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인연은 아름답다>

김현거사 2016. 10. 11. 22:14

       <인연은 아름답다>

 

 세월은 물처럼 한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지만, 사람에게 물 속의 진주처럼 아름다운 인연을 맺아주고 간다. 어제 정태수 총장님 전화를 받았다. 익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세종문학상 대상 수상과, 본인의 세번째 시조집 <산이 벙긋 웃는다>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전화였다. 총장님은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시조를 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학창시절에 시조를 가르키신 국어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그 분 덕택으로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 같은 시조를 두루 외웠다고 한다. 그 뒤 문교부 차관, 서울교육대 총장, 대진대 총장 등 공직에 있으면서도 시조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아, 이번에 세번째 시조집을 내게된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총장님은 나와의 통화에서, 그날 수상소감이 길어질까봐 한가지 정말 하고싶은 이야기를 뺀 것이 아쉽다고 했다. 정작 본인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준 김성봉 선생님 이야기다. 아버님 덕분에 첫번째 시조집 <불씨를 살려라 아이누야>와 두번쩨 시조집 <어디서 내가 왔나>를 썼던 것 같다고 했다. 첫번째는 아이누의 역사를 대서사시로 읊은 것이고, 두번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방대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 내 존재 위치를 읊은 것이다. 모두 역사의식에서 출발한 시조다. 총장님은 아버님의 명강의에 이끌려 역사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이 첫번째 두번째 시조집을 낸 것 같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행정고시 당시 역사과목에서 거의 만점 성적을 얻어 합격하신 것도 아버님 덕이라 했다. 그냥 은사가 아니라 일생의 은인이라 했다. '선생님 저 정태수가 시골에 묻혀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학생시절부터 아끼던 제자였다. 진양군 교육감이시던 아버님은 당시 흔쾌히 부산으로 발령내 드렸다고 하다. 그후 부산서 고시에 합격한 정총장은 상경하여 문교부로 들어가 세칭 문교부 내 <진주마피아의 대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교부 인사담당 시절에, 과거 국어를 가르키신 은사님은 진주 교대 초대 학장으로 임명하여 은공을 갚았는데, 막상 김성봉 선생님께는 도리를 못해드린 것 같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아버님 생존시에 정태수 총장, 정희채 차관, 박창남 우르과이 대사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내신 아버님의 자랑스런 제자들 이다. 정희채 차관은 그림에 조예가 깊어 고성국민학교 재직시 아버님 초상화를 직접 그려보낸 적 있다. 진사 제자들이 헌증한 아버님 자서전에서, 해방 직후 진사와 진농의 살벌한 학교 싸움을 말리기 위해 죽창과 쇠스랑으로 무장한 진농 교정에 가서 웅변으로 학생들을 설득하여, 오히려 진농 대표가 진사로 찾아서 사죄하여 마무리 시킨 무용담을 쓴 적 있다. 당시 목슴 걸고 아버님을 수행한 학생은 정희채 정구현 두분 이다. 현재 진주 노인대학 학장인 정구현 선생님은 행동파다. 아버님이 안양에 은거해 계실 때, 동창들 성금을 모아 몇번인가 찾아오시기도 했다. 그 밖에 엘지 회장 구자경, 경향신문 편집국장 김경래, 외교관 박건 선생님도 아버님이 아끼던 제자다. 간혹 전화를 하고 만나시기도 했다. 내가 수지로 이사와서 곁에 사시는 정태수 총장님을 점심에 초대한 적 있다. 그러나 미금역에서 만난 이날 식사는 정총장님이 내셨다. '내가 오늘 김선생을 대접한 것이 아니고, 내 평생 가장 존경하는 은인의 아드님을 대접한 것이니 양해 하시오.' 정총장님 말씀이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두 분 남강문후회 회원과 일년에 네번 정총장님과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하는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총장님은 시조를 쓰고 나는 수필을 쓴다. 그래서 남강문학회 막둥이 회원으로 십년이나 년하인 나를 글벗이라 불러 준다. 총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우리 부부는 욕지도를 거쳐, 쌍계사 달빛초당 여행을 한 적 있다. 욕지도와 지리산에서 교장으로 은퇴한 선생님 제자분을 만나, 말 그대로 산해진미를 대접 받기도 했다. 나는 세월 속에 더 청청하고 푸르시라고 소나무 분재 한 그루를 총장님 거실에 놓아드린 적 있다. 이 어찌 속절없이 사라지는 세월의 물흐름 속에 그려진 한 아름다운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자 서문

 

 지금 90을 바라보는 세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일제 치하를겪었고, 해방이 되자 바로 6.25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었다. 전쟁으로 남한의 군관민 사망자는 52만 여명이었고, 부상자는 94만, 실종자는 43만명이었다.

 나라는 남북으로 두동강 났고, 전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산업은 피폐화 되었다. 한의 1인당 소득은 136 달러였으며,  당시 영국의 한 기자는 이런 우리나라를 '쓰레기통에서 장미는 필 수 없다'고 보도했다. 

 

 나는 해마다 봄철 '보리고개'가 오면 산에서 초근목피를 벗겨먹던 주변 사람들이 아사하는 그런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성장했고, 사회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후 우리나라가 7차에 걸친 경제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진입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나는 시골의 가난한 학자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농토를 따라 이사 다니는 부모님 따라,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사범학교를 다녔으나 동가식 서가숙이나 다름없었다. 주경야독으로 어렵게 학교를 졸업한 후에, 초등학교 교편에서 시작해서 문교부 차관을 거쳤으며, 서울 교육대학과 포천 대진대학 총장을 지냈다.

 

 칠순 중반 넘고나서 시조시인이 된 후 글 쓰는 문인들과 교류하던 중, 더러 나에게 지나온 일생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곤 했다. 파노라마 같은 이나라 역사의 흐름을 몸소 겪었고, 특히 교육이라는 외길 인생을 겪었으니 개인으로나 국가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래 스무 살부터 일흔 살까지 50년을 주경야독으로 휴식 없이 걸었으니 기력도 다 소진된 기진맥진 한 상태이고, 이젠 눈도 침침한데다 기억력도 흐릿하고 희미하지만, 그래도 살아오면서 나를 도와준 분들, 나를 가르켜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피력해야겠다는 뜻에서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이라 한다.

한조각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몇 자 글을 남긴다.  

 

 2016. 10. 31 

 정 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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