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사 기행> (18) 짚신 한 켤레 벗어놓고 (1)
<기인 허암(虛菴) 정희량(鄭希良) 선생>
정 태 수
인천 계양산(桂陽山) 서쪽 줄기의 끝, 해발 80m로 솟은 봉을 허암봉이라 한다. 여기 한 선비가 은거한 집터를 허암지라고 한다. 이 집은 동네 사람들에게 ‘골밭집’이라 불린다. 그 옆에 ‘허암 약수’가 흐르고 있는데, 이를 ‘허암찻샘’이라 부른다. 요새는 인천시 서구에서 해마다 허암백일장을 열고 있다. 1996년 11월 2일, 가천문화재단에서는 인천 서구 검암동 산 61번지의 허암지(虛菴址)에서 허암 선생 500주년 기일을 맞아 대대적인 추모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 허암선생은 누구신가?
허암(虛菴) 정희량(鄭希良) 선생(1469~1530)은 해주정씨 7세손이다. 아버지 철원부사 정연경(鄭延慶)과 어머니 청주 경씨(慶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9세에 논어를 읽고 아버지 물음에 척척 대답하였다. 아버지가 그런 싹을 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넣어 학문을 닦도록 하였으니, 23세에 생원에 장원하고, 이듬해 진사에 차석급제(1492)하고, 그 뒤 문과에 합격(1495)하여 예문관 검열, 승정원 정자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리고 곧 명예로운 사가독서(賜暇讀書, 1496)를 받아 호당(湖堂)에 올랐으니, 이는 관직은 유지하면서 학문만 전념하는 특별휴가 독서다. 선비들이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때 함께 독서당에 나간 친구는 김전 김일손 신용개 등 장래가 촉망되는 친구들이었다.
허암선생은 주역에 능통하여 미래를 미리 점치고 기이한 행적을 남긴 분이다. 그러나 우선 초반 행적부터 살펴보자.
선생은 연산군 1년(1494)에 궁중에서 불사(佛事)를 일으키려 하자, 즉시 궁중불사 반대상소를 올렸다. 조선은 유교이념으로 건국하여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써 왔기에, 신진 유생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글 속에 과격한 부분이 있어, 해주로 유배(1495)를 당했다가, 그 상소가 사사(私事)가 아니라는 이유로 귀양에서 풀려나 복귀하였다.
선생의 곧은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부분은, 다음해 연산군에게 상소한 치정십조(治政十條, 1497)다. 그때는 연산군 즉위 3년째 되는 해다. 왕의 자세나 행정에 걱정스러움이 보이기 시작한 때다. 모두 4,000자나 되는 장문의 건의서였다. 요점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예문관 대교 정희량은 상소합니다. 지난 달 27일에 정전에 낙뢰가 있어 전하께서 재해를 당하심에, 나라에서 인사를 그르치면 하늘이 응징한다 하온데, 전하께서는 보위를 계승하시어 군자와 소인의 진퇴가 격심한 이때, 아직 선정의 기틀을 잡지 못했기에 이런 변고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은 필시 하늘이 전하에게 경고하는 것이라 자각하시고 개과천선의 계기로 삼으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신이 감히 우국애군의 마음으로 삼가 치정 10조를 올리오니 하람하시기 바랍니다」
1. 임금 마음을 바르게 하실 것 (正君心) 6. 환관을 억제하실 것 (抑官寺)
2. 경연에 근실하실 것 (勤經筵) 7. 교학을 숭상하실 것 (崇學敎)
3. 간쟁을 가납하실 것 (納諫爭) 8. 이단을 물리치실 것 (闢異端)
4. 어질고 간사함을 변별하실 것 (辨賢邪) 9. 상벌을 신중히 하실 것 (愼賞罰)
5. 대신들을 소중히 하실 것 (敬大臣) 10. 재물을 절용하실 것 (節財用)
이 상소를 올린 때가 공의 나이 29세였다. 상소 내용은 지금 우리 민주사회의 대통령에 대한 건의서보다도 더욱 매섭고 거센 나무람이다. 그래도 연산군은 이 상소가 쓸 만한 데가 있다 하여 시행토록 전교하였다.
