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가족사 기행> (10) 마지막 훈장

김현거사 2012. 8. 9. 17:11

 

<가족사 기행> (10) 마지막 훈장

                                                                                                                       정 태 수

 

  진주 까꼬실과 촉석루를 둘러보며 파란만장한 농포공의 일생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았다. 그리고 지나온  나의 일생도 되돌아보았다. 농포공은 혼군을 만나, 청렴강직한 성품 때문에 화를 입으셨지만, 그 분의 피가 흐르는 후손답게 나는 떳떳이 살았던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할아버지 학고공이 뿌리내린 땅 월아산(月牙山, 달음산) 아래 옛 동네 월아동(月牙洞, 달음이)을 찾아갔다. 거기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내 필명 월계(月溪)는  월(月)아산 계(溪)곡에서 생을 얻었기에 지은 자호(自號)이다.

 월아산의 토박이말은 “달음산”인데 진주시(옛 진주시와 진양군을 합한 현 지명) 에서 제일 높은 산(482m)이다. 달음산은 쌍봉과 그 두 봉을 잇는 역 포물선의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람하고 준수한 암수 두 봉은 유연한 능선으로 이어져, 이 고개를 ‘질매재’라 부른다. 말안장 길마에서 따온 사투리인 것 같다.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 덕분에 10분이면 넘지만, 옛날에는 10리를 오르고 10리를 내려가던 긴 고개였다. 월아산은 그 아래 금호琴湖 호수와 어우러져 그 속에 거꾸로 비친 산 그림자를 아우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으로, 진주 8경의 하나다.

월아산과 금호

 이 월아산 자락이 우리 집 현대사가 펼쳐진 산실이요, 조부님께서 직장인 서당 따라 옮겨 온 새 터전이다. 할아버지 학고공(鶴皐公, 鄭璿敎, 1856~1930)이  사셨던 시대는 험난한 역사의 격동기였다. 학고공은 다섯 살에 동학란을 만나고, 40 전후에 청·일전쟁과 대한제국이 생겼고, 50 전후에 러·일전쟁과 한·일합방을 당하는 험한 꼴을 보고 사셨다. 망해가는 나라에 50년 살다가, 일제강점기 20년을 살다 가신 것이다. 까꼬실에서  달음산 밑으로 이사 오시어, 말년 한 30년을 서당 훈장생활을 하셨다. 이 시기는 구한말부터 생겨난 신식학교가 일제 식민지교육이 터잡아가면서 더욱 제도화되던 시기였다. 서당식 구교육은 사라져가고, 사양산업으로 기울어가던 쓰라린 그 과도기에, 할아버지는 조선의 ‘마지막 훈장訓長으로 사셨던 것이다.

 바쁜 걸음으로 내가 태어난 땅, 나의 성지인 월아산 아래 할아버시 7언시에 나오는 월아모옥月牙茅屋이 있던 옛터를 찾아보니, 그곳은 남새밭으로 변해 있었다. 월아산과 언덕 사이 산기슭에 길고 구부정한 개울을 이룬 그 옆의 아늑한 땅에 세워진 초옥 한 채, 거기가 내가 고고의 첫 소리를 외친 곳이다. 그 앞집 문패를 보니 ‘달음산로 53번길 62’라고 씌어있었다. 허전한 맘 같아서는  앞으로 이 땅을 사들여 출생지 기념비 하나 세우고, 독서실도 열어 동네사람 찾는 곳이 되게 하고 싶었지만··· 글쎄다.

