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공개 감사문

김현거사 2014. 6. 4. 20:17

 

          문교부 시절의 은인 여러분께(공개 감사문)

                                                                                                                      정 태 수

 

  이번에 문우회 전덕생 본부장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생각해보니, 옳치 이 기회에, 80중턱에 이른 내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그동안 (     )년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 재직할 때 받은 크고 작은 가르침을 주신 선후배님들에게, 공개적으로 감사인사를 드려야할 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만리장천이 지척이라고,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빚만 잔뜩 지고 떠날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조바심도 있던지라, 반갑게 펜을 들었습니다. 이 기회에 그동안 도움 주시고 이끌어주신 분들을, 앞뒤 가릴 것 없이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체면 생략하고 실명 거명하면서, 공개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문장이 조리가 없고 외람된 점을 해량해주시기 바랍니다.

 

  첫번째 감사인사는 50 여년 전으로 갑니다. 입사 1년 밖에 안 된 풋내기 후배를, 총무과 인사계장이란 중책을 지워줌으로써, 저의 첫 존재감과 자각을 일깨워주신 김강현(金康鉉) 선배님과, 정윤진(丁允鎭) 총무과장님, 그리고 김상협 장관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당시 1961년은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그리고 군정문교부장관을 지내신 오천석 장관(8대)의 제2공화국 말년이었습니다. 저는 수습행정관으로 문교부에 들어섰지만, 바로 두 달 후에 5.16 혁명이 일어나 큰 변화기를 맞고 어리둥절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김강현(金康鉉) 선배님이 저를 계장으로 추천했고, 그 안을 받아주신 분이 정윤진(丁允鎭) 총무과장님이고,  김상협 장관님 입니다. 죽어 석 잔 술이 살아 한 잔 술만 못하다는 말도있지만, 세분께 저승에서나마 저의 늦은 인사를 받아주시기 간절히 기원합니다. 

 

 두번째 감사인사는 문홍주 장관님(17대)과 장인숙(張仁淑) 차관님께 올리고 싶습니다. 7년 뒤. 문홍주 장관(17대)께서 부임하시어 七年大旱에 큰비 기다리듯 기다리던 저를 총무과장이란 중책에 기용해 주셨습니다.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듯 제가 열심히 일하게 해주신, 장관님의 그 크신 은혜, 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억울한 일도 있었습니다. 후임 권오병 장관(18대)  재직시, 뜻아니한 오해로 경북대 부속병원 과장으로 좌천되었습니다. 하도 억울해서 사표를 낼까하여, 장관 댁을 찾아가도 대문을 열어주지 않아, 문만 발로 차고 온 일 있습니다. 당시 장관님에게 듣기 민망한 이야기가 돌아, 그걸 누군가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투서를 했는데, 눈 먼 개 씨암탁 죽이듯, 휘하의 총무과장에게 혐의를 둔 일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 이었습니다. 나중에 투서자가 결국 누군가 알게 되신 것으로 압니다만, 結者解之 않고 가신 일은 평생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장인숙(張仁淑) 차관님이 깨끗이 정리해주셨습니다. 장선배님은, 장관의 오해를 받아 경북대 부속병원 과장으로 쫓겨간 뒷사정을 알고, 다음 홍종철 장관(19대)에게 여쭈어 저를 다시 문교부로 불러올려 주셨지요. 저의 일생 단 한 번의 귀양살이 한을 풀어주신 것이지요.

