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총장님

(8) 북관대첩비 반환 시동기의 회상

김현거사 2012. 7. 28. 12:39

 

<가계사 기행> (8) 일본서 반환받아 모셔온 북관대첩비

정 태 수

 

 내 생애의 보람있던 일 중의 하나는 일본이 그들의 야스꾸니 신사에 숨겨놓았던 북관대첩비를 찾아서 국내로 모셔온 일이다. 이 대첩비의 비문에는  임란시 가등청정의의 왜군을 상대로 7전7승의 대첩을 이룬 농포공의 함경도 의병활동이 새겨져 있다. 일본은 한국의 이 대첩비가 좀 곤란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7승 전패에 모종의 모욕감을 느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몰래 일본의 한 신사에다 옮겨다가 숨겨놓았다. 그것을 내가 알고 대첩비 반환 문제의 첫 시동을 걸자, 처음에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피하다가, 결국 우리 정부가 나서고, 북한 당국과 어렵게 공동 협의문까지 만들어 압박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반환을 수락한 것이다. 이 북관대첩비는 남북합작으로 해외 문화재 국내 반입에 성공한 첫 케이스이다. 조상의 비석을 찾아온 자부심과 보람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자주 농포공의 위국충정과 희생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농포공 이야기는 우리 후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거룩한 신화였다. 내가 소학교 저학년 시절 이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로부터 농포공의 비가 일본 동경의 상야(上野) 공원(장소는 와전이었다)에 있더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나는 그 비가 무슨 비인지는 잘 몰랐다. 다만 조상님의 거룩한 비석인 것 같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런데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비석의 첫 소식이 나에게 들려왔다. 문교부 사회교육국장 당시였다. 1978년 연초, 어느 날 갑자기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崔永禧 선생의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여보 정국장, 당신 할아버지 비를 찾았답니다. 방금 동경서 최서면崔書勉씨 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어제 아침에 아들 데리고 산보 나갔다가 야스쿠니 신사에서 조선비 같다 싶은 것이 있어 자세히 보니 북관대첩비였대요.”

최서면 선생은 나와 업무상 오랜 연관이 있는 분이다. 당시 동경 한국연구원장으로 활동 중이어서 해외 교포 교육 해외연구비 보조 등을 취급하는 우리 국과 공무상 긴밀한 관계에 있던 분이다. 최영희 위원장도 간혹 만나던 분인데, 어느 술자리에서 내 마음을 주체 못해 농포 할아버지 자랑을 한 일이 있던 터라, 이런 전화가 온 것이다. 나는 즉시 일본의 최선생께 전화로 상세한 내용을 물었고, 얼마 뒤 1978년 4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이 북관대첩비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 되었다. 

 나는 해주정씨 대종친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급히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을 개시하였다. 종친회장 정채섭(鄭采燮, 13세손), 종손 정규섭(鄭奎燮, 13세종손) 정태수(11세손), 3인 연서로 문화공보부장관 앞으로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탄원 내용은 그 비의 주인공 정문부 장군의 후손이 모두 진주에 살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를 내린 사액 사우인 충의사忠義祠가 건축 중 이니, 그 비를 반환 받아 진주에 옮겨 세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원래 문화재는 복원시 원 위치 복원원칙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후손에게 돌려주어 충의공 사당 앞에 세우게 해달라는 탄원이었다. 이 청원은 정부에서 주일 한국 대사관을 거쳐 일본 외무성에 도달되었다. 주일 한국 대사관에는 교육관실(문교부 문화부 사무 분담)이 있다. 그 수장이 황철수黃哲秀 교육관(뒤에 국회의원)이었다. 그 분 협조로 이 탄원서의 처리경위를 내가 확인 할 수 있었다.  일본측은 대첩비 반환에 이유를 걸어 반대하고 있었다. 그 비의 원 위치가 지리적으로 북한이니, 복원 원칙대로 비석이 갈려면 북한으로 가야지,남한에 비를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친회 입장은 대첩비는 일본에서 찾아와야겠지만, 남북이 왕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에 넘겨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러니 반환 전망은 사실 어려웠다.