  100여년 전 초옥 풍경을 그려보았다. 할아버지는 여기로 이사 오시자, 옆 동네 호숫가 숲속의 서당에 매일 출근하고 한시漢詩도 짓고, 할머니는 흐르는 개울물을 퍼서 밥 짓고, 아버지 4남매는 그 속에서 자랐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리’를 읊으신 가난한 옛 선비의 집에서 하루 세 끼 연기는 끊이지 않고 잘도 피어올랐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넉넉한 창원의 해주오씨 집에서 어머니가 소를 몰고 새 며느리로 시집오고, 미인처녀 큰 고모는 지수면 재령이씨 약국댁에 시집 가고, 작은 고모는 행세깨나 한다는 반성면 진양정씨 댁에 각각 시집갔다. 숙부는 우리 가문 최초로 신식교육 받으러 금산보통학교에 십리 길을 오가고....그런 속에 얼마 후 어머니가 첫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가 바로 나다!  태몽은 어사화御史花 를 쓴 나를 태운 말을 숙부가 몰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차관과 대학 총장을 거쳤으니, 태몽이 마냥 틀린 것이 아니란 생각도 든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할아버지 3년상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가계家系를 이을 장손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적적하던 자리에 새 손자가 소리치고 나타나니, 할머니의 기쁨은 얼마나 크셨을까. 할머니는 자주 “너는 할아버지가 다시 태어난 아이다”라고 나에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우리 집안은 대단한 양반 집안이다. 너의 할아버지는 아주 훌륭하신 학자이시다”란 말씀을 입에 달고다니시었다. 그 바람에 어린 나는 가문에 대한 우쭐우쭐한 자부심을 지니고 자랐다. 할머니의 유난하신 손자사랑이 지금도 느껴져 온다.

 

    억 새 꽃

 

1. 한들한들 억새꽃에 할머니가 겹친다 

하아얀 치마 적삼, 곱게 빗은 백발하며… 

장독에 정화수 떠놓고 손 모아 비시더니.

 

2.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새끼-새끼야”

토닥이던 추임새에 우쭐 우쭐 자랐지

억새가 가슬거린다 산소라도 가뵐까.

 

 

  할머니의 시가자랑 양반자랑과 훌륭한 할아버지 자랑은 어린 나에게 믿음으로 굳게 자리 잡고,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일찍부터 숙부님에게 할아버지가 쓰시던 서당 교재와 7언 시들을 달라고 졸라서 인계 받아, 나는 그 후 부산 서울의 객지 땅을 옮겨 다니면서도, 이 유품들을 빈번한 이사철마다 직접 싸들고 다니며 평생 소중히 보관해왔다. 그리고  환갑 넘어서 그 어른을 추모하는 세 가지 사업을 실행에 옮겼다. 그 하나는 유고를 정리하여 1999년 할아버지 유고문집 「학고집(鶴皐集)」을 발간한 것이다. 나의 마지막 공직인 대진대학교 총장 시절 8년간에 교수들 도움을 받아가면서 이룩한 사업이다. 학고집의 저자 이름은 가신지 60년이 넘은 할아버지 이름으로 하고, 간행위원장은 그 당시까지 살아계셨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제자 성환덕(成煥德, 성균관 전의) 이름으로 국역 출간하였다. 그 둘은 자손들에게 타이르는 계자훈誡子訓이란 짧은 훈시의 원문과 이를 번역한 나의 시조 한 수를, 지리산에서 사온 돌에 새겨, 할아버지 묘소 옆에 세운 것이다. 이 계자훈誡子訓은 우리집 가훈이니, 자손들이 두고두고 묘역을 참배할 때마다 읽어보도록 설치한 것이다. 그 셋은 할아버지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서당이 있었던 금호琴湖 호수 가에 세운 일이었다. 우국시비 이야기는 다음 차례로 미루고자 한다.

 

 

 

 

 

 

 

 

 

산소 옆에 세운 계자훈비

 

 誡 子 訓 (자손들에게)

 

一日之計 在於寅 寅起端坐 하루의 계획은 새벽 인시에 있으니,인시에 일어나 단좌하여,

 先念謹言 詳審戒忿怒 먼저 말 삼가기를 생각하고, 계행과 분노를 깊이 살핀다면,

三件事 日日無咎 이 세가지 일이면 하루가 무탈할진저.

                                                     1927 鶴皐 鄭璿敎 2004 嗣孫 泰秀 근역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