 이 일이 40여 년 전인 1970년 1월의 일이었네요. 그러시고도 생색 한마디 없이 위로와 격려를 주신 장선배님의 인격. 그 뒤에 대학교육국장 당시에 저를 부이사관 승진과 동시에 학사담당관으로 직접 데려다 쓰신 선배님의 은덕을 어찌 꿈엔들 잊겠습니까. 장선배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의 그 뒤의 대학교육국장 보직, 국보위 차출, 차관 등판 명예도 돌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의미를 담고, 늦게나마 문장관님과 장선배님께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세 번째 감사인사는 저를 대학교육과장으로 안내해주신 권종복(權宗複)님께 드립니다. 저도 그 사실을 문교부를 졸업한 지 30년이 지난 최근에야 우연히 알았습니다. 제가 시설과장으로 있던 그 때, 오성식 대학국장께서 공석인 대학교육과장 자리를 대학교육과 주무주사였던 권선생을 불러 과장 물색상담을 나누었을 때, 권선생께서 서슴치 않고 이 정태수를 추천하시어, 오국장님이 바로 수긍하시고, 즉시 민관식 장관님을 뵙고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그 일로 제가 대학교육과장으로 영전하게 되었는데, 저는 여태껏 그 원인을 모르고, 내가 ‘고시합격자니까’ ‘열성분자니까’ 하는 건방진 생각,  ‘일 잘한다고 인정 받았나보다’ 하는 제 잘난 맛으로 거들먹거렸으니, 참으로 미안하고 얼굴 붉힐 일 입니다. 늦게나마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고개 숙여 감사인사 올립니다.

 

 네 번째 감사의 절은 전두환 전 대통령께 올립니다. 1980년 6월4일, 저는 '내일부터 국보위로 출근하라'는 국보위 김상준 대령의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장관은 아직 모르니 가서 말씀드리라' 한 것으로 보아, 아마 당시에 교육개혁, 특히 대학 개혁을 위한 목적으로, 당시 대학국장인 저에게 먼저 전화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국보위 문공위원회에 참여한 저는, 7.30교육개혁안 성안을 주도하고, 나중에 오자복 위원장의 전출 후, 그 후임 위원장을 거쳐,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문공분과 간사직을 담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두 전대통령의 개혁 초기 일들 입니다.

 그 사이 저는 1급 관리관으로 승진하고 중앙교육공무원 연수원장을 겸직하였는데, 1981년 4월 14일, 어느날 느닷없이 문교부 차관 발령을 받았습니다. 일생동안 영전운동을 해본 적이 없는 저에게는 뜻밖의 영광인데, 알고 보니 이 행운은 저와 국보위와의 인연 여덕이었습니다.

 제가 문교부에서 대학교육행정을 섭렵한 까닭에 국보위 교육개혁에 참여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전두환 위원장을 직접 보좌하고 개혁안을 브리핑하고, 그 분이 대통령으로 가신 후에도 그 연장선상에서 교육세 부활을 건의하고, 입법위원으로 문공위 간사로 일한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문교부 차관 교체기 때, 이규호 문교부장관(25대)께서 차관 후보 몇 명을 도표화하여 전 대통령 재가를 받으러 갔을 때도, 전대통령의 결단으로 제가 낙점되었습니다. 그 날자가 1981. 4. 13(월요일)이었는데, 그 때 저는 4월 10일(금요일)에 입법회의 폐막식, 11일(토)에 11대 국회 개원식, 12일(일) 옛 국보위 위원장들 모임 등의 일정으로 마무리 행사를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이규호 장관이 지참한 명단 중간에 정태수 후보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이는 초안에 없던 것으로, 김득수(金得洙) 총무과장이 주장하여 최종안에 끼워 넣은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 최종안 중간에 적혀있는 정태수 이름에 전대통령께서 줄을 긋고 결재싸인 하신 것입니다.

 전대통령은, 이에 앞서, 입법회의 운영위원장 이기백(李基百) 장군(뒤에 국방장관)으로 부터의 국보위 위원장급 후속 인사 건의를 받고, 그 중 한 사람인 저도 유의하고 계시다가, 문교차관 후보 명단에서 제 이름을 보고, 낙점한 것이니, 만약 초안에 제 이름이 빠졌더라도 대통령께서 제 이름 석자를 쓰고 결재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리하여 저의 문교부 23년 마지막은 전대통령 결재로 결실을 맺은 것 입니다.

 

 다섯번 째로 문교부를 졸업한 이후의 은혜들을 요지만 올려보겠습니다.

