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성격,나의 혈통

김현거사 2013. 2. 17. 19:54
09.12. 08:22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626

 

   나의 성격,나의 혈통

 

 젊은 시절에 나는 남모르는 고민을 안고 살았다. 너무 직선적인 성격 때문이다. 대학에서 심리학 철학을 배워도 소용 없었다. 아무리 마음 공부를 하고, 수양을 해도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다. 공자는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나 가능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허례적인 가식 보다는 먼저 솔직한 마음의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예(禮)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솔직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솔직한 직선적인 셩격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급박하다. 사근사근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자주 후회할 일을 남기곤 했다.

 

  기업의 홍보책임자로 있을 때였다. 홍모라는 과장 대리와, 권모라는 대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권대리가 나에게 사표를 내밀었다. 모 대학 직원으로 간다는 것이다. 완전히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기자로서의 재능을 인정하여, 월급 인상 폭도 남보다 많이 해주었고, 수당도 시원스레 정해주었다. 나혼자 그를 짝사랑한 셈이었다. 애끼던 직원이었다. 그러나 홍과장 이야기를 들어보니, 딴판이었다. 내가 너무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회의 때만 되면, 부원들이 숨 한번 제대로 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내 딴에는 일당 백의 인재를 키운답시고 너무 완벽을 요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바가지는 깨진 후였다. 처자식 가진 사람이 사표를 낼 때는, 오죽 들볶던 상사를 원망했겠는가. 책임이 나에게 있었다. 그래 권대리를 불러서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보냈다. '미안하다. 너를 아끼고 너의 능력을 인정하였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법이 틀렸던 모양이다.'

 

 이 일로 나는 오래 동안 고민 하였다. 나는 상사로서 아량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하가 떠나는 상사는 문제있는  상사다. 통솔력 없는 간부는 하자있는 간부였다. 이 사건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마치 땅을 헛짚은 것처럼 크게 휘청하였다. 남 모르는 당혹감에 맘고생을 오래 하였다.

 

  그전에, 법정스님과 헤어질 때도 이 비슷한 실수를 한 적 있다. 불교신문에서 타 신문으로 옮겨갈 때다. 스님이 송별 회식을 베푼 자리에서 였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던지 모르겠다. '어이 김기자! 이제 마지막인데, 그동안 나와 같이 있었던 소감이랄까, 뭐 한마듸만 해봐!'  스님이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나는 불교신문에서 설조 광덕 월주 법정스님을 모셨다. 말할려면 할 말은 많았다. 그 중 광덕은 한문에 자유로웠고, 법정은 문필가로 보였다. 그러나 '아 머.... ' 어쩌고 하면서 한참 머리만 극적거렸더니, 일이 꼬일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어이 김기자! 나도 한번 어디 그 이야기 들어봅시다, 스님에 대해 한번 시원스레 탁 털어놔봐!' 곁에 있던 역경원 유찬거사도 거든다. 게다가 스님이 또 한마듸 한다. ' 그동안 뭘 느꼈는지 어디 한마디만 들어봅시다!'  은근한 채근하였다. 세번씩 요청을 받자, 더이상 꾸물거릴 수 없었다. 그래서 밷은 말이 화근이었다. '스님은 출근하시면 항시 함석헌 천관우씨와 통화하시는데...,문사로서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스님은 원래 처자식도 버리고 속세의 인연도 끊고 출가한 분 인데... 스님은 오로지 수도에만 전념하셔야 ....' 이 소리로 그 자리 분위기가 확 바뀌고 말았다. 

 

  솔직한 말이지만, 해서는 안될 말이었다. 후에 스님은 송광사 말사인 불일암에서 오래 동안 혼자 수도하셨다. 나중에는 그것조차 사람 번거럽다고, 강원도 오지에서 시자도 없이 생활 하셨다. 그리고 <무소유> 시리즈 책이 불티나게 나가,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 김영환 보살한테서 요정 대원각을 시주 받아, 길상사를 만들어 조계종에 헌납하셨다. 존경할 고승의 행적이었다. 스님이 불일암 시절 손수 만들어 앉았던 별볼품없는 의자까지도, 감명 깊게 보고오는 사람까지 생겼다. 심심찮게 큰스님이라는 말도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그 유명한 스님을 두번 다시 만나러가지 않았다. 

 

  이런 사교성 없는 나의 성격은 나 자신조차 못마땅한 것이었다. 자신은 솔직한지 몰라도 남은 어디 그런가. 내 성격은 못마땅할 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무슨 족쇄 같았다. 끝없이 노력해도 변하지 않았다. 선비들은 맛의 최상 경지는, 담담한 채근(菜根)의 맛이라 한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담담해야 하고, 인생도 담담해야 한다. 그래서 옆에 가면 누구나 포근함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대쪽처럼 날카롭게 한쪽으로만 갈라지는 나의 성격은 어디다 쓸 것인가. 어째서 내 성격은 이럴까, 혼자 전전긍긍 했다. 이런 자괴감은 아마 오십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날 그런 생각을 말끔히 벗어버렸다. 우연히 집안의 족보를 뒤적거리다가 였다.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 거기에 나의 아이덴티티가 있었다. 사군파는 네 분 무장의 무맥(武脈)을 이은 혈통이다.