이듬해 연산군 4년(1497), 선대왕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이 있었다.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자기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그 내용은 중국 초패왕 항우(項羽)가 회왕(懷王)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역사를 비난한 것이었다. 원래 사초란, 해당 왕도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극돈(李克燉)과 유자광(柳子光)이 이 사초를 훔쳐보고, 왕에게 “이 글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비유해서 쓴 글입니다”고 밀고하였다. 연산군은 대로하여 큰 옥사를 일으켰으니, 김일손은 능지처참되고, 이미 저 세상 사람인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 되고, 많은 사류들이 처벌을 받았다. 그때 사관이었던 허암공도 이를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로 의주로 귀양을 갔다가, 얼마 후 김해로 옮겨졌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이다.
선생은 김해 유배 중에 수로왕릉이 영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참배하고 귀양에서 풀려나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기원의 글 말미에 정희량(鄭希良)이란 이름 대신에, 성의 파자인 奠자와 邑자를 썼다. 그 날 밤 꿈에 겹눈동자의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는 장차 방면될 것이다”하였다. 그런데 그해 천재지변이 있어, 나라에서 죄인을 먹여 살릴 양식이 없어, 특사(특사)를 받아, 연산군 6년(1520)에 선생은 풀려났다.(金官志)
선생은 유배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고 임종 못 본 것을 후회한 바 있는데, 돌아오자 곧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때 두번째 귀양에서 풀려난 허암공은, 연산군의 패악을 전해 듣고 비분감개하여 공직에 뜻을 잃고, 자기 환경을 다시 살펴본 듯하다. 원래 정주학(程朱學)의 대가인데다가 주역(周易)과 음양학에 능통한 분이어서, 미래를 점치고 예측하는 일이 가능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선생은 “갑자년(甲子年)에 있을 화가 무오사화 보다 더 클 것이다. 그때 나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예언한 후, 얼마 후 조강(祖江, 임진강을 만나는 한강 하류)가에 상주가 쓰는 두건과 짚신 한 켤레를 벗어놓고 사라지고 말았다. 늦게야 시종과 가족이 알고 찾아보았으나 행적을 알 길 없었다. 5촌 숙부인 정미수(鄭眉壽)가 사람들을 동원하여 물속을 다 뒤졌으나 찾지 못하고, “자취를 감춘 것이지, 죽은 것은 아니다”라고 결말지었다. 그 경위를 들은 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하여 죽었기로 무엇 하러 찾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한다. 나중에 가족들은 그 분의 짚신과 옷으로 경기도 고양 선산에 장사 지냈다.
이상이 허암 정희량 선생의 관직에 계실 때 일들이다. 선생이 실종된 9일 후 국가공식기록인, 연산군 일기 권44, 연산군8년 5월 14일. 조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고양군에서 어머니 묘를 수묘하면서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날것으로 먹고, 여러 가지 버섯과 풀들을 먹으며,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기를 열흘 또는 한 달이 되도록 하다가, 다음날 도망해버려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가족이 찾아서 강가에 이르니, 신 두 짝이 물가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선생의 34년간의 삶을 크게 보면 처음 24년은 자라고 공부하고, 그 후 10년은 관직에서 일한 것은 5년, 두 번 유배로 귀양살이 5년이다. 34세에 조강 가에 두건과 짚신 벗어놓고 세상에서 일단 죽은 것이다. 공이 세상을 버린 뒤, 과연 조정의 역사는 큰 풍랑이 일었으나, 공은 야사(野史)와 개인 문집을 남겼다. 허암집(4간본)에는 선생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있다. <허암선생은 정주(평남 定州)에 지방에 숨어살았다. 경인년(1530) 11월 27일에 심원동(深遠洞)에서 향년 62세로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는 문양공(文襄公)으로 시집 2권이 있다. 첫 부인 강릉 최씨는 일찍 돌아가시어 자식이 없었고, 고양(고양) 성라산(星羅山)에 묘가 있고, 둘째 부인은 안동김씨로, 심원산(세칭 鄭家山)에 부부 합묘하였다>는 글이 그것이다.
학계에서는 선생을 방외인(方外人)으로 분류한다. 방외인이란 유가사회에서 볼 때 도가적 또는 불가적인 경향을 보일 때 쓴다. 일반적인 처사형(處士型)에서 벗어난 반체제적 이역인(異域人)이다. 사대부적 질서를 부정하거나, 격렬한 비판이나 방랑 또는 잠적 등의 경향을 보인 이단 지식인을 말한다. 대체로 불가적 성향을 띈 김시습(金時習, 1435~93)을 방외인의 시조로 보고, 남효온(南孝溫)과 홍유손(洪裕孫)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정희량 선생은, 문명을 부정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허무주의로 평가되었고, 이는 이달(李達)과 임제(林梯)로 이어졌다고 본다. (계속)
<가계사 기행> (18) 짚신 한 켤레 벗어놓고 (2)
정 태 수
이 편에서는 은둔 후 허암선생의 기이한 일화 열 가지를 소개한다.
