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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암(松廣庵) 참선여행

김현거사 2016. 4. 15. 10:20

 

 송광암(松廣庵) 참선여행

 

 남해 바다 속 섬이라서 그랬을까. '법보신문'에서 '진리의 섬에서 파도소리를 관(觀) 하라'는 참선수련회 기사 본 순간, 마음은 이미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암자 찾아가서 참선하고 싶고, 바다 보고싶던 차라 시절 인연 제대로 익었던 것이다.

 소리를 듣는 것은 청(聽)이요, 풍경을 보는 것은 견(見) 이다. 관(觀)은 소리나 모습 듣고 보라는 것이 아니다. 범어(梵語)로 비발사나(Vipasyana)니, 모든 걸 멈추고(止), 선정(禪定) 지혜로 경계를 식별하라는 말이다.

 송광암은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선풍(禪風) 드날린 승보사찰 송광사 말사이다. 한여름에 칼날같이 규율 삼엄한 조계산 선방(禪房) 출신 스님의 지도  받아보는 것도 시원한 일이다. 전화해서 가는 길 물어보니. 저쪽 목소리 반갑다. 선방 느껴지는 조용한 음성이다. 

 오락가락 하던 장마가 새벽 5시 쯤 천둥번개 치는 것이 속진(俗塵) 철저히 때려 부수고 오고싶은 출행(出行) 분위기에 딱 맞다. 대전에서 호남선으로 빠져, 광주에서 남해고속도 옮겨타고 순천 벌교로 해서 고흥반도까지 단순에 밀고 내려가니, 옆에 시퍼런 청옥(靑玉) 부서지는 순천만, 보성만, 득량만 세 바다가 심상치않게 요동 치고 있다.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 느닷없는 소낙비, 이글거리는 햇볕 번갈아 자동차 유리창을 떼리는 품이 오래 전부터 덕지덕지 때묻은 이 몸 기다린 듯하다. 그만치 내 업보 깊은 것이다.

 한하운 시인이 문둥이 되어 하룻밤 자고나면 썩어 떨어지는 손가락으로, 필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먼지나는 전라도 황톳길 걸어간 끝이 고흥반도 맨 아래 소록도 앞 녹동 항구다. 길은 이제 아스팔트로 덮혔지만, 녹동에 서린 문둥이 한과 눈물이 비내리는 포구 수면에 어려 있는듯 하다. 이런 곳은 밤새 술잔 비우며 전라도 여자 '서편제' 한가락 듣고 가야 직성 풀릴 곳이다. 잔 잡고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한 곡 불러야 직성 풀릴 곳이다. 카페리에 차 싣고 바다 위로 나가니, 내가 가는 해발 592 미터 거금도 적대봉(積臺峰)은 흰구름과 안개에 덮혀있다.

 

 길머리 찾아 산을 오르니, 대숲에 묻힌 기와지붕 일각이 보이고, 곧 산문 입구에 버티고 선 두 그루 늙은 느티나무 나타난다. 하나는 융단처럼 퍼런 이끼 둘러쓴 살아있는 나무고, 하나는 구름처럼 운지(雲芝)버섯 가득 난 죽은 나무다. 두 나무가 나란히 '삶과 죽음이 이렇소' 하고 산문 앞에서 법문(法文) 하고 있다. 문을 들어서니, 기와 얹은 낮은 돌담 아래 보라빛 도라지와 붉은 봉선화가 피고져 가고 옴의 무상함 말해준다. 불등화(佛燈花) 무성한 언덕 아래 샘물 철철 흘러넘치는 돌확은 두어개 표주박 띄워 목마른 나그네 목 축이게 해놓았다. 황토로 둑 쌓은 작은 연못은 붉은 수련이 꽃봉오리 반쯤 열어 막 향기를 풍기려는 참이다.