 그 후 나는 대학교육국장으로 옮긴 뒤, 일본에 간 기회에, 일본 문부성과 외무성을 방문하였다. 직접 반환교섭의 운을 떼어본 것이다. 우리 문교부와 일본 문부성文部省은 해마다 2~3명씩 상호초청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나는 이 시찰단에 끼어 도일하여 그 일정 속에 틈을 내어 홀로 일본의 해당 당사자를 만났다. 먼저 일본 외무성 아주국장을 방문하여 의병장 사당 옆에 세울 것이니 대첩비를 반환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용건은 방문 전에 미리 통보되어 있었으므로 답은 이미 준비된 형식적인 것이었다. 거절이었다. '일본은 한국 보다 정부 힘이 약함을 이해해 달라.' '정부가 법인이나 개인 재산의 양도여부를 함부로 결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 (靖國神社) 방문은 정중히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주국장은 외무성 사무관 한 사람을 앞에 태운 외무성 귀빈용 자동차를 내 주었다. 그걸 타고 야스쿠니 신사엘 도착하여,  그 곳 부사장副司長인 콩쿠지(權宮司, 야스쿠니의 부사장, 사장은 宮司)를 만났다. 대담은 장시간이 걸렸다. 내 마음 속에는 강탈해간 비를 당연히 조속 반환해야 한다는 기본 바탕이 깔려 있었다. 대첩비의 주인공인 의병장 농포공 후손과 비석을 노략질해간 절도범의 후손이 마주한 자리였다. 상대편은 장시간 내 말을 들으면서 나의 말투가 마음에 안들었던 것 같다. 불만스런 투로 “우리가 70년 동안이나 보호 보존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내어 놓으라고만 하십니까?” 하였다. 참으로 일본인다운 얄미운 반격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을 표할 자리인가. 두 사람의 대화에는 간극과 꼬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결국 권궁사는 자신을 한국에 초청해 주면, 비 세울 곳에 가본 후에 검토해서 대첩비를 돌려 드리도록, 노력은 해보겠다는 극히 외교적인 언사로 이야기를 끝내고 말았다. 얄미운 강아지가 생선을 물고 마루 밑으로 들어간 격이다. 

 그날 찾아본 북관대첩비는 참으로 후손으로서 참괴함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너무나 초라하게 모셔져 있었다. 신사 정면에서 우로 또 우로 꺽으면 2층짜리 비둘기 집이 있고, 그 옆의 나무 숲 속 어두컴컴한 담 옆 숲이 있다. 그 속에 서 있었다. 비신碑身만 빼앗아 갔던 것이라, 일본 현지의 모양 없는 돌로 비대碑臺를 받치고 비모碑帽가 씌워져 있었다. 거의 방치되어 비들기 똥을 둘러쓰고 있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비석 앞에 엎드려 재배하고 비를 만져 보았다. 동행한 콩쿠지가, “나는 소년시절 조선 서울의 조센신궁(朝鮮神宮) 사제직司祭職 으로 수년간 근무한 일이 있다. 신궁 사제직이 쓰는 모자와 입는 옷은 옛날 조선옷(도포)에서 배워온 복식으로 생각된다. 지금 정국장이 절하는 걸 보니 우리 사제들이 신에게 절하는 것과 거의 같다”고 말하였다. 이 비는 훨씬 뒤에사,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와 사진을 찍어 가고, 그 모셔진 상황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꿇자, 음습한 자리에서 자리를 옮기고, 각목으로 덮개를 질러, 겨우 수모를 면했다.

 

 

 

 

 

 

야쓰쿠니의 북관대첩비 조소앙선생(상) 최서면선생(하)

 

 

 최서면씨가 야스쿠니신사를 찾아가, 이 비를 발견한 경위는, 구한말 동경 한국인 유학생회 잡지인 대한흥학보 제5호(1909년 7월)에 소해嘯海라는 아호를 써서 게재한 조소앙(趙素昻, 본명은 趙鏞殷)선생의「함경도 임진의병대첩비문」이란 제목의 글을 본 데서 비롯된다. 조소앙 선생은 야스쿠니 신사 후원에 북관대첩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이 비의 원문을 전문 소개하면서, 오호통재라며 통탄의 소감을 적었다. 선생은 당시 조선이 합병되기 직전 일본 유학생으로 이 전승비를 보고 탄식의 글을 쓴 것이었다.

조소앙 선생 다음으로 이 대첩비를 찾아본 제2 발견자는 익명의 이씨라는 분이다. 1926년의 동아일보 기사(9월 19일자)에는, 그 해 9월 16일에 이씨(李生이라 익명)라는 분이 야스쿠니 신사엘 가서 북관대첩비를 확인하고 자세히 보려다가 일본 헌병에게 금지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이 비석 옆에 나무비가 있었는데, 「이 비에 대첩이라 했지만 사실과는 전연 상반되니 이 비를 믿지 말라」고 야스쿠니 신사 측에서 써놓았다고 한다. "임명臨溟에 있던 비를 음취陰取해다 야스쿠니에 갖다 놨기에 이를 널리 알리는 바이니 모두 기억해두자"고 써 있었다고 한다. 이 목비는 그 뒤에 없어져 더는 그것을 본 사람이나 그 흔적은 없다. 그러나 '임명臨溟에 있던 비를 음취陰取해다 야스쿠니에 갖다 놨다'는 그 말은, 그들이 대첩비를 훔쳐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씨는 이 소중한 비가 일본에 의해 혹시 없어질까 봐 안타까워 한국 사람에게 알려 달라고 동아일보에 호소했던 것이다. 이 비석의 첫 발견자는 조소앙 선생이고, 두번째는 이씨, 세 번째 발견자는 최서면 선생이다. 

