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14) 우리 왕고모, 예성부부인

김현거사 2012. 8. 22. 15:34

 

<가계사 기행> (14) 우리 왕고모, 예성부부인

                                                                                                                                정 태 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고모를 왕고모(王姑母) 또는 대고모(大姑母)라 한다. 그러면 까마득한 그 위의 고모는 뭐라 부를 것인가. 역시 다른 호칭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로 왕고모로 부를 수밖에 없다. 우리 가계에도 이렇게 왕고모로 불리는 분이 계신다. 그 주인공은 약 600년 전, 왕가로 시집간, 나의 18대조 정도공(시호 貞度公) 정역(鄭易) 할아버지의 장녀 정씨(1394~1470) 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17대 왕고모다. 족보에 딸과 사위 이름이 기재하는 곳도 있지만, 우리 족보에는 여자 이름은 안 나오고 사위이름만 나온다. 거기 이보(李補)라는 이름이 있다. 이보(李補)는 세종대왕의 중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1)이다. 나의 18대조 정도공은 효령대군의 아버지 태종과 사돈 간인 것이다.

정도공 할아버지와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고려 말 우왕 당시에 동방과거(同榜科擧)를 한 사이였다. 알다시피 이방원은 그의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공로가 큰 사람이다. 그가 은거중이던 고시 동기생 정역 할아버지를 불러내어, 조선 초기 벼슬길로 인도하고 사돈까지 맺은 것이다. 태종의 열두 살 난 둘째 아들 효령대군과 정도공의 열 네 살 난 장녀 정씨가, 태종 재위 7년(1407)에 혼인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왕고모는 왕가의 종친 벼슬로,  24세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29세에는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을 받았다. 예성부부인의 첫자, 예(蘂)자는 「꽃술 예」자로, 꽃의 암술과 수술을 뜻하는 의미 깊은 글자이다. 부부인(府夫人)은 1급, 최고의 벼슬이다.

효령대군은 위로 형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아래로는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있었다. 처음에 양녕이 세자(世子)로 책봉되어 14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의 행실로 보아 세자를 바꿔야 된다는 여론이 일고, 드디어 태종 18년(1418)에는 백관들이 양녕 '폐 세자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당시 왕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환란의 근본이 된다”하며 만류하였다. 이런 가운데 하루는 어전회의에서 태종이 결단을 발표한 것이다. “효령대군은 학문을 좋아하나, 성질이 심히 곧아서 모여서 함께 일처리 하는 것이 없다. 내말을 들으면 그저 방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은 효령이 웃는 것만 보아왔다. 충녕대군(나중의 세종대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라도 날까봐 두려워 밤에 글 읽는 것을 항상 금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큰 일에 건의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생각이 내 밖에서 나왔다. 실례로 중국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풍채와 언어동작이 두루 예에 부합하여,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한 줄은 알지만, 중국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충녕대군이 대위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 세자를 정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유정현 등 신하들도 “신들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하였다. 이렇게 임금과 신하의 의논이 정해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랜 번민 끝에 내린 엄청난 대 결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왕의 자리는 장남 양녕에서 차남 효령을 뛰어넘어, 3남 충녕으로 가고, 훗날 세종대왕이 탄생하게 된다.

 또 다른 기록에는, 효령대군이 글읽기와 활쏘기에 열심이었고, 공명과 부귀를 저버리고 초탈한 삶을 살았으며, 아우 충녕이 영특한 것을 알고 예민한 이 시기에는 자기의 자질을 숨기고 지냈다. 어느 날 부처님이 나타나 “너는 내 제자다”라고 한 꿈을 꾸고, 왕권계승의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산수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부왕에게 나아가, “부처님이 오셔서 신에게 ‘너는 바로 내 제자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을 부처님께 돌리려 합니다”하니, 정권계승의 뜻이 없음을 태종이 알았다고 한다.

 옛날 중국 주나라 태왕이 장남 태백과 차남 우중을 두고도 3남 계력에게 왕위를 양위하려는 부왕의 뜻을 알고, 형 둘이 삭발 ?(문신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양보한 일이 있다. 이 미덕을 두고, 후일 공자가 논어에서 논하되, 태백을 지덕(至德), 우중을 청권(청권)이라 칭송한 고사가 있다고 한다. 효령대군도 아우 충녕에게 성덕이 있음을 알고, 자기의 학문과 재덕을 스스로 숨기면서 왕위를 겸손하게 양보하시었다. 그래서 이 미덕을 충녕대군이  “형이 곧 청권”이라고 칭송하였고, 뒷날 영조도 사당을 세워주고, 또 정조는 그 사당 편액을 청권사(淸權祠)라 하여 임금 친필의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청권사는 지금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종회의 명칭이다. 그리고 그 사당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형 양령대군과 함께 왕위를 아우 충령에게 물린 효령대군은,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 하의 시퍼런 조선 초기임에도 유불조화론(儒彿調和論)을 들고 나와 불교에 심취하셨고, 효를 도덕의 기본으로 삼아 부모 은혜에 보답하는 교화사업에 진력하였다. 탑골공원의 10층 석탑과 보신각 종의 주조에 장기간 직접 감독으로 헌신하시고, 여러 사찰을 돌면서 시주하고 불사를 일으키었다. 특히 예성부부인과 함께 천안 광덕사(廣德寺)에 금과 은으로 쓴 화엄경과 법화경을 시주하고, <부모은중장수태골경합부 父母恩重長壽胎骨經合部>를 사경(寫經)해서 보내는 등, 불교진흥에 한평생을 바쳤다.

