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사 기행> (16) 단종비의 시양자(侍養子) 정미수(鄭眉壽)
정 태 수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1441~1457)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된 후에, 단종의 복위운동이 생길 때 마다 단종의 지위를 하나씩 내렸다. 끝내 서인(庶人)으로 낮추었다가 사약을 내렸다. 단종의 왕후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 송비(宋妃) 의 신세도 마찬가지였다. 송비(宋妃)는 판돈영부사 송현수(宋眩壽)의 딸로, 열 네 살에 시집와서 왕비가 되었지만, 수양대군의 계유정란(1453. 10)이후 이름뿐인 왕비였다. 1년 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가자, 송 왕후도 태상왕비가 되었다. 다음해(1456) 단종이 노산군(魯山君) 으로 강등되니, 노산군부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단종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떠나자 청계천 다리에서 눈물의 이별을 하였다. 그 때, 잠시 작별인가 하여 서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였으나, 그것이 영원한 이별일 줄이야. 이때 생이별이 이승과 저승을 합한 영원한 이별이었다. 죽어서 묘까지 강원도 영월과 경기도 남양주 땅에 떨어져 있다. 후인들이 청계천의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 부른다. 한자로 「영도교(永渡橋)」이다. 이 당시 어린 왕과 왕후는 귀양이라도 함께 가고자 하였으나, 두 분의 합방으로 자식을 낳으면 후환이 염려되고, 또다시 왕위 다툼의 소란을 염려하여, 왕후를 따라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정순왕후(定順王后)는 열 네 살에 시집와서 열일곱에 이별하였는데, 그 해 단종이 사약을 마시고 돌아가셨다. 단종이 세조가 내린 독약을 마시고 청령포에서 죽자, 방치된 시신이 강물에 떠있는 것을 영월 사는 엄홍도(嚴弘道)가 수습하여 암매장해 둔 곳이 지금의 단종묘의 현 위치이다. 그 뒤 60년간 이 묘를 모르고 지내다가 중종 11년(1516)에 겨우 찾아, 봉분과 상석 표석 등을 갖추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복위되어, 장릉(莊陵)이라 이름 붙였다. 죽은지 240년 만의 왕위 회복이었다. 그간 정순왕후는 그 신분이 서인(庶人)으로 떨어졌다가, 또다시 관비로 떨어졌다. 지고(至高)의 자리에서 지하(至下)의 자리 노비 신분이 된 것이다. 후에 수양의 참모 신숙주(申叔舟)가 미모의 노비 송비를 자기에게 달라 했다가 거부당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혹자는 첩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하고, 혹자는 옛 왕비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처음 세조는 송비에 대하여, 노비는 신분에 한하고 사역은 할 수 없게 하라고 언명하였고, 후에 송비에게 거처할 사저를 주겠다하였다. 이에 송비는 단종의 넋이 있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서, 동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을 달라 하였다. 그래서 낙산의 옛 절터 정업원(淨業院)에 집을 지어주고 살게 했다. 옛날의 정업원은 원래 왕실의 과부들의 노후를 위해 세운 절이었다. 그 이름은 이승의 업을 정화한다는 뜻이 담겨있는데,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의 산 밑이다.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단종 사사(賜死) 소식을 들은 후에는, 소복 차림으로 산에 자주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보고 대성통곡하고 명복을 빌었다. 그리하여 그 산을 동망봉(東望峰)이라 한다. 곡성을 듣고 나중에는 주민들도 함께 슬퍼하여 울었다. 그 때 동정곡(同情哭)
단종 어진 유배지 청령포
장릉 (강원도 영월) 사릉 (경기도 남양주)
정순왕후는 10여년을 정업원에서 살던 중, 왕에게 정미수를 시양자(侍養子)로 삼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성종1년, 1469) 받았다. 정미수는 문종의 하나 밖에 없는 핏줄인 외손자이자, 단종과 정순왕후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생질이었다. 그래서 양자가 아닌 시양자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양자(養子)는 대(代)를 잇기 위하여 동성동본인 사람을 아들로 입양하는 것이며, 부득이하면 성을 바꾸어 입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경우엔 정미수를 단종의 아들인 <이미수>로 입양시켜야 한다. 이 경우 자형 정종이 무자식이 라 해주정씨 종가의 대를 끊게 되므로, 부득이 시양자로 삼은 것이다. <시양자>란 생전에는 부모처럼, 사후에는 한 대만 제사를 모시게 하기 위한 아들이다. 새 모자 관계가 탄생한 것이다.