 

 여하간 북관대첩비 소식이 국내 신문에 보도 되자, 1980년대 중엽부터 잇따라 광주, 부산, 이북5도청(함북지사와 길주군민)의 반환운동, 한일 불교계의 반환운동 등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나도 참여하여 많은 인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첫번째는 삼중스님을 만난 일이다. 1990년에 삼중三中스님(재일본 한국 문화재와 귀무덤 초혼 행사 등의 많은 일을 한 스님)에게 반환운동을 제안하였더니, 스님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본 불교계와 연결하여 추진하겠다면서, 아주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날 때는 마지막 수단으로 밀반입이라도 해보겠다는 열의를 보였다. 참으로 단호한 분이었다. 나는 스님의 열의에 감사하긴 했으나, 밀반입은 도중에 분실되거나 수몰될 가능성이 있어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번째는 대첩비 반환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본 일이다. 1990년대 어느 날 나는 독립기념관 관계 국사학자들을 만난 적 있다. 그들은 나에게  “정 총장, 왜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은 하는 거요? 안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그 대첩비가 일단 한번 반환 되고 나면, 그 한때 왁자지껄하다가 그 후에는 뉴스거리도 안 되고 관심도 사라지니, 그냥 거기 두고 1~2년에 한 두 번씩 세계에 선전되게 하는 것이 이를 알리는 데는 더 효과적이 아닌가요. 동경은 우리 현관이요 세계의 요지 입니다. 거기다 둔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네, 일본이 러․일 전쟁 때 남의 나라 문화재를 강탈해 여기 세웠네 하고 자꾸 들먹거린다면, 그게 더 그 비석이 살아서 생동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가요.?” “또 반환되어 한국에 있으면 그래도 다행이겠지만, 원위치인 북한으로 가버리면 아무도 못 보고 연구도 끝나고 묻혀버리는 것 아니요?” 이 말들은 일면 옳은 말이기도 했다. 남북이 꼭 닫힌 지금 일본에 가기보다 오히려 북한에 가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런 대화가 있은 후, 나는 대첩비 반환이 이로운가 해로운가 하는 회의감에 빠져 시일을 보낸 적도 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서울의 모 인사들이 일본의 승려 가끼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과 연대하여 반환운동을 추진한 적도 있다. 마침 내가 우리 대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던 때여서 소극적인 협의에만 응한 적이 있었는데, 끝에 가서는 서울의 몇 사람이 가끼누마 스님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자 벌인 소동으로 판명났다.

그러다가 초산樵山스님이 나서서 반환운동이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초산스님과 카키스님,한․일의 두 스님이 카운터 파트였다. 두 스님은 의정부 송산의 충의공 묘전에 와서 참배하고 발대식을 가졌다. 이전과 다른 점은 그 후에 정치인과 정부(문화재청,통일부)가 나서서 해방 60년 기념사업의 하나라면서 반환운동을 추진한 점이다. 그러나 후손으로서 아쉬운 점은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 일본에서 애써서 받아온 것은 좋으나, 그것을 북한에 굽실굽실 넘겨준 점이다. 이들의 의도가 국보반환이 목적인지, 정치거래가 목적인지, 후손의 마음 편치 않다.

그리하여 200510월 20일, 북관대첩비가 인천국제공항에 내렸다. 일본군에 빼앗긴지 꼭 100년만의 환국이었다. 나는 다음날 10월 21일 의병들의 눈물과도 같은 비를 맞으면서 국립중앙박물관 고유제에 참석하였다. 쏟아지는 그날의 빗줄기는 고유문을 듣고 있는 충의공과 함경도 의병들의 영혼이 기쁘고도 서글픈 눈물인 듯하였다. (계속)

'정태수 총장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왜 민립비인가  (0) 2012.07.31
(10) 농포공 영정 제작의 체험  (0) 2012.07.31
(7) 촉석루에 오르면  (0) 2012.07.26
(9) 홀로 남은 우국시비  (0) 2012.07.19
8) 마지막 훈장訓長  (0) 201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