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 제4편 서문

비파 타는 여인의 노래/ 백낙천

김현거사 2016. 5. 12. 08:31

 

 비파 타는 여인의 노래(琵琶行)/ 백낙천(白樂天)

 

 백낙천(白樂天)의 시 '비파행(琵琶行)'을 읽으면,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는 느낌이 든다. 한 슬픈 여인의 인생이 시 속에 스며있다.

 이 시는 당 헌종 때  백낙천이 가을에 친구를 배웅하러 양쯔강 분포강(湓浦江)이라는 곳에 갔다가, 비파 타는 여인을 만나 쓴 것이다.

 비파행(琵琶行)이니 제목을 '비파의 노래'라 함이 옳다. 그러나 모파상의 여인 '잔느'를 생각하며 '비파 타는 여인의 노래'라고 의역했다. 첫 부분이 문장 중 명문장이다. 비파의 음율을 시각화 하여 동서고금 가장 희귀한 명문장으로 꼽히고 있다.

 백낙천 혹은 백거이(白居易)의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벼슬은 형부상서에 올랐고 75세에 사거했는데, 44세 때 지은 서사시 '비파행' 때문에 당나라의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시는 칠언(七言) 87행 609字로 본문이 이루어 졌는데, 당나라 강주(江州) 사람들이 비파행의 배경인 심양 강가에 비파정(琵琶亭)을 지어 백거이의 시를 기념했다. 1200년 전 낭만을 음미해보자.

 

비파행(琵琶行) 서문(序文)

 

원화 10 년에 나는 구강사마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가을 손님을 배웅하러 분포강(湓浦江) 포구에 나갔다가, 배 속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들었다. 쟁쟁(錚錚)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전에 서울(京都)서 듣던 소리였다. 사람을 찾아보니 원래 장안에서 노래하던 여자였는데, 유명한 선생에게서 비파를 배운 고수였다. 술상을 차리게 하고 몇 곡 청해 들었는데, 연주를 끝내자 마음이 착잡해 졌다. 그는 한때 젊고 예뻤던 시절 보내고 늙어서 이제 시골구석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나(백거이) 역시 그러하다. 시골로 쫓겨 귀양살이 한지 2년 되었다. 그리하여 노래를 지어 이 여인에게 바친다.

 그날 밤 양자강 강나루는 빨갛게 단풍이 불타고 하얀 갈대는 흔들리고, 강물에 명월(明月)은 잠겼고, 소쩍새는 피를 토하고 원숭이는 슬프게 울었다. 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들은 비파 소리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본문

 

심양강(潯陽江) 어귀에 객을 전송하려고 밤에 가니, 단풍잎과 갈대꽃은 가을 바람이 불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말에서 내리고 손님은 배에 타려할 즈음 이별의 술잔 나누려 했으나 피리나 거문고가 없어 취해도 허전하였다. 이별 때문에 마음만 아픈데, 강 위를 보니 강은 아득하고 물엔 달빛이 젖어 있다.  

 그때 홀연히 어디서 비파소리가 들려와 둘은 갈 길을 잊었다. 나는 집에 가길 잊었고, 객은 떠나길 잊었다. 

 '비파 타는 사람 누구요?' 어둠을 향해 물어보니, 잠시 비파 소리 멎고 대답이 없었다. 

 배를 움직여 가까이 닥아가 청하여 인사하고 술을 내놓고 등을 밝혀 자리를 마련했는데, 여인은 천번만번 청하자 겨우 나오기는 하였으나, 비파를 안고 다소곳이 얼굴을 가리더라. 

 이윽고 비파의 굴대(軸)를 돌려 두어번 가락을 조절하는데, 곡조를 채 이루기도 전에 소리에 먼저 정이 담겨 있었다. 한 줄 한 줄 손가락을 퉁겨 일어나는 한 소리 한 소리에 생각이 담긴듯, 평생 불우하던 정을 하소연 하는듯, 아미를 숙이고 가락을 퉁기는데, 심중의 이야기를 하는듯, 가볍게 눌렀다가 천천히 매만지다가, 줄 아래 위로 손가락을 퉁겨 올리다가 한다. 처음에는 예상(霓裳, 무지개 치마. 당 현종이 지은 서역풍의 무곡)을 치고, 나중에는 육요(六幺, 아래 줄 한가락이 우뢰소리를 내는 가락)를 치는데, 큰 줄은 우렁차 소나기가 내리는듯 하고, 작은 줄은 가늘게 이어지면서 절절이 속삭이는데, 급한 가락 낮은 가락 어지럽게 뒤섞여, 탄주할 때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구르는듯 했다. 사이사이 앵무새 소리 꽃 가지 아래로 미끄러지고, 흐느끼는 냇물 소리 얼음 밑을 흐르는듯, 시냇물 얼어붙듯 차급게 끊겼다가, 이윽고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깊은 시름과 한(恨)이 일어난다.  이때  소리 없음은 소리 있음 보다 더 나았다.