시양자 정미수는 그 후 단종비 송씨를 자기 집 광은동(光恩洞) 부위궁(副尉宮)에 모시고가서 극진히 모셨다. 이후 단종의 위패에 매년 제사 지내고 송비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 후 정미수가 돌아가시자, 그 아들 정승휴(鄭承休)가 대신 봉양하다가 82세에 돌아가시니, 해주정씨 문중 묘지에 부인묘를 쓰고 3년상을 치렀다. 그곳이 지금의 사릉(思陵)자리에 있었던 해주정씨 종가의 종중묘역이다. 이 문중 묘지는 그 때 이미 5대의 11개 묘가 있었는데, 그곳 높은 곳에 정순왕후 묘를 모신 것이다. 이후 단종과 단종의 왕후 송비는 해마다 우리 해주 정씨 집에서 제삿날과 명절날에 제례를 지내왔다.
숙종 때(1698)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復位)되니, 송비도 정순왕후(定順王后)로 부르게 되었다. 이때 해주정씨 묘역이 모두 토지수용되어 사릉(思陵)이라 불렀다. 250년 만의 복권이었다. 정순왕후의 제례가 나라와 전주이씨로 회수될 때 까지, 온 세상이 다 잊어버린 단종애사(端宗哀史)의 주인공을 우리 정씨 문중의 정미수(鄭眉壽, 海平府院君) 이후 7대 동안 200여년의 봉양과 제사를 대대로 정성을 다해 받들어온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이 경연(經筵)에서 “정씨집의 장릉과 사릉 두 능에 대한 충렬은 사육신(死六臣)과 다를 것이 없고, 살아계실 때의 봉양과 그 후의 제사를 받드는 일은, 옛 역사에도 드문 일이다”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사람들은 해주정씨를 8대봉군가(八代封君家)라 칭송했는데, 5세 정종(寧陽府院君), 6세 정미수(海平府院君), 7세 정승휴(海林君), 8세 정원희(海寧君), 9세 정흠(海城君), 10세 정효준(海豊君), 11세 정식(海原君), 12세 정중휘(海興君)가 그분들이다. 한번은 4대째 봉사(奉祀) 현령공 정흠(鄭欽)이 꿈을 꾸었는데, 빛나는 구름이 대청에 가득 차며 붉은 깃발을 앞세운 젊은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집이 4대째 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는데도 그 은혜를 갚지 못한지라 이 구슬 다섯 개를 준다. 잘 심어 가꾸라”고 했다. 공이 묻기를 “이것이 무슨 구슬입니까”하고 물으니, 그 임금 왈 “계수나무 열매니라”했다. 공이 받아 품속에 넣고 꿈을 깨니, 방안에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 다음 정효준(鄭孝俊)대에 이르러 다섯 아들(植 謚 晳 樸 襀)이 다 대과에 합격하니, 세인들은 해주 정씨를 5룡가(五龍家)라 칭송하였다.
역경易經 , '곤坤'괘卦에 <積善之家 必有餘慶,積不善之家 必有餘殃(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넘치고, 불선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재앙이 넘친다)는 말이 있다. 천벌도 있었다. 수양대군의 모사 한명회(韓明澮)는 자기 딸을 둘이나 왕비로 만들었는데, 하나는 세조의 아들 예종비요, 또 하나는 세조의 손자 성종비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벌을 받았다며 수군거렸다.
한편 해주 정씨 묘역은 능으로 지정되자, 개인 묘들을 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지만, 왕명으로 5대 11대 묘를 그대로 두게 하고, 시사도 멀리서 망배(望拜)하지 말고, 산에 올라 원래대로 지내게 특별조치를 하였다. 지금도 사릉에는 우리 선대 산소가 그대로 있고 사릉 출입이 자유롭다. 그리고 왕실 후예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시행하는 사릉제(思陵祭)의 초헌관은 전주이씨 종친회가 하지만, 아헌관은 여산송씨종친회 측과 해주정씨종친회 측 대표가 해거리로 바꿔가며 맡는다. 나 역시 종친회장 당시에 사릉의 정순왕후 제례에 참례한 적 있다. 나는 항시 우리 가문과 경혜공주와의 인연, 정순왕후 시양자의 인연으로, 슬프고 외로운 단종 내외분을 극진히 모신 내력을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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