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2>
그날 밤 나는 혜정이네 집 근처로 찾아갔다. 혜정이가 살던 집은 진주농대 학장 관사였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쌓인 넓은 집 이다. 봄이면 하얀 탱자꽃이 향기로웠고, 가을이면 작은 귤처럼 생긴 탱자가 가지마다 조롱조롱 열렸다.
그 밤에 내가 어둠 속에서 떨면서 부른 내 인생 첫번째 세레나데는, 도입부가 바리톤의 저음으로 시작되는, '불 밝던 창'이란 노래다.
'불 밝던 창에 어둠 가득 찼네. 내사랑 넨나 병든 그때부터.
그의 언니 울며 내게 전한 말은, 내 넨나 죽어 땅에 묻힌 것.'
혜정이는 보일말듯 약간 다리를 저는듯 했다. 그래서 혜정이가 갑자기 ‘넨나’가 된 것이다. 엘비스프레스리의 '러브미텐더'도 불렀다.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나를 보내지말고, 사랑해달라'는 가사가 맘에 들고, 엘비스프레스리의 감미로운 미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진주서 성장한 그 어느 소녀도 혜정이처럼 세레나데를 밤마다 그렇게 수없이 들은 소녀는 없을 것이다. 나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밤마다 끈질기게 소녀네집 울타리 옆을 배회한 소년도 없을 것이다. 혜정이네 집 탱자울 안에 우물이 있었다. 달밝은 밤, 탱자울 밖에서 훔쳐본 우물가 소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나는 망진산에 올라가 바위에 못과 망치로 영시를 새겨놓기도 했다. '크리스티나 로젯티'의 '내 죽거던 임이여'란 시다.
'When I'm dead my Dearest, sing no sad song for me.
Plant no roses at my head, nor shaddy Cypress tree.'
손에 피멍까지 들면서 나는 왜 그 시를 바위에 새기고 싶었을까. 내가 그 시를 새기던 망진산 절벽에서 바람 타고 풍기던 찔레꽃 향기, 멀리 약골 보리밭에서 울던 뻐꾸기 울음만 지금 아련히 기억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위에 새긴 그 소년의 시는 그후 통째로 없어져 버렸다. 망진산에 방송탑을 세우는 공사를 하면서 제거한 것이다. 망진산만 그 소년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싹틀 때 진주는 못견디도록 아름다운 도시다. 봄철 푸른 남강 물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버들 숲 아래 강물에 은어가 꼬리치며 올라오고, 남풍은 부드럽게 불고, '당미' 언덕에 벛꽃이 하얗게 피는 것을 보면. 지드의 '좁은 문'을 읽은 후 산책을 나가서 탱자꽃 하얗게 핀 과수원에 파란 페인트 칠한 나무문을 보면. 그 집 뜰에 있는 한 소녀를 보면. 흰구름 뜬 강변 어느새 모두 황혼으로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면. 밝은 달 촉석루와 남강 속 의암바위를 비칠 때. 느티나무 노란 낙옆 공원 벤치 옆 바람에 날라갈 때. 진주 소년은 풍부한 감성 지닌 청년으로 성장한다. 새벽 안개 덮힌 남강에서, 이곳 출신 남인수의 노래와 이봉조의 '밤안개' 쎅스폰 소리 흉내 내며 진주 소년은 자란다. 전원도시의 순한 성품으로 자란 진주 사람은, 그래서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국회의원조차, 순하다.
혜정이는 길에서 만나면 어떤 편이냐하면, 내가 밤마다 자기 집 밖을 돌며 세레나데를 부르고 가는 그 남학생인 건 아는 눈치였다. 그를 찬미하는 남성이 있다는 것은 어린 소녀로선 우쭐한 일이고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비밀이다. 한번 그 얼굴을 보고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이다. 간혹 수줍어하면서 발걸음을 늦추고 슬쩍 돌아보곤 했다. 아! 그 돌아본 행위 때문에 나는 얼마나 실낱같은 새 용기를 얻었던가. 남강에 유등 띄우던 개천예술제 전야 인파 속에서 한번만 그 얼굴을 만나고 싶어, 얼마나 헤매였던가. 간혹 아침 등교시 다리 위에서 교복 차림의 혜정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혜정이와 나란히 이야기하며 같이 다니던 그의 단짝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다. 나는 내가 영자로 태어나 다정히 혜정이 옆에 같이 설 수 없음을 얼마나 탄식했던가.
