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들
불가에 맹구우목(盲龜遇木), 침개상투(針芥相投)라는 말이 있다.
‘맹구우목’은 깊은 바다에 사는 눈이 퇴화되어 앞을 볼 수 없는 나이 오래 된 거북이 이야기다. 이 거북이가 삼천 년에 한 번 수면위로 올라와서 공기를 마시고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데, 그때 공교롭게 난파선에서 떨어져 나온 판자 조각에 나있는 구멍에 머리가 쏙 들어가는 우연을 말한다.
‘침개상투’라는 말은, 지상에 있는 한 알의 겨자씨에, 하늘에서 떨어진 침이 정통으로 맞아 꿰이는 것을 말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침이 겨자씨를 맞히기도 어렵거니와, 맞힌다해도, 둥근 겨자에 대개 빗맞아 튕겨져 나갈 것 아니겠는가.
사람의 인연은 이처럼 어렵다. 쉽고 간단히 맺어진 인연도 있지만, 사람들도 우주의 별처럼 수십광년 먼 거리로 떨어져 있다. 가치관 다르고, 취향 다르고, 감성 지성이 다르다. 다가가려면 수많은 강과 산이 막혀있다.
나는 간혹 이런 생각해보곤 한다. 언젠가 사라지는 운명인 점에서 별과 사람이 동일하다. 둘 다 어느날 우주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삶은 죽음 위로 지나가는 유성이다. 인연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모네의 그림을 좋아한다. 밀짚모자를 쓴 소녀가 은초록 귀리밭에서 들꽃을 꺾고 있는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 소녀 옷깃의 흰 레이스는 바람에 나부끼고, 들판 위에 뜬 구름은 파스텔화 같다.
나는 <안개 낀 밤의 데이트>, <부베의 연인>이란 곡을 좋아한다. 안개 낀 밤 데이트 해본 적 없고, 감방에서 기차로 면회오는 연인을 기다린 적 없지만, 두 곡 다 좋아한다. 젊을 때는 평상에 이슬이 내릴 때까지 그 곡들을 기타로 치곤 했다.
나는 그 화가나 작곡가는 모른다. 다만 그들의 작품을 평생 사랑하였다. 수백 년 전에 사멸한 별에서 보낸 빛이 지금 우리 곁을 스쳐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들은 시공 저쪽의 그런 존재일 것이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고,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음악같은 여인, 시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나라고 언제 그들이 내 곁을 스쳐가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시원하게 말 한번 건네지 못했고, 다정한 미소 한번 보내지 못했다. 나는 부끄러움 타는 초등학생 이었다.
다 철 없어 저지른 잘못이었다. 그러다가 나이 들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어느 친구 출판기념회에서다. 상대는 이름 있는 여류 시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물론 초면이다. '내 고등학교 동기들이 교수님의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그 시를 좋아 합니다. 오늘 여기서 만났으니, 대표로 악수나 한번 합시다.' 이렇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수줍은 미소를 뛰우더니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반대 경우도 있었다. 어느 잡지사 발행인 전화를 받은 적 있다. '선생님 수필을 읽고, 필자와 꼭 한번 만나게 해달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전주서 올라온 그와 낙원동서 복국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그 여류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하다. 그는 내게 어떤 문학상 보다 귀한 상을 주고 간 것이다.
간혹 지하철 속에서, 커피솦에서, 혹은 낙엽 철 고궁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스칠 때가 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미소를 보낸다. 눈길이 마주치면 목례 보낸다. 천지가 사람을 창조할 때는 다 뜻이 있었다. 나는 그 뜻을, 아주 작정을 하고, 오래 오래 지켜본다.
봄이 되면 뜰에 수선화가 핀다.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핀다. 우리는 수천 수만 꽃이 피는 아름다운 별에 살고 있다. 그건 축복이다. 거기에 시를 남기고, 그림을 남기고, 음악을 남기고 가는 일은 황홀한 일이다.
시와 음악과 그림 외에 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뜨거운 용암을 감춘 휴화산일 필요가 없다. 돌처럼 차그워도 않된다. 이 땅은 슬품 기쁨이 교직된 슬프도록 아름다운 별이다. 거기 진주 목걸이처럼 아름다운 인연이란 고리 하나 쯤 던져놓고 가야한다.
김창현 약력
고려대 졸업
청다문학회 회장
남강문학회 부회장
(대한문학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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