 예서체로 청운당(靑雲堂)이라 현판 붙인 요사채 앞에 가니, 먹물 납의(衲衣) 걸친 우바새, 우바이 여나믄 명이 대청에 쭈욱 결가부좌(結跏趺坐) 하고 앉아있다. 눈을 반쯤 감고 느티나무 밑 동남쪽 바다 바라보고있다. 웬 떼스님들인가. 서울 부산 대구 광주서 온 재가(在家) 불자들이다. 얼굴 해맑은 비구니 원주스님에게 담배와 핸드폰 압수당하고, 납의 갈아입고 그들 틈에 앉았다.

 안개는 비로 변하고, 녹.청.황, 홍 원색 단청한 서가래 끝에 골기와 타고 내려온 빗물은 소리없이 떨어지는데, 바람 불자 느티나무 잎새에 두두둑 떨어지는 빗소리, 처마의 풍경(風磬)소리 청아하다. 

 기둥에 '묵언(默言)' '하심(下心)'이라고 한지에 종서로 먹글씨 붙혀놓았다. 마음이라는 놈을 불교에서 소로 비유한다. 마음 찾는 일을 소 찾는 일에 비유한다. 그래 벽에 심우도(尋牛圖) 그려놓았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시간이 찰라(刹那)인데, 거기서 잠시 허리 펴고 결가부좌 하여 심호홉 몇 번 단전에 모으는 사이에 소가 슬슬 극락으로 가는지 금방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놈의 소는 절에 오면 말 잘 듣고 하심(下心) 잘 한다.

 

 아미타불 모신 극락전이 법당인 모양이다. 맞배지붕 골기와 단정하고, 기둥과 처마의 붉고 푸른 단청 깔끔하다. 법당 올라가는 석축에 키 넘게 자란 치자나무가 흰꽃 무수히 달아 향내 진동한다. 거기 먹물 들인 납의 때문에 얼굴이 더 희게 보이는 도시서 온 듯한 여인이 홀로 서 있다가 합장하며 길을 비켜준다. 홍진(紅塵) 벗어난 여인이 정토(淨土) 안내하는 기분이다. 

 측문으로 법당 들어가니, 선객(禪客)들 깔고 앉는 방석 밑 송판 결이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고 아름답다. 공간에 떠도는 향냄새는 이전에 이 공간에서 향 피우고 합장하고 절한 수많은 사람들 욕망과 비원의 범벅이리라.

 아미타불은 연꽃 새긴 연화대에서 미소 띠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아 중생을 어루만져 주려하고, 탱화의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여러 아라한(阿羅漢)은 혹은 온화하게 혹은 창칼 든 험악한 모습으로 본존불(本尊佛) 호위하고 있다. 천정 위에는 여의주 문 용이 아래 내려다 보고있다. 향연(香煙) 그윽한데, 황촛불은 타오른다. 정교한 비천(飛天) 무늬 새긴 범종은 높이가 사람 키만 하고, 법상(法床)에 놓인 목탁은 어린애 머리통만 하다. 이만하면 암자 살림 옹골차다.

 법당 뒤는 산인데 미당(未堂) 서정주옹이 호들갑 떨던 선운사 동백 같은 짙푸른 동백 몇그루가 절 지붕 덮었고, 천도복숭아와 호랑이 거느린 굽은 지팡이 짚은 산신(山神) 그림 그려있다. 이슬 머금은 토란잎 사이로 난 길이 있어 가보니, 대로 엮은 작은 문이 있고, 거기 니우선원(泥牛禪院)이란 현판 붙은 건물 하나 있다. 사람은 쉬는지 졸고있는지 보이지 않고,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 읊고 절개 십년이면 염불 외는가. 건물 앞에 누운 늙은 개는 선정(禪定)에 든듯 사람이 옆에 가도 눈알 한번 돌리지 않는다. 니우(泥牛)는 물 속에 들어가면 풀어지는 진흙소를 말한다. 영겁 시간 속에서 보면 사람도 금방 풀어지는 진흙소 이다. 육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흩어지고, 마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물건인고? 니우(泥牛)란 선원 이름만으로도 한 소식 올만 하다.  

 

  저녁 공양 알리는 세 번 목탁소리에 대중은 벽을 등지고 합장한채 나란히 앉았다. 발우공양은 이참에 좋은 경험이다. 색욕(色慾) 보다 강하다는 식욕(食慾)을 절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나.

