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15) 비운의 부마와 경혜공주

김현거사 2012. 8. 28. 09:58

<가계사 기행> (15) 비운의 부마와 경혜공주

정 태 수

조선조 초기에 우리 가문은 왕가와 몇번 사돈 맺은 일이 있다. 예성부부인이 효령대군에게 시집을 갔고, 세종의 장손녀이고 문종의 장녀인 경혜(敬惠)공주는 우리 가문으로 시집을 오기도 했다. 세종 32년(1450)의 어느 날, 경복궁에서 경혜(敬惠)공주와 나의 16대조 정종(鄭悰)의 혼례가 거행되었다. 정종은 대제학 정도공(정도공) 정역(鄭易)의 장손자이자 형조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아들이다. 경혜공주는 세종의 장손녀이고 문종의 장녀이며, 단종의 하나 밖에 없는 누님이다. 이 결혼식에서는 신부의 할아버지 세종대왕과, 아버지 문종, 숙부 수양대군(뒤에 세조)과 정희왕후,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여러 삼촌들, 그리고 신부의 동생 열 살 짜리 세손(世孫) 이홍위(李弘暐)가 참례하였다. 이홍위는 뒤에 단종이 되었으니, 단종은 하나 밖에 없는 누님이 정종(鄭悰)에게 시집가 새 자형이 생겨 몹씨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할아버지 세종대왕 돌아가시고, 아버지 문종이 등극하니 세손에서 세자로 올랐다.  문종도 재위 2년여에 돌아가시니, 갑자기 왕이 되어 뒤에 단종(端宗)이라 불리었다. 불과 3년(1450~1452)안에 일어난 변화였다. 이에 따라 단종의 자형인 정종도 3년 사이에 처조부 돌아가시고, 장인이 가시고, 뒤이어 어린 처남이 왕위에 오르는 격변을 겪었다. 

 단종은 12살에(1452)에 왕이 되니, 문종의 유명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의 보필을 받았지만, 이듬해 단종 2년에 둘째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난을 겪는다. 수양대군은 한명회(韓明澮)와 짜고,「양평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을 처단하여 단종 왕을 보호한다」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살생부를 만든 뒤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은 김종서의 집을 방문하여 철되로 죽이고, 황보인도 죽이고, 살생부에 따라 왕명이라 속이고 야반에 궁으로 대신들을 불러들여 대궐문에서 오는 차례대로 때려죽이고, 양평대군은 유배했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것이 계유정란(癸酉靖亂 1453. 10)이다.

 단종은 처음에는 숙부인 수양대군을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후 수양대군이 다른 마음을 품었음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궐내가 무서워 자형집에 자주 나와 자면서, 누님과 자형의 보호에 의지했다. 이 와중에 단종은 판돈영부사 송현수(宋眩壽)의 딸과 결혼(1454)하였다. 신랑 단종은 14세, 신부 송비(宋妃)는 15세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름뿐인 왕과 왕비였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병마도통사를 다 겸임하여, 통수권과 병권을 다 쥐고, 좌의정 정인지(鄭麟趾), 우의정 한확(韓確)을 앉혀 독단하였다. 이에 단종은 시위(尸位, 죽은 자리)를 지키다가, 단종 4년(1455)에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말하고 물러났으니,수양이 왕위에 오르고, 단종은 태상왕(太上王)이 된 것이다.

그 후, 제1차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하자 사육신이 죽고, 왕의 명칭을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 1556)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제2차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금성대군과 자형인 정종이 죽고, 단종은 서인으로 되었다가, 세조 3년(1457)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다.