효령대군 영정 효령대군과 예성부부인의 묘

 

 생각해보면, 대군은 왕위와 속세를 버리고 나서 더 많은 복을 받은 분인 것 같다. 그 때 세자에 오른 세종대왕은 역사에 빛나는 큰일을 했지만, 병약한 몸으로 53세까지밖에 못살아 아쉽다 할 것이다. 그러나 효령대군은 91세 장수에, 63년간의 긴 부부 해로에, 6남1녀를 얻어 오늘날 전주이씨 각파 중 40만명이라는 최대의 후손을 거느린 효령대군파를 이루었다. 수복다남을 누린 복인이라 할 것이다. 사실 효령대군의 일생을 살펴보면, 태조 퇴위 5년 전에 태어나 90평생을 살아가면서, 13세에 태조 할아버지가 승하한 후로, 24세에 삼촌 정종을, 27세에 아버지 태종을 보내고, 그 이후로 55세에 아우 세종을, 57세에 조카 문종을, 62세에 종손 단종을, 67세에 장형 양녕을, 74세에 조카 세조를, 75세에 종손 예종을 다 보내고, 76세에는 78세인 부인 예성부부인까지 보낸 후에, 성종 때에 와서야 세상을 버리셨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 9대 왕의 구조우로(九朝雨露)를 초연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너그러운 일생을 보내셨다.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으니, 해주정씨 족보에 보면, 의성군(誼城君) 서원군(瑞原君) 보성군(寶城君) 낙안군(樂安君) 영천군(永川君) 원천군(原川君)의 여섯이 그들이다. 여기서 오늘의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총 40만 명이 나온 것이다.

 밖으로 향한 호방한 효령대군의 일생을, 안에서 빈틈없이 뒷받침 하고, 장차 40만 명의 기초가 될 6남 1녀를 기르는 큰일을 칭찬받으면서 해나가신 분이, 해주정씨 예성부부인이다. 그 분의 78년 평생과 63년간의 시집살이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효령대군파 종회가 발간한 「청권사」라는 소개서에 의하면, 「당대 대군 부인들 중에 으뜸이다. 왕실의 비·빈 맞이나 대군 공주의 혼례를 항상 주관하였다. 효령가(孝寧家)의 거대한 혈연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했다. 효순하고 현숙하신 조선왕실의 모범적 여성이었다. 부인의 유훈이 대대로 이어져 외손녀들이 왕의 비·빈이 된 자가 26명이나 나왔다. 후덕한 왕실의 어른으로서 부군 효령대군을 63년이나 내조하시다가 78세에 하세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왕고모 예성부부인은, 부군보다 한 10년 먼저 가시어 포천에 모셨다가, 뒤에 부군과 함께 서울 방배동 청권사 묘지에 왕릉처럼 합폄(合窆)하여 영면하고 계신다.

 해마다 효령대군을 기념하는 효령상이 문화부분 언론부분 사회봉사부분 효행부분으로 나누어 시상하고, 매년 후손들 300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효령기념관이 운영되고 있다. 왕위보다 더 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李) 왕가의 후손들에게 「해주정씨 할머니」는 그들의 복주머니로 거룩하게 남아있다. 효령대군 기신제(祈辰祭)는 음 5월11일에, 예성부부인 기신제는 음 8월 26일에 해마다 열린다. 대군 내외분의 춘향제(방배동)와 그 장인 정도공 정역 할아버지의 춘향제(여주)에는, 효령대군파 종친회와 해주정씨 대종친회의 임원들끼리 서로 해마다 교차참례하고 있다.

그런 연고로 지금도 해주정씨 후손들은 모두 예성부부인 왕고모 할머니를 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옷깃을 여미고 엄숙히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 해주정씨의 딸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 <당대 대군 부인들 중에 으뜸이시고, 왕실의 비·빈 맞이나 대군 공주의 혼례를 항상 주관하셨고, 효순하고 현숙하시어 조선왕실의 모범적 여성으로, 외손녀들이 왕의 비빈이 된 자가 26명이나 나오신> 그 분을 마음 속 거울로 삼아 본받고자 하는, 근본을 아는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