 그러다가 잠시 은항아리(銀甁) 깨어져 그 속에 담긴 술(酒)과 장(漿)이 비산하듯, 쇠갑옷의 기마병 돌진하여 칼과 창 부딪치듯, 곡조가 용장하게 급전한다. 이윽고 곡을 끝내고 술대로 줄을 한번 그으니, 네 줄이 일성(一聲)인데, 비단 찢는 소리 같았다. 동쪽 서쪽 배  두 척 모두 황홀히 소리에 취한듯 조용한데, 오직 강에 보이는 것은 가을 달 흰빛 이다.

  (연주가 끝나자) 여인은 깊은 한숨을 뱉어내고 술대를 비파 줄에 꽂은 다음, 의상을 정돈하고 낮빛을 가다듬고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본래 서울(京城) 살던 계집인데, 하묘(蝦蟇, 장안에 있던 동중서의 무덤) 아래에 집이 있었습니다. 

 13세에 비파를 배워 이름이 교방(敎坊, 기생학교) 제일에 올랐고, 곡을 타고나면 선생님도 선재로다 감복하였습니다. 화장을 하면 당대 제일 명기 추랑(秋娘)도 투기할 정도였고, 곡 하나 끝나면 장안 오릉 근처 부잣집 도령들이 다투어 붉은 무늬 비단을 수 없이 선물했습니다. 시절이 좋아 귀한 청패(靑貝)로 장식한 은빗을 노래 장단 맞추노라고 깨트려도 아까운 줄 몰랐고, 얇고 붉은 비단 바지 술을 엎질러 더러워져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금년이 유쾌하니 내년도 그렇겠지 하며 가을 달 봄 바람(秋月春風) 걱정 없이 흘러보냈습니다. 그동안 남동생은 군인이 되어 달아나고, 양어미 돌아가고, 아침 저녂 오가는새  내 얼굴 추해지니, 문전이 쓸쓸해지고 찾아오는 안장 얹은 말과 수레도 뜸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늙은 장사꾼 아내가 되었으나, 원래 상인은 이득을 중히 여기고, 이별을 대수롭게 생각치 않아, 지난 달 부량(浮梁)에 차를 사러 떠나갔습니다. 나는 강 어귀를 서성거리며 빈 배를 지키노라니, 밝은 달은 배를 비추고 강물은 차겁기만 합니다.

 밤 깊어 문득 어린 시절을 꿈 꾼 날에는, 꿈 속에서 슬픈 정을 억제치 못하여, 연지 단장한 얼굴의 눈물이 주루룩 난간에 흘러내립니다.'

 나는 이미 비파 소리를 듣고 탄식하였지만, 이 이야기를 듣자 거듭 마음이 착잡하여 말하였다.

'그대와 나, 다같이 영락하여 하늘가를 헤매는 신세. 우리 만남에 어찌 일찌기 서로 아는 사람만 택하겠는가?

나는 작년에 황제 계신 장안을 떠나 심양성에 귀양와서 병들어 누워있다오. 심양 땅은 궁벽한 곳이라 일년이 가도 피리 거문고 연주 듣질 못했다오.   

 내가 살고있는 곳은 분강(湓江) 근처 저습지인데, 누런 갈대와 고죽(苦竹)만 집을 에워싸고 있다오. 두견이 피를 토하는 울음과 원숭이 애달픈 소리 뿐,  그 사이에서 아침 저녂 무엇을 들었으리? 봄 강변, 꽃 피는 아침, 가을 달밤, 왕왕 혼자 술을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보았을 뿐. 

 간혹 나무꾼의 노래, 촌 사람 피리소리야 없지않지만, 서투르고 조잡하여 듣기 거북했는데, 오늘 밤 그대가 타는 비파 소리를 들으니, 마치 신선의 음악 듣는듯 금방 귀가 번쩍 뜨이는구려.

부디 사양말고 좌정하여 다시 한 곡조 타 주시면, 내 그대를 위해 '비파행(琵琶行)' 시 한 수를 짓고자 한다오.'

 여인은 이 소리를 듣고 감동하여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다시 좌정하여 비파 줄을 바짝 조이고  빠른 가락으로 비파를 타는데, 그 슬프고 처절함은 앞의 소리와 또 달랐다. 만좌(滿座)가 눈물을 못가누게 하니, 좌중(座中)에서 누가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던고? 강주사마(江州司馬)의 푸른 옷소매가 눈물로 촉촉히 젖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