 이 단종애사(端宗哀史) 속의 제2차 복위운동(1457. 6)이 누설되어 실패되자, 금성대군과 영양위(寧陽衛) 정종 할아버지 두 분은 각각 승흥과 광주로 각각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나흘 뒤에 단종도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에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경혜공주 할머니 묘 정종의 비와 의관묘 (공주묘 옆)

 이 당시경혜공주 할머니는 광주(光州) 유배지에 부군을 따라가 함께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온갖 위험과 욕된 일을 당하면서 원망하는 빛이 없이 아내의 도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편 정종이 비명횡사한 뒤에 경혜공주 할머니는 그 신분이 순천부(順天府)의 관비가 되었는데, 하루는 부사 여자신(余自新)이 공주를 불러 실제로 부리고자 하니, 공주가 대청에 올라 의자에 앉아,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결국 부리지 못하였다 한다. 모두 연여실기술(燃黎室記述) 제4권 단종조에 있는 말이다.

세인들은, “단종을 보필하여 정치를 한 사람은 황보인과 김종서이며,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사람은 성삼문과 박팽년이며, 단종을 섬긴 공생인(共生人)은 금성대군과 정종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때 공주는 귀양살이 중에 아들 하나를 낳아 잠양(潛養, 숨겨 기름)해 왔다 한다. 세조가 그 소문을 듣고 내시를 보내며 “공주가 낳은 아이가 계집아이면 데리고 오고, 사내아이면 목 졸라 죽이고 오라” 했다.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侯)가 그 내시를 다시 불러 “문종 임금의 핏줄은 공주가 낳은 그 아이 하나뿐이다. 만약 죽이면 그 핏줄이 끊어지고 만다. 비록 사내아이일지라도 데리고 오라. 임금을 속인 죄는 내가 직접 질 것이다”라 타일렀다. 그래서 내시가 아이를 데리고 오자 여자 옷을 입혀 궁중에서 길렀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가 내전에 들어와 보고 “저 아이의 생김새와 기상이 흡사 사내아이 같다. 참 이상하다” 하니, 왕후는 그때 비로소 사실대로 고했다 한다. 세조가 그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지난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이 아이를 보니 절로 눈물이 쏟아지는구료” 하고, 이름을 정미수(鄭眉壽)라 지어주었다고 한다. 미수란 남의 장수를 빌 때 쓰는 말로, 눈썹이 희고 길게 자라도록 오래 살라는 뜻이었다.

 세조 8년(1461)에 세조가 내관을 보내 경혜공주를 서울로 불러올려, 특별히 노비 50명과 일품록(一品祿)을 주고, 4년 뒤에는 집을 내려주었다. 또 그 뒤 임금인 예종도 노비 50명을 내려주셨다. 성종 4년(1472)에 병을 얻으니 임금이 내의(內醫)와 약을 보냈으나 세상을 버리니, 그 때 나이 39세였다. 경혜공주 할머니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양주군 대자리(大慈里)에 묻혔다. 세종의 손녀로, 문종의 외동딸로, 단종의 단 하나뿐인 누님으로 귀하게 태어나, 결혼하자 말자 할아버지 죽고, 아버지 죽고, 남편 죽고, 남동생 단종 죽고, 유배지에서 얻은 아들 하나에 의지하다가,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뜬 비운의 공주 할머니였다.

나의 16대조 영양위 정종 할아버지 일생 역시 기구하다. 문종대왕의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가 되자마자 장인 장모가 돌아가시고, 어린 처남이 등극하였으나,처남은 숙부에게 힘을 빼앗기고 연약한 자리만 한 3년 유지하다가, 군(君)으로 서인으로 떨어져가는 꼴을 보다가, 결국 자기도 귀양 가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을 겪었다. 뒤에 명예를 회복하고 영의정으로 추증받기도 하였으나 시신도 찾지 못하였다. 정조 대(1791)에 이르러 공주 묘 옆에 비를 세우고 의관을 묻어 묘로 삼으니, 사후 30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 다행한 것은, 유배지에서나마 아들 하나 남기신 점이다. 아들을 두었기에 해주정씨 대종가의 대를 잇고, 서인으로 강등은 되었어도, 아무도 돌보지 않는 처남 단종의 제례를 모시고, 또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살아서 수십 년을 모시었다.그리고 왕후가 돌아가시자, 해주정씨 선산에 노산군 부인묘란 이름으로 장례 지내고, 제사를 모시는 도리를 다할 수 있었던 점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호에서 이어가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