 삼십대 중반 체격 좋은 주지스님은 옆으로 쭈욱 찢어진 눈매의 안광이 선방 출신답게 시퍼렇다.

'소승은 여러분처럼 많이 배우지도 않았고, 아무 것도 모르지만, 바다 안개 피어오르는 송광암의 이 맑은 공기와 자연 속에 마음을 섞는 자체로 많은 정진이 되실 것입니다.'

 한 때 판소리도 하고 문학도 했다는 일선(一善)스님이 이렇게 인사하고, 식사, 청소당번 신청을 받는다. 그러자 해우소(解憂所) 청소 자청한 사람이 둘이나 나선다. 더럽고 냄새나는 화장실을 둘이나 신청한 것은 벌써 이타행(利他行) 시작된 증거다. 나는 잔디밭 잡초 뽑는 일을 맡았다.

 공양 들어가자, 상석에 앉은 스님이 죽비(竹)를 딱! 때린다. 각자 일어서서 선반의 발우 내리라는 지시다. 내려서 헝겊 풀어보니 옷칠한 나무대접 네 개와 나무 수저가 들어있다. 먹물 들인 보자기 펼치고 그 위에 이것을 진열했다.

 그러자 딱! 또한번 죽비 울리고 대중 하나가 차례로 천수물 부어준다. 모두 눈 지긋이 감고 허리 꽂꽂이 세운채 앉아있다가 차례가 오면 합장하며 발우를 내밀어 물을 받되, 발우를 흔들면 물도 그친다. 사찰은 묵언을 중시한다. 동작으로 뜻을 전하는 것이다. 천수물로 발우 네 개를 헹구었다. 발우의 먼지를 씻고, 나중에 밥이나 찬그릇 씻기가 쉽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딱! 죽비소리 울리자 밥통이 지나간다. 합장하며 스스로 자기 먹을 밥을 담지만, 그 양은 대개 속가(俗家)의 반도 안된다. 국도 반찬도 그렇다.

 배식 끝나고 딱! 또한번 죽비 소리 나자, 일제히 밥그릇을 눈섭 위치까지 올린다. 가지런할 제(齊), 눈썹 미(眉), 제미(齊眉)다. 옛날 우리나라 양반가에서 음식상을 이처럼 눈썹까지 올리고 깊은 경애를 표시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서원을 왼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내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여기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 음식을 듭니다.' 엄숙히 서원을 외고나니 마음이 정화된다. 놀랍다. 형식이 내용 결정한다. 수행자는 발우(鉢盂)로 음식을 얻는 대신 깨달음을 돌려줌으로써 욕망의 화택(火宅)에 빠진 중생을 구해준다고 한다.

 옳치! 다른 건 몰라도 하산하면 식탁 위에 이 서원을 써 붙이고 실행해야겠구나 싶었다. 이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신 하늘에 계신 주님께 감사하는 크리스찬 기도와 비슷하였다.

 스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도 들려주었다. 속가 음식은 양이 많아, 음식 에너지 대부분은 그 음식 소화하는데 들어가고, 일부만 활동 에너지로 소모되며, 나머지는 위장에 남아 우리 몸을 썩고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공양 끝나자 김치쪽으로 발우를 말끔히 씻어서 후루룩 들이마시니, 반찬 한 알 들기름 냄새 하나도 말끔히 다 마신 셈이다. 소식(小食)은 음식 귀하고 감사한 줄 알게 한다. 

 식사 후 발우 씻은 물을 한 통에 모우는데, 그 속에 밥알 한 알이라도 발견되면, 대중이 그 물을 다 마시는 벌이 있다고 한다. 곡식 한 알 한 점이 다 농부의 땀이기 때문이다.

 공양 끝나자 발우 씻은 물은 둥근 골기와 두 개로 원통을 만들어 땅에 묻은 곳에 버리라고 한다. 지하세계에 사는 아귀 축생의 목 축이라는 것이다. 행주로 발우를 닦아 선반에 올리고, 딱! 죽비 소리나자 합장 후 공양이 끝났다.

