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불랑카
나이 들어 해외여행 갈 힘도 없지만, 카사블랑카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 거기 '릭의 카페(Rick's cafe)'에 가서 위스키 한 잔 하면서 '세월이 흐르면(As Time goes by)’을 피아노 곡으로 들어보고 싶다.
'하얀 집'이란 뜻을 가진 카사불랑카는 아프리카 북단에 있는 항구도시다. 2차 대전 때 미국행 비자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거점이다. 파리가 독일에 점령된 1940년, 망명객, 반나치주의자, 피난민, 각국의 간첩 등이 몰려 있던 프랑스령 모로코의 항구도시 카사블랑카에서 리스본 행 여행증 얻으면 나치 치하를 벗으나 미국으로 갈 수 있다. 사람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미국 갈려고 결사적이다. 레지스탕스와 게슈타포의 대립이 심해, 경찰은 검색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을 벽에 세워놓고 총으로 즉결처분 하던 그런 시절이다.
그 카사불랑카에 미국인 릭(험프리 보가트)이 운영하는 유명한 카페가 있다. 여권 매매와 도박 전문 카페다. 주인 릭은 겉은 차급고 냉소적인 사업가지만 내면은 따뜻한 사람이다. 비자 마련을 위해 도박장에 와서 룰렛으로 돈을 몽땅 날린 젊은 청년이 있었다. 프랑스인 경찰서장 르노는 그 청년의 부인에게 자길 찾아오면 도와줄 방법이 있다며 유혹한다. 그를 본 릭은 룰렛 담당 부하에게 룰렛을 조작하도록 지시해 그 남자가 돈을 벌게 해준다.
그 카페에 어느 날 반 나치 조직의 리더인 라즐로와 그의 부인 일자(잉그리드 버그만)가 나타난다. 라즐로는 나치 수용소를 탈출해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레지스탕스 지도자다. 함께 나타난 일자는 우아하고 고귀한 기품을 지녀 모두의 시선을 끄는데, 카페 피아노 연주자 샘을 보고 깜짝 놀란다. 전에 빠리에서 사랑했던 남자의 카페에 있던 연주자였기 때문이다. 일자는 샘에게 닥아가 '세월이 흐르면'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한다. 샘은
'그를 내버려둬요. 당신은 그에게 불행을 안겨줘요'
하면서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일자가
'부탁해요. 샘, 'As Time Goes By'를 연주해줘요.'(Play it, Sam. Play 'As Time Goes By')
하고 부탁하자, 샘은 나이 들어 그 곡을 잊어버렸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일자가 그 노래를 험잉하며 간곡히 부탁하자, 피아노를 치며 흑인 특유 음성으로 노래 부른다.
'이 곡 연주하지 말랬잖아!'
그때 릭이 나타나 샘을 저지하다가 일자와 눈이 마주친다. 둘의 엄청난 감회가 교차된다.
사람마다 평생 살면서 그 노랠 들으면 가슴 몽클해지는 어떤 곡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곡이 있다. '파란 물이 잔잔한 호숫가에 어느 날....' 고향이 거제도인 어떤 여선생이 남해 상주 해수욕장에서 불러준 김하정의 '호반에서 만난 사람'이란 노래다. 지금도 그 노랠 들으면 50년 전 상주 해수욕장의 파도가 잔잔한 물결이 되어 그립게 닥아온다.
어쨌던 릭과 일자는 빠리에서 어떤 사이였을까. 릭은 어떤 가슴 아픈 사연 있길래 그 곡을 연주도 못하게 했을까. 릭은 라즐로가 미국 행 여권을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해도 팔기를 거부한다. 라즐로는 '파란 앵무새'란 업소에 가서 비자를 구하려 하지만 주인은 '우가트가 잡혀갈 때 통행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독일군에게 빼앗은 통행증은 릭에게 있다고 알려 준다.
릭은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빠리 시절을 회상한다. 일자와 만나던 일, 독일군이 빠리에 입성하자 둘이 빠리를 탈출하자던 약속, 그러나 같이 파리를 탈출하기로 약속했던 역에 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리쳐드! 당신과 같이 갈 수도,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이유는 묻지말고 내 사랑만 믿어줘요, 신의 은총을 빌며...' 빗물 젖은 일자가 보낸 마지막 쪽지만 손에 줘여져있다. 비를 맞으며 홀로 기차를 타고 떠난 일. 그 모든 추억이 가슴을 뒤흔든다. 슬픈 회상에 잠겨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릭을 일자가 찾아온다. 그러자 릭은 '라즐로 때문에 자기를 버렸냐?고 다그치고, 일자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뜬다. 그런데 릭이 자기 방에 올라가자, 거기 일자가 서 있다.
'한 여자에게 상처 받고 온 세상에 복수하는군요, 당신이 마지막 희망이예요, 당신이 돕지 않으면 그는 죽어요.'
'그게 뭐 어때서? 나도 여기서 죽을텐데, 죽기엔 여기가 괜찮은 장소지.'
일자는 릭에게 여권을 부탁하고 릭이 차급게 거절하자, 권총을 릭의 가슴에 겨눈다. 일자는 라즐로가 수용소에서 탈출하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여 릭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릭과 역에서 만나기 직전 라즐로가 상처를 입고 살아서 숨어있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릭을 사랑하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힌다. 그리고 결국 둘은 뜨겁게 포옹한다. 일자는 릭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했으므로 헤어져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릭은 라즐로에게 일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생각하여 둘을 비행기에 태워보낼 결심을 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릭이 자기 카페에서 라즐로에게 통행증을 건네려 할 때 숨어있던 르노 경찰서장이 나타나 체포하려 하지만, 릭이 총으로 위협해 공항으로 향한다. 안개와 비에 젖은 비행장 에서다. 일자는 비행기 트랩 앞에서 릭과 리스본으로 가는 줄 안다. 그러나 릭은 일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의 일부고 그를 지탱시키는 힘이야. 당신은 라즐로와 함께 당신이 속한 곳으로 떠나!'
이 대사 이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 표정 처리가 이 영화를 불멸의 고전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릿 버그만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릭은 뒤늦게 라즐로를 체포하려고 비행장까지 뒤쫓아온 독일군 슈트라서 소령을 사살하고, 잠시 후 일자와 라즐로를 태운 비행기는 활주로 위를 날라간다.
영화 ‘카사블랑카’는 1942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흑백 영화의 진수로 꼽힌다. 2007년 미국 영화연구소 선정 100대 영화다. 초기에 릭의 역할은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이 캐스팅될 뻔했지만 무산되고 험프리 보가트가 그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험프리 보가트를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캐릭터가 릭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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