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예정 글

고향의 꽃

김현거사 2018. 8. 4. 09:59

  

   고향의 꽃

 

 진주시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마당은 꽃동산 이었다. 봉선화는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 손톱을 모두 빨갛게 물들였고, 달리아는 달덩이만 했다. 빨강 노랑 채송화는 아침마다 새로웠고, 문 밖에 하얀 탱자꽃이 피어있었다.

 

 서울 올라와서 딴 꽃을 만났다. 첫번째가 라일락이다. 향기 좋은 보라빛 라일락은 서울 여학생들처럼 세련된 꽃이었다. 캠퍼스 라일락 벤치 옆에 허리 구부정한 늙은 사진사가 있었다. 늘 어린 딸을 데리고 다녔는데, 동문인 아내와 결혼한 후 갔더니, 노인은 더 늙고 초라해졌고, 딸은 처녀가 되어있었다. 그때 촬영한 사진이 40년 내내 내 서재에 걸려있.

 

 불교신문 기자 때 또다른 꽃을 만났다. 백운(白雲)스님께 난을 배웠고, 원고청탁차 찾아간 사당동 미당선생 뜰에서 파초와 국화를 배웠고, 동승동 이희승 선생댁에서 오동꽃 향기를 배웠다. 향기 고결한 오동꽃은 그걸 와이샤스 주머니에 넣어가서 선물한 총각을 국학대학 이기영 학장 여비서와 데이트 하게 만들어주었다. 문필가들의 꽃도 배웠다. 도연명은 국화, 주렴계는 연꽃, 소동파는 대나무로 유명하고, 신흠과 퇴계선생은 매화로 유명하다.

 

 아내 모교 이화여고는 장미가 유명하다. 우리는 서울의 유명한 장미원 안가본데 없다. 종로5가 노점, 상일동, 파주를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다녔다. 백장미, 노랑장미, 피스장미 등 우리집 장미는 모두 명품이었다. 서울 생활 40년 동안 주택 아파트 빌라 할 것 없이 1층에만 살았다. 모네처럼 연못 만들어 수련 키웠고, 미국의 타샤튜더 할머니처럼 차 마시며 지기달리스꽃 감상했다. 베란다에 분재 키우고, 관음죽 천리향 키웠다. 양재동 꽃시장에는 40년간 알고지낸  여인이 있다. 새댁 때 종로 5가 노점에서 매화 분재 판 인연으로 지금도 찾아가면 커피 내놓는다. 

 

 이렇게 타향의 꽃에 묻혀 살던 어느 날 이다. 문득 비온 뒤 들판에 떠오르던 무지개처럼 고향꽃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건 촌스러워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동안 외면한 꽃이다. 봉선화 채송화가 그렇게 사람 가슴 저미게 하는 꽃인 줄 예전엔 미쳐 몰랐다. 여시도 죽을 때 고향 하늘 바라보며 운다고 한다. 그때가 온 것이다.

 

 망경동엔  넓은 정원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꽃을 키우던 어머님이 계셨다. 봉선화꽃 따가던 동네 아낙이 있었고, '울 밑에선 봉선화야' 쑥국새 울음처럼 슬픈 타계한 여동생 노래가 있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신안동  할아버님 집가엔 소복한 여인같은 찔레꽃이 서럽게 피었다. 거기 노란 저고리 곱던 시집 와서 일찍 타계한 사촌형수가 살았고, 손자들 가면 말 없이 수박 참외 담긴 지게 옆에 놓고 가시던 할바시가 살았다. 대밭에 보라빛 칡꽃 피던 배건너에 소녀가 살았다. 나는 아직도 그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 핀 꽃을 별처럼 청초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T.S. 엘리오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고 읊었다. 나는 이제 타향의 꽃보다 고향꽃을 더 사랑한다. 그 꽃에서 소년 시절 사랑하던 사람을 본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봄마다 시나브로 꽃은 지고, 잊혀지지않아야 할 사람도 진다. 그들은 달빛 속 실루엩,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슬프고도 감사한 일인가. 해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떠나간 사람이 다시 눈 앞에 보인다는 사실이.

  

 

                                                                                           (문학시대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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