첫번째로, 우선 선생의 '산은설(散隱說)'을 살펴보자. “세상을 도피하여 숨어사는 것도, 산에 숨는 소은(小隱)이나 시성(市城)에 숨는 대은(大隱) 같은, 장소적 의미보다 한산하고 적적한 산은(散隱)이라야 한다. 장자의 산목(散木)을 보아라. 궁벽한 곳에 꾸부러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처럼, 나도 너절하고 초라하고 버려진 산은이라, 누가 나를 뺏으려 하겠느냐. 태극이 흩어져서 음양 건곤 8쾌 5행이 되어 용도가 무궁해지고, 천지가 흩어져서 일월 성진 강산 풍우가 되어 조화가 무궁해지며, 도(道)가 흩어져 예지(?) 부자 군신 부부가 되어 만사의 근본이 되듯이, 잘 산(散)해야 한다. 태극에 산함이 없으면 일기(一氣)에 그치고, 천지에 산함이 없으면 만물이 없다. 이로써 나는 산은을 즐기고 있다”고 설파하였다.
두번째는 갑자사화(연산 10년, 1504) 때 이야기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 6년 후의 일로, 간신 임사홍(任士洪)이 훈구세력과 결탁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출 사사된 일을 왕에게 고하고, 그것이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 그리고 신진사류들의 소행이라고 밀고한 데서 터졌다. 연산군은 두 후궁과 그 소생들을 죽이고, 김굉필(金宏弼) 등 관련 대신을 처형하고, 한명회(韓明澮) 등도 부관 참시하였다. 이때 무오사화 시 귀양 가거나 살아남은 선비들도 거의 쓸어버렸다. 갑자사화에서 연산군의 폭군성이 남김없이 발휘되자, 당시 선비들은 허암선생이 역술을 풀어 미리 잠적한 일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셋째로 혼돈주(混沌酒) 이야기다. 허암선생은 귀양살이 집에서 술을 담가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마시면서, 우주 개벽 당시의 혼돈(요즘 말로 카오스)에 비유했다. “내 막걸리 내 마시고, 내 천성 내가 보전하네. 그 즐거움 즐기는 자는 마음의 즐김이니, 늙음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이 즐거움 뉘 얄랴.” 하며 살았다. 이는 양조주라는 문명에 저항하는, 허암집 서문에서 밝힌 허무주의의 한 사례라 할 것이다.
혼돈주가(混沌酒歌)
한 번 마시니, 신령과 통하여 우주가 개벽하듯 몽롱하고, 두 번 마시니, 자연과 합하여 혼돈을 벗어나 자연을 초탈하네. 손으로 혼돈세상 어루만지고 귀로 혼돈 바람 들으니, 넓고 큰 이 세상 내가 주인, 이 술 천작이라 인작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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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신선로의 발명이다. 공이 산중에 은둔하고 있을 때, 그릇에다 숯불을 담고 그 둘레에 채소를 넣어 익혀 먹었다. 이 그릇은 주역의 63번째 쾌인 수화기제(水火旣濟, 水昇火降)의 이치로 만든 첫 발명품으로, 매 끼 식사를 이 화로 하나로 해결했다고 한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퍼지면서 허암공을 신선으로 보고 ‘신선로’라 이름 지어졌고, 나중에는 야채뿐 아니라 고기와 생선에 육수를 넣어 오늘날처럼 변했다. (大東奇聞. 1925).
다섯째, 퇴계 이황(李滉)이 산중에서 공부할 때 주역을 읽는데, 늙은 중이 곁에서 보고 이따금 구두점(句讀點) 잘못을 정확하게 고쳐주었다. 퇴계는 난해한 주역을 그렇게 능통할 사람은 자신의 숙부 친구이신 허암선생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지금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어진 선비가 모두 나와 벼슬하고 있습니다. 유독 허암공께서는 어찌하여 다시 속세에 나오지 않으십니까?” 하니, 그 답이 “허암의 이름은 들어서 안다. 그가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다가 3년 상을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니 불충이라, 불효불충죄가 막대한데 무슨 면목으로 인간 세상에 나가겠나”하고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여섯째로, 허암선생의 은둔살이 때 변성명(變姓名)한 이야기다. 점술가 김윤이 젊었을 때 묘향산에서 어떤 유명한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를 만나 7~8년간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분 이름이 이천년(李千年)이었다. 뒤에 김윤이 그 스승의 사주를 보관해오다가, 서울로 돌아와 역시 복술을 좋아하는 신경관을 만났는데, 그가 가지고 있던 유명인사 사주 일람표를 보니, 정희량 선생 사주가 이천년의 사주와 꼭 같아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정희량과 이천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되고, 선생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되었다(퇴계언행록).
