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진주라 천리길/4

김현거사 2011. 6. 16. 21:19

 

 

 

   진주라 천리길/4

 

 아침의 즐거움이 대밭의 새소리를 듣는 것이라면, 저녁의 즐거움은 달빛을 구경하는 일이다. 소희가 사는 집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배경 같다. 앞은 강이고, 강 건너는 절벽이 높이 솟아있다. 항상 청풍명월이 지나가곤 했다. 대밭에 달이 배회하는 밤, 두 사람은 밤 늦도록 오지 탕관에 하얀 연기를 올리며 바둑을 두었다. 바둑판은 그녀 아버지가 물려준 것이다. 또하나 남긴 것은 추사 글씨 주련(柱聯)이다. ‘조용히 앉은 곳에 반 쯤 익은 차의 첫향기가 일어나고(靜坐處 茶半香初). 묘용을 얻은 때에,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妙用時 水流花開)’. 이 주련은 글씨도 명품이지만, 뜻도 깊다. 차의 진수를 꿰뚫은 사람 아니면 내놓을 수 없는 절귀다. 선(禪)에서 지관(止觀)이란 말이 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한 경지에 이른 경우를 지(止)라 하고, 생활에서 일어난 일체 현상을 깨우친 상태로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추사는 이런 고요한 명상의 경지를 시로 읊어낸 것이다. 조주(趙州)선사는 제자들이 불교의 적적대의를 물으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喫茶去)'라는 선문답을 했다고 한다. 차와 선(禪)은 동일 경지다. 차선일미(茶禪一味)인 것이다.

소희 아버지가 남긴 차반(茶盤) 역시 귀한 물건이다. 그것은 오래 땅 속에 묻혀서 지열로 석탄처럼 광택이 나는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것이다. 소희는 차를 내올 때, 이 희귀한 차반에 청화백자 다완을 얹어 내오곤 한다. 소희는 아버님이 남긴 차반처럼 귀한 여인이다. 차를 마실 때 화병에 꽂은 차화(茶花)같이 향기로운 여인이다. 차라는 것은 안개와 이슬 많은 곳, 달빛과 물소리 맑은 곳이 제격이다. 솔바람 소리나 대나무에 비 맞는 소리가 들려, 죽로(竹爐)에 차 끓이는 소리가 잘 들리는 곳이 최상의 장소이다. 죽림 속의 한옥이라, 소희가 사는 곳이 그런 곳 이다. 별빛이 맑아 꽃이 청초하게 피는 곳, 소희가 사는 곳이 그런 곳 이다.

진주의 효당(曉堂) 최범술스님은 <한국의 차도>란 저술에서, 차도의 진면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였다. '화로에 불 피우고, 물을 끓이고, 물 끓는 소리에서 솔바람 소리를 듣고, 찻잔을 씻고, 다실을 청소하며, 다기(茶器)나 서화, 정원의 멋을 감상하면서, 달과 흰구름 벗삼는 고요한  사색의 생활'을 주장하였다. 까다롭고 복잡한 다른 차론은 군더더기로 보았다. 차에 관한한 전라도가 의제 허백련이라면 경상도는 효당 최범술이다. 그는 젊은 시절 박열의사와 일본천황 암살 계획을 세워 상해에서 폭탄을 운반해오고, 조선불교청년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한 분이다. 진주에서 차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효당의 차 이론을 따른다.

 

 바둑도 도이고. 차 마시는 것도 도다.  두 사람은 달빛 속에  차를 즐기었다. 깊은 밤, 바둑 두고 차 마시는 일 외엔 시 읊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소희는 아버님한테 한시를 배웠다. 달빛이 좋으면, 청련(靑蓮)거사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읊었다. <꽃나무 사이 술 한 병 놓고 앉아, 아무도 없이 홀로 술을 따르네. 밝은 달 마주하여 잔 들어 올리니, 나와 그림자와 달 셋이 되었네>.  이때 소희는 달 속의 항아가 되고, 김교수는 적선(謫仙)이 되었다. 소희는 이 시의 마지막 대목이 특히 안타까워 했다.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깨어서는 함께 즐거이 마시고, 취하면 헤어져 각기 흩어지네. 무정한 교류를 영원히 맺었으니, 서로 다음엔 아득한 은하에서 만나세'란 구절이다.  이 대목에서, ‘저는 꽃 피는 봄, 잎 지는 가을의 서럽고 야속한 시간 속에 산목련처럼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행운으로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다음에 아득한 은하에서 만나자는 구절이 너무 슬퍼요.' 소희는 하소연 하며, 겨운 눈빛으로 김교수를 한참 바라보곤 했다. 얼굴을 와락 김교수 어깨에 파묻기도 했다. 난초처럼 깨끗한 머리칼로 김교수 뺨을 간지럽히기도 했다. 늦게 만나 서럽다고 했다. 슬퍼하는 소희의 모습은 심양강 달빛 아래서 비파를 타던 여인 같았다. ‘비파행(琵琶行)’에서 백락천의 푸른 옷소매를 눈물로 축축히 적셨던 비파를 연주한 슬픈 여인이 소희였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세속과 맞지 않고 타고나길 자연을 좋아했네. 어쩌다 세속의 그물에 떨어져 어느듯 삼십년이 흘러버렸으니, 조롱속의 새는 옛숲 그리워하고, 연못의 물고기는 옛 웅덩이 생각하듯이, 남쪽 들 가장자리 황무지 일구며 본성대로 살려고 전원으로 돌아왔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한 김교수의 심정과 딱 어울리는 내용이다. 달빛 속 강 건너 절벽 위 약수암 모습 보며, 이율곡의 <산중(山中)>이란 시를 읊기도 했다. <약초 캐다 홀연히 길을 잃었는데(採藥忽迷路) ,봉우리마다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千峰秋葉裏). 산에 사는 스님 물 길어 돌아간 뒤(山僧汲水歸), 숲 끝에 차 달이는 연기 피어오르네(林末茶煙起)>.

 간혹 강에 나가, 함께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은쟁반같이 달을 바라보기도 했다. 청아한 달빛을 향하여 차를 올리기도 했다. 채석강 달을 붙잡으려다 익사한 이태백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피어오르는 강안개를 바라보며, ‘교수님을 영원히 사랑해도 되지요?’  소희는 새삼 젖은 음성으로 다짐하곤 했다. '당신은 마치 월궁 선녀 같아요.' 김교수는 소희의 어깨를 다정히 안아주곤 하였다.

                                                                                                          (4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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