 

 입제식은 저녂 7시에 시작되었다. 대중을 목탁소리 듣고 섬돌 위 흰고무신 신고 뜰을 건너 법당에 모였다.

 부처님 앞에서 불자 오계(五戒)를 낭송했다. 산 생명을 괴롭히거나 살생하지 않는 자비, 무소유의 풍요함, 맑고 고요한 청정함, 거짓말 않는 진실, 깨어있는 지혜의 삶을 서약했다.

 자신을 가장 낮은 사람으로 생각하여 자기과시를 삼가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부드럽고 고운 말씨로 대하고, 스님과 법우들을 공경하며, 예불 드리러 갈 때 기러기처럼 한 줄로 서서 가며, 신발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겠다는 수련생 청규도 낭송했다.

 염불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었다. '천수경'의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는 '입으로 지은 업 맑아지이다'이고,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는 '행복하소서 저 모든 중생'이다.

 반야심경도 우리말 이다.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물질이다'라고 실감나게 외웠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한문 아니다.

 근대의 선승(禪僧) 경허스님의 참선곡도 외웠다. '모두가 꿈이로다. 부귀문장 소용없다. 황천객을 면할손가? 오호라 나의 몸은 풀 끝의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이 대목에서 저만치 한구석에 앉은 젊은 여인이 하얀 손수건 꺼내 눈 가 닦고있다.

 밖은 빗소리 바람소리에 섞여 간혹 땡그랑 땡그랑 풍경소리 들리고, 비단같은 바다안개는 무시로 법당을 들락거리고, 어둠은 깊어간다. 골기와 지붕은 짙은 안개와 어둠에 덮히어, 마음을 완전히 속세와 차단시켜 준다. 피안(彼岸) 같다. 처마의 풍경소리, 고요한 바람소리 속에 입제 첫날 설법과 참선은 늦은 밤에 끝났고, 밤바다 먼 섬의 불빛은 그리도 외로웠다.

 

 이튿날은 새벽 4시 꿈결 속에 법당 목탁소리 염불소리 듣고 일어났다. 차가운 샘물 세수하고 캄캄한 어둠 딪고 법당 올라가니, 벌써 거기는 향냄새 만당하고, 황촛불 아래 아미타불 조용히 웃고 계신다. 밖에선 새벽 타종(打鐘)소리 디잉디잉! 삼라만상 깨우며 낮게 울린다. 이슬비는 어둠 속 뜰의 하얀 치자꽃을 적시고 있다.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들이 백팔배 올리는 모습 신비에 쌓인다. 우물은 밤새 조용히 가라앉은 새벽 물이 제일 맑다. 사람들은 새벽 정신으로 참선에 들어갔다.

 스님은 참선의 자세를 이렇게 지도했다. 허리 곧추세우고, 결가부좌 하고, 손은 아랫배 단전 아래에 엄지를 대삼마야인으로 모으고, 혀는 입천장에 대고, 시선과 호홉과 생각을 하단전에 놓고, 화두(話頭)를 참구하라. 사람이 가장 편한 자세는 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중간 자세, 결가부좌 자세란다. 부처님이 나이 서른다섯에 득도하실 때, 앞에 네란자라강이 잔잔히 흐르고, 신비로운 고요 속에 샛별이 하나 둘 솟기 시작하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의 자세가 이 결가부좌 자세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내려진 화두(話頭)는 '이 뭣고(是甚)' 였다. 화두는 깨달음의 문에 들어가는 암호같은 것이다. 기뻐하고 노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 마음이란 놈이 도대채 뭣이냐는 것이다. '뜰 앞 잣나무(庭前柏子樹)', '마삼근(麻三斤)' 같은 전등록에 실린 조사(祖師)의 화두나 공안은 1천7백 개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결가부좌로 무릎에 쥐 나는 아침 참선 시간 끝나서 반가운 죽비소리 듣고 휴식이라 밖에 나오니, 희뿌연하게 여명(黎明) 밝아온다. 먹구름 깔렸던 하늘은 어느새 얇고 흰 비단구름 깔렸다. 먼 바다 섬들은 그림처럼 떠 있고, 바람 속에 어디선가 산새소리 날라온다.