 문교부를 나오자마자 제 모교인 단국대학교 장충식(張忠植) 총장으로부터 교수직 선물이 도착하였습니다. 문교부에 드나들던 신방현(申邦鉉) 교수(뒤에 부총장)의 중재였습니다. 그 곳에서 영광스럽게도 동시 출강하던 서명원 장관도 매주 만나 뵈었지요.

 그러던 중 이규호 장관께서 저를 교원공제회 이사장으로 겸직하게 해주셨고, 이 시기에 이강희(李康熙) 주일 교토 교육관의 주선으로 대만 국립 중흥대학의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습니다.  또 진주사범 후배인 주일 손상철(孫相喆) 교육관의 주선으로, 일본 국립 쓰쿠바(筑波)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직학(職學) 쌍곡선의 노력이 수확을 걷은 시기였지요.

  일본 다녀온 후는, KEDI 강인수 박사(뒤에 수원대 교수)와 안 고려대 교수의 조력으로 대한교육법학회를 창립(1986년)하였고, 그 2년 뒤에는「교육법학 연구」라는 학회지를 창간하고, 그 창간사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쓰쿠바대학에 인도한 손상철 김용만 두 분과 박성우 마노 교수님의 은혜와 지도에 깊은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그 후 서명원 장관(28대) 때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이원우(李元雨) 과장(현 꽃동네대학교 총장)의 건의로 국정교과서 이사장에 보직된 행운도 감사 드립니다.

 

 여섯번 째 손성식 기획관리실장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공제회 이사장 임기가 아직 남아있는데, 갑자기 서울교대 학장(지금의 총장) 취임 권유가 오고 발령된 것입니다. 처음엔 사범학교 출신이고 초등교사 경력도 있는데다, 마침 일본의 교육학 학위를 구비했으므로 천거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권이혁 장관(26대)의 신임을 받고 있던 손성식(孫成植) 기획관리실장이 제 후임으로 부임한 것으로 보아, 손 실장이 저를 배려해서 마침 공석 중인 교대학장 자리에 영전시켜주고, 자기 자리도 만든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미 타계하셨으므로 이런 정담도, 고마움도 표하지 못하고 헤어져 안타깝습니다.

 그 일이 없었으면 그 뒤 8년간의 대진대학교 총장직으로도 이어지지 못했을지 모르며, 70살까지 공직생활을 이어가는 행운도 맞이하지 못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늦게나마 감사인사 드리며 명복을 빕니다.

 

 끝으로 우리 문우회와의 인연에 감사 드립니다. 허종갑 전 사학재단 이사장으로 부터의 연락을 받고 나갔더니, 그 회의에서 문우회 회장 감투를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가 실무적 운영책인자로서 박준열 김영희 등 동료들과 의논해서, 저를 제5대 회장으로 맞아들인 것이었습니다. 늘그막의 광영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함께 일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문우회보」를 창간(1999) 한 일 입니다. 창간사를 썼던 그 손으로, 34호에 이 감사의 글을 쓰고 있으니 참으로 감회가 남다릅니다.

 우리 문우회는 해마다 나오는 문우수첩으로 그리운 이름을 차례로 짚으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큰 행복감에 젖는 마음의 고향 입니다. 이런 글을 쓸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며, 문우 여러분의 문운을 비는 바입니다

 저는 지금 시조시인으로 약 10년간 활약 중이며 4권의 시집도 출판하였습니다. 이 또한 서울교대에서 인연을 맺은 강경호(姜慶鎬) 교수의 소개로 시조시인회에 들어 등단한 덕분입니다. 만년의 보람을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사주를 보면, 귀인을 만난다는 말이 있지만, 간 곳마다 귀인을 만나, 은혜를 입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귀인들 은혜를 다 갚지 못하고, 나이만 들어, 그 밖의 많은 분들 은혜도 다 기억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글 남깁니다. 혹시 이 글에서 빠진 일을 아시는 분이 저에게 귀뜸해 주시면, 감사히 개고의 자료로 삼고, 그분들께도 마음 속 감사인사를 올릴까 합니다.

 정태수 頓首. (2014.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