월아산으로, 월아산에서 다시 북악산으로, 북악산에서 미국으로, 부쩍 빨라진 우리 가족 이동속도로 보아, 앞으로 달로 화성(火星)으로 옮겨가 살지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7대조 이하의 모든 묘는, 이미 손자의 생활근거지 근처가 될 경기도 포천으로 다 옮겨 놓았고, 묘비문도 새겨놓았다. 또 금호 호숫가에는 할아버지 시비를 세워놓았다. 그러니, 이젠 자손들은 설사 어디에 가서 살더라도,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에 지구촌 대한민국을 찾아, 포천抱川의 가족묘역 겸 가족공원에서 열리는 시사時祀에 참석하고, 금산의 학고(鶴皐) 할아버지 시비를 참배할 수 있는 것이다. 미력하나마 종손의 도리를 다한 후련함을 느낀다.(계속)

 

 

학고공의 우국 시비 (앞면) 확대한 시비의 뒷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