 6시에 아침공양 끝내자 10시까지 울력 시간이다. 나는 경내 잡초를 뽑았다. 제법(諸法)이 빈 것(空相)이라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다는데, 삼라(森羅)가 부처라면 잡초인들 부처 아니고 망상인들 법(法)이 아니냐. 굳이 마음에서 망상 내쫒고, 뜰에서 잡초 뽑는 것도 공허한 일 아니냐 하는 생각도 했다.

 10시부터 조계종 창시자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을 배웠다.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고 고집하며 불도를 닦는다면, 그런 사람은 티끌같이 많은 세월 지나도록 몸을 사르고, 팔을 태우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쓰고, 항상 눕지않고 하루 한 끼 먹으면서 대장경 줄줄 외우고, 온갖 고행 닦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 같아서 아무 보람 없고,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자기 마음을 알면 수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지혜와 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 끝내고 선체조(禪體操) 향공(香功)을 배웠다. 중국서 전해진 향공 명칭들이 재미있다. 금용이 꼬리를 흔든다는 금용파미(金龍擺尾), 불탑에 향이 피어오른다는 불탑표향(佛塔瓢香), 연꽃 잎이 바람에 날린다는 풍파하엽(風擺荷葉), 달마가 배를 흔드는 달마탕주(達磨蕩舟), 나한이 호랑이를 항복시킨다는 나한복호(羅漢伏虎)가 그것인데, 그 중 배병기(拜病氣)란 것이 신비롭다. 손바닥을 펴고 머리 위에 흔드는 것인데, 실시하니 머리의 열이 시원히 가라앉는다.

 선체조 끝나고 행선(行禪)에 들어갔다. 적대산(積臺山)을 맨발로 오르며, 시키는 대로 묵언으로 호홉에 정신을 집중하여 한걸음 한걸음에 '나의 마음이란 무엇인가'하는 화두를 놓지않고 올랐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가볍고 힘든 줄 모르겠다.

 하늘은 푸르고, 숲은 우거져 있고, 들꽃은 곳곳에 피어있다. 산정은 흰구름과 안개에 덮혔다. 청신녀들은 빨간 산딸기 따먹으며 즐거워 한다.

 산 위에 올라 잠시 결가부좌로 참선하였고, 이튿날은 능소화 붉고, 감 주렁주렁 달린 흙담장 골목길 지나 금장리 몽돌 해안에서 다시 파도를 관(觀)하며 참선했다.

 사람은 악도(惡道)에서 벗어났더라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육근(六根) 온전히 갖추기 여렵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 온전히 갖추었을지라도 부처님 세상 만나기 어렵고, 부처님 세상 만났을지라도 수행자 만나기 어렵고, 수행자 만났다 하더라도 신심(信心) 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전국 각지의 진지한 수행심 가진 도반(道伴) 만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사바(裟婆)가 그처럼 슬픈 곳이더냐. 대구서 온 30대 여인은 비구니처럼 간절한 질문을 몇개나 계속해서 던졌고, 안양서 온 보살은 완벽한 결가부좌 자세와 묵언을 행했고, 부산서 온 처사는 30년 카토릭 믿음을 불교로 개종한 이야길 했고, 판소리 잘하던 전라도 처녀, 고모 따라온 서울 대치동 동자같이 어린 학생, 건망증 걸린 노할머니 등 대중들은 서로 합장하고, 법(法)의 문 앞에서 끝없이 경건했다.

 3박(泊) 마지막 밤은 너무도 진지한 밤이었다. 두 시간 참선 끝나고 스님 법담과 대중 담화 시간이 있었는데,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설 줄 몰라, 밤 깊어 법당 향촛불은 가물가물 하고, 자정 지난 달빛은 휘영청 높이 떠 향 연기에 취한 도반 얼굴 비치는 것이, 달 속에 사는 항아(姮娥)도 찾아와 동참한 느낌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녹동항에 마침 달콤한 백도(白桃)가 있어 사먹으며, 잠시 선계(仙界)의 천도(天桃)를 먹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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