 

 첫번째 극조(克) 할아버지는, 신장이 9척((2m 70cm)이고, 얼굴이 아주 붉었으며, 근력이 강하여 활을 당기는 힘이 300근 되는 물건을 들어올리는 힘과 맞먹었다고 한다. 목소리는 천둥소리 같았으며, 손으로는 쇠갈쿠리를 펼 수 있었고, 호두와 잣 같은 아주 단단한 것을 모두 손으로 껍질을 깠다고 한다. 의성현감을 지냈고, 사후에 병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학천군(鶴川君)에 봉하졌다. 

  극조 할아버지 아드님 완(完) 할아버지 역시 타고난 무골이었다. 신장은 7척장신이고, 기백이 천사람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힘이 다른 사람과 달리 출중하여 크나큰 솥도 불끈불근 드는 용력을 가졌으며, 특히 활을 잘 쐈다고 한다. 이괄의 난을 만나, 도원수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서대문 밖, 질마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난이 평정되자, 진무공신(振武功臣) 학성군(鶴城君)으로 봉해졌고, 임진왜란 시는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전투, 한산도대첩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 후에 전라우수사,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학성군의 장남 여수(汝水) 할아버지는, 인조 때 무과양장(兩場) 장원(狀元) 하시어, 왕이 친히 삼괴당(三魁堂) 3자를 하사했다.  용모가 장대하고, 임기웅변에 능했고, 평상시에도 무기와 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사헌부 감찰, 절충장군 함경남도 병사 겸 북청부사, 북도병사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다가,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으며, 제주목사, 포도대장 등을 거쳤고, 사후에 의금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해성군의 아드님 세기(世器) 할아버지는 효종 때 무과급제하여, 내금위장, 전라좌도수군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남한산성 외곽을 쌓으셨고, 학림군(鶴林君)으로 봉해졌다. 우의정 이완(李浣) 장군이 그를 한번 보고는 말하기를 “정말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 호랑이 같은 아들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행실과 기량은 보통사람보다 뛰어났고, 두드러진 장수의 기풍으로서 동료와 부하들을 어루만지고 사랑했다고 한다. 임종 시는 <어떤 곳이 성을 쌓을 수 있고, 어떤 곳에는 병사를 매복시킬 수 있으며, 어떤 전함은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등 끊임없이 말씀하시기를 애쓰다가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은 임금이 괴롭게 애도하며 집무를 보지 않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로서 이른바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가 이뤄진 것이다.

 

 혈통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조 수로왕은 신장이 9척으로 은나라 탕왕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인 것은 한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섶의 팔채(八彩)는 요임금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진 중동(重瞳)은 순임금과 같았다고 한다. 수로왕의 12대 손으로, 삼한을 통일한 김유신장군 역시 뛰어난 명장이다. 원래 김해김씨 자체가 무골 혈통이었다. 무장은 전쟁에 임하여, 남보다 더 용맹스럽고 과감한, 임전무퇴(戰無退)의 정신을 가졌을 것이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기개로, 강한 상대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보였을 것이고, 약한 자 앞에서 큰 도량을 보였을 것이다. 작전에 임하여, 남보다 더 치밀하고, 스케일이 컸을 것이고, 동료를 사귐에 믿음이 강하고, 결코 겉으로 겸손한 척 하면서 속으로 딴 마음 품는, 옹졸한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피가 내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랑스런 혈통이었다. 관솔에 불 부친듯 맹열하고 직선적인 성격이라고 결코 부끄러워할 일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 맘은 편안해졌다. 소나무도 있고, 대나무도 있고, 매화도 있고, 복사꽃나무도 있다. 그러나 매화나 복사꽃만 좋은 것이 아니다. 은은하고 온화한 것도 좋지만, 굳세고 곧은 것도 좋은 것이다. 세상은 넓고, 모두는 다 각자의 쓰임새가 다르다. 나의 처세는 실수도 많고, 문제도 있다. 그러나 좋은 조상 두고, 씨 다른 다른 집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공자님도 '직(直)'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았던가. '무인의 혈통이라면, 무인의 후손답게 살자. 대범하게 죽죽 뻗어나간 소나무 대나무는 얼마나 시원한가. 송죽(松竹)의 절개는 또 얼마나 귀한 것인가.' 이렇게 편하게 맘 정하고, 그 후로 나는 내 혈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기로 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