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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

김현거사 2014. 11. 28. 06:01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

                                                                                                                 김창현

 

   달빛 아래서 보는 매화가 가장 아름답다. 월광 아래 매화는 잎이 월궁 항아의 얼굴 같고,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는 말못할 사연을 지닌 여인의 체취같다.

   매화는 그날 날씨와 시간에 따라 운치가 달라, 같은 매화라도, 아침에 핀 매화와 청명한 오후의 매화 다르다. 청명한 아침 매화는 이슬 맺혀 향기 더욱 청초하고, 오후의 매화는 반개(半開)한 모습, 혹은 만개(滿開)한 모습, 정면, 후면, 측면의 각기 다른 생동감을 또렷히 보여준다.  

 안개 속의 매화, 눈 오는 날  매화도 운치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시적인 매화는 달빛 아래 매화가 아닐까 싶다.

  화가가 매화를 그릴 때는 몇가지를 염두에 두고 그린다. 

  매화나무는 오랜 풍상을 겪은 고매(古梅)일수록 귀하고, 늙은 것이 귀하고, 여윈 것이 귀하다. 노인처럼 바위 옆에 선 매화가 귀하다. 줄기는 기괴하게 굽어져야 하고, 어린 가지는 섬세하면서도 힘이 있어야 한다. 매화는 산매(山梅), 강매(江梅), 원매(園梅), 반매(盤梅)가 있지만, 그 중 세월의 흔적으로 줄기에 푸른 이끼가 무수한 태점(苔點)을 찍은 매화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매화는 격조가 먼저이다. 아무리 솜씨가 뛰어난 화가라도, 이 격조를 얻지못하면 그림은 속되고 만다.

 차인들은 차를 마실 때도 간혹 매화꽃을 찾는다. 찻물에 젖는 애련한 꽃을 눈으로 구경하고, 다음에 코로 그 향기를 마신다. 잔도 선별한다. 잔은 깔끔한 청자 잔도 좋고, 투박한 이조 다완()도 좋다. 청자는 매화를 고결하게 하고, 백자는 매화를 애련하게 한다.  

  차 마시는 장소도 가리곤 한다. 장소는 연못 옆이 좋다. 그 옆에 초당이 있으면 좋고, 곁에 대나무 몇그루 있으면 더 좋다.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 들리는 곳이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차 마실 사람도 가린다. 가능하면 곁에 옥같은 흰 손으로 차를 따르는 여인이 있으면 좋다. 가난한 선비나 화가가 있어도 좋다. 가난한 선비는 청빈을 알고, 화가는 꽃빛의 미묘함을 알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매화를 대상으로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고, 고사를 남겼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매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신흠은 '매화는 한평생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잃지않는다'고 했다.  임포(林逋)는 '은은한 향기는 달빛 속에 떠간다(暗香浮動月黃昏)'고 했다. 조희룡은 매화벼루에 먹을 갈아 매화 병풍을 그렸고, 그 병풍 아래 누워 잠을 잤으며, 자신을 매화에 미쳤다며 '매화두타'라고 불렀다. 맹호연(孟浩然)은 기암절벽에 눈 쌓인 봄,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나섰으니, 답설심매(沓雪尋梅)의 고사가 그것이다. 임화정(林和靖)은 서호(西湖) 북쪽 고산(孤山)의 매림(梅林) 속에 집을 짓고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살았으니,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가 그것이다. 

  그럼 정작 매화같이 청초한 여인과 사랑을 한 분은 누구일까. 조선조 최고 성리학자인 퇴계 선생이다. 

 선생은 48세 때, 부인과 아들을 잃고 단양군수로 부임했다고 한다. 거기서 얼음같은 피부, 옥같은 자태 지닌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두향(杜香)을 만났다고 한다. 두향은 당시 18세였고, 시가와 가야금에 능했다고 한다. 선생이 부임하자, 인품을 우럴러 기르던 매화 분재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고 한다. 상처한 49세 천하문장과 음률에 정통한 18세 여인은 이렇게 만난 것이다. 진작부터 매화를 사랑하던 퇴계 선생이다. 매화 분재를 들고온 젊은 여인이 오죽 반가웠겠는가.

 두향은 샘물을 길어와 옥같은 손으로 잔에 매화차 따랐을 것이다. 매화시를 읊었고, 선생은 매화 앞에 앉아 거문고를 탔을 것이다. 그러다가 만난지 9개월만에 이별하였으니, 그때 두사람의 심회 오죽 하였을까. 두향은 이런 시를 남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얼음같이 맑고 청초한 여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을 것이다. 두향은 풍기군수로 떠나는 선생에게 자신의 체취가 담긴 수석과 매화 한 점을 선물했다고 한다. 선생은 그 매화를 후에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온 후 임종하실 때까지 21년간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도산서원 앞마당 동편 연못가에 매화를 심고, 그를 절군(節君) 혹은 매형(梅兄)이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벼루도 매화가 그려진 벼루를 썼고, 걸상도 매화가 새겨진 걸상을 썼다고 한다.  

  그러다가 노후에 병이 깊어지자, 매화에게 자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하다며, 화분을 다른 방에 옮기라고 했다고 한다. 퇴계 선생께 매화는 바로 두향이었다. 임종시에는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란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의 매화시첩(梅花詩帖)에 이런 시가 있다. 

 

'뜰 가운데 거니니 달은 날 따라오고, 매화 둘레 몇 번이나 서성여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 향기는 옷깃 가득, 그림자는 몸에 가득' 

 

 달빛 아래 매화 향기에 젖은 선비의 모습이 보인다.

 

'누렇게 바랜 옛책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끊어진 거문고 줄에 빗대어 소식을 전하지 못함을 한탄하는 시 이다.

  

  퇴계선생은 매화 시첩에  91수의 매화시를 남겼지만, 한번 헤어진 후 두향을 다시 만난 적 없었다고 한다. 선비로써 꼿꼿한 자세가 엿보인다. 두향은 선생이 떠난 후,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살다가, 어느 날 선생의 부음을 접하자, 4일간 걸어서 안동의 상가를 방문하고 돌아와, 곡기를 끊고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참으로 매화같이 고결한 두향의 처신이다. 두향은 매화의 혼이었던지 모른다.

 동서고금 수많은 시인묵객이 있었지만, 매화처럼 격조 높은 사랑을 한 사람으로 두향이와 견줄만한 사람 없다. 시인 중에 퇴계선생처럼  매화시첩에 91수의 매화시만 남긴 사람도 없다. 두 분이야말로 참으로 만고청향(萬古淸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단양의 남한강 푸른 물가에 두향의 묘가 외롭게 남아있다. 지금도 남한강에 가면, 나는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는 유언을 남긴 퇴계 선생을 생각한다. 청초한 두향이의 모습을 눈 앞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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