그때 내 모습은 어떤 편이냐하면, 가슴이 떡 벌어진 소년이었다. 국민학교 때 학교 백미터 선수였고, 고등학교 때 투창, 투원판, 높이뛰기, 넓이뛰기, 삼단뛰기, 백미터, 진주시 대표였다. 운동도 만능이고, 공부도 그런대로 잘 했다. 쉬는 시간에 교단에 올라가 미치밀러 합창단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흉내내어 '켄터키 옛집'과 '스와니강의 추억'을 원어로 부를수 있던 친구는, 나중에 뉴욕에서 의사를 하던 우영이와 나였다. 이렇게 숫끼도 있고, 문무겸전(文武兼全) 자부하던 내가 혜정이 앞에서는 여지없이 초라해지곤 했다. 나는 나뭇꾼이고, 혜정이는 선녀였다. 나는 노틀담 탑을 오르는 곱추 '콰지모도'였고, 혜정이는 '지나롤로부리지다' 였다. 아름다운 이국의 짚씨 여인처럼 눈섶이 가늘던 것이 혜정이 얼굴이다. 나의 감정은 그만 생각하면 항시 술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혜정이만 보면 내 몸 속에는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전류가 흘러가곤 했다. 나는 그가 나타나면 떨기만 하였다. 이런 컨트럴 불가능한 강렬한 고압전류가 나의 불행이었다. 혜정이에게 쓸 편지 인용구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간 3년 동안에 내가 읽은 책은, 백여권이 넘었을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짝사랑'. 톨스토이의 '부활' '전쟁과 평화'. 토스토엡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헬만헷세의 '페터카멘친트' '데미안' '싣달타' '청춘은 아름다워라'. 궤테의 '파우스트'. 한스카롯사의 '성년의 비밀'. 섹스피어의 '햄릿' '로미오와 줄리엩' '맥베스'. 사머셑모음의 '면도날'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토마스 하디의 '테스'. 에밀리부론테의 '폭풍의 언덕'. 뒤마휘스의 '춘희' '마농레스꼬'. 나타니엘호손의 '주홍글씨'. 릴케의 '말테의 수기'. 룻소의 '참회록'. 밀턴의 실락원'.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 '전원교향악'. 앙드레말로의 '인간의 조건'. 스땅달의 '적과 흑'. 빅톨유고의 '레미제라불'. 보들레르의 '악의 꽃'. 까뮈의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레마르크의 '개선문'. 싸르트르의 '자유의 길'. 훼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바다와 노인'등이다.
얼마나 책 속의 많은 아름다운 여성들이 혜정이었던가. 혜정이는 매번 '아쌰' '잔느' '줄리엩' '테스' '넨나' 였다. 그 상대방은 나였다. 짝사랑은 나를, 연애소설 탐독자에서 문학청년으로 만들고, 일기를 쓰게하고, 철학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나는 운동선수에서 사색하는 청년이 되었다. 혜정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사범대 체육과에 갔을 것이다. 졸업하여 체육선생이 되었을 것이나.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철학과엘 갔고 졸업 후 신문기자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내 집 서재에는 그 책들과, 성장하면서 글씨체가 몇번이나 바뀐 오래된 일기장이 소중히 꽃혀져 있다. 영어를 인용한 유치한 내 소년기의 빛바랜 일기장이 40년 전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처럼 딱 멈춰있다.
내가 은퇴한 후 수필가가 된 것도 혜정이 덕분일지 모른다. 꽃을 보고, 달을 보고, 구름을 보고, 낙엽을 보고, 바다를 보고, 산을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산책 하면서, 여행 하면서 느낀 청소년기의 모든 감정은 혜정이 한테 보낸 편지 속에 있다. 그러나 그 많은 편지 어느 한구절도 혜정이에게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보고싶다' '그립다'는 표현만 있었다. '만나자'는 것은 하나의 불경 (不敬)이었다. 그는 나의 여신(女神)이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한 영혼의 성장과정이 소롯이 담긴 그 수천통의 순정 편지를 지금도 혜정이가 간직하고 있어서, 한편이라도 돌려준다는 가설이 불가능한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