일곱째, 허암집(虛菴集)에는 공의 시호가 문양공(文襄公)이라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시호란 국가 유공자가 죽은 뒤에 왕이 내려주는 명예로운 호이다. 34세에 조정을 떠난 공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뒷사람이 추측하기를, 평안도 정주 지방에 귀양가서 숨어살면서 학문을 일으킨 공이 크다고, 지방사류들이 만들어 드린 사시(私諡,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친척․제자가 올리는 시호)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新安邑誌, 신안은 평북 정주의 옛이름)
여덟째, 연산군일기를 만들 때 사초(史草)에 얽힌 이야기다. 연산군이 죽어 연산군일기를 쓰려는데, 두 차례의 큰 사화로 선비들이 다 죽고 사료가 일실되어, 자료 구하기에 조정이 나섰다. 그때 허암선생의 아우 어은공(漁隱公) 정희검(鄭希儉)의 집 벽장에서 많은 사료를 구하여 국조실록 연산군일기를 쓸 수 있었다.(於于野談). 허암공은 6형제 중 맏형인데, 맏형노릇을 못하니 둘째인 어은공이 가사를 모두 맡아 있었던 것이다. 그 동생은 진사에 올라 벼슬자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형 허암공의 정치 행로를 보고 모든 앞길을 포기하고 시주일생(詩酒一生)을 보냈다. 그러나 뒤에 아들 하나(孤竹齋公, 鄭彦慤)를 잘 두어 크게 된 덕으로, 사후에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다.
아홉째, 허암공과 한시 교류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선배이며 글 친구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였다. 그는 허암공과 같은 김종직의 제자로, 한 때 사림파(士林派) 우두머리 격이었다. 조의제문을 그대로 싣게 했다는 죄목으로 무오사화에 귀양살이 한 바 있고, 중종때 적소에서 50세에 병사하였다. 그 후 갑자사화 때에 부관참시 당한 선비다. 그가 무오사화 때 순천에 유배되어 분통이 터져 지은 만분가(萬憤歌)는 유명하다. 안정복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제44책에 실려 있다. 분량이 길어 말구(末句) 한 줄만 떼어 싣는다.
아무나 이내 뜻 알리 곧 있으면 百歲交遊 萬歲相感 하리라. <조위> |
이 가사는 유배가사(流配歌詞)의 효시이다.
그는 허암선생과 차운시(次韻詩, 남의 운자를 따서 따라 지은 시)를 많이 남겼다. 허암의 남은 시 중에도 여러 수도 조위와의 차운시이다
열번째로 퇴계 선생의 숙부인 이우(李堣)는 허암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허암은 유물 유고를 흔적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는 허무주의자라, 스스로 보관한 글이 없었다. 그런데 잠적한지 한 10년 후에 그가 죽은 줄 알고, 그의 일생과 시문이 아깝다고 생각한 친구 청해군(靑海君) 이우가 여러 사람에개 물어 허암의 유고를 수집 출간하였다. 그 서문에 “군(君, 자네)은 찬바람에 붉은 노을을 먹으며, 천길 멧부리에서 옷을 떨칠지니, 나그네의 궁박 곤궁한 삶은 군이 의주 귀양살이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내 장차 지팡이로 구름을 두들겨 충허지관(沖虛之館, 신선이 거쳐간다는 상상의 집)에서 군에게 술잔을 권하고, 군이 저술한 것을 모두 들려주리라”하였다.
끝으로, 허암은 일곱 개의 차시(茶詩)를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인천 허암봉의 '차샘' 옆에 시비로 서 있다. 희귀하게 시조 단 한 수가 전해진 것은, 청구영언에 실려있다.
흐린 물 얕다 하고 남 먼저 들지 말며 지는 해 높다 하고 번외(번외) 길 가지마소 어즈버 날 다짐 말고 나나 조심 하여라.
(靑丘永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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