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진주라 천리길/최종회

김현거사 2011. 6. 16. 21:20

 

   진주라 천리길 /終

 

 옛부터 ‘북평양 남진주’라는 말이 있다. 평양과 진주는 풍광 명미하고 인재 많기로 쌍벽인 곳이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남강은 시내를 통과하며 흐르고,  바다같이 넓은 진양호는 산을 바다 속 섬처럼 만들어 아름다운 호반길을 보여준다. 평양에 부벽루가 있다면 진주에 촉석루가 있다. 평양 권번과 냉면이 유명하다면 진주 권번과 냉면이 유명하다. 진주는 남강변 촉석 바위와 강 건너 푸른 대숲과 백사장이 볼만 하다. 촉석루를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읊었다. <왜적들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고 숱한 세월 흘러, 붉은 누각 우뚝히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강물에 그 옛날 꽃다운 가인의 춤추는 모습 비치고, 단청 새긴 기둥엔 길이 장사들의 시가 쓰여있네 >. 뒤벼리 새벼리 두 벼랑은 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다. 서쪽 서장대에 오르면 넓은 평거 들판을 끼고 남강은 흘러오고, 밤이면 호국사 종소리가 울린다. 진주 일대는 고령에서 하동까지 무진장한 고령토 광맥이 뻗어있다. 많은 도자기 가마들이 산재해있고, 도예가들도 흔하다. 일본이 국보로 꼽는 이조다완을 만든 발원지가 인근의 진교 백련리라는 설이 있고, 보통 큰 음식점 접시는 대개 도예가가 만든 백자나 분청을 쓴다. 다방은 수석과 골동품이 으례 한두점씩 있고, 고졸한 글씨나 오래된 그림이 걸려있다. <진주라 천리길 내 어이 왔던가. 연자방아 돌고돌아 세월이 흘러가듯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은 늙었더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졌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더라>. 남인수의 대사가 흐른다. 대가야 유적지인 합천에는 무심히 사용한 개 밥그릇도 가야토기였다고 한다. 안의 거창 일대는 강굽이마다 오래된 정자가 세워져 있고, 선비가 머문 고가가 많다. 남자들은 남명선생을 닮아 포부가 크다. 請看千石鐘(보게나 천석들이 종을) 非大叩無聲(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爭似頭流山(어쩌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하늘이 울어도 울지않을까).  남명의 시처럼, 작은 일에 대범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여자들은 논개를 본 받아 정열적이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강남콩 보다 푸른 마음 바탕에 양귀비꽃보다 붉은 정열을 가졌다.

 두사람은 진주 육회비빔밥집을 찾아가기도하고, 서장대를 거닐고, 호국사와 논개 사당을 탐방 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암(義岩)을 선비 안종창은 이리 읊었다. <여인이 의를 위해 죽었으니 두가지 덕을 이루었네. 맑고 옥같은 자태에 늠름한 눈서리 같은 지조로다. 왜적 하나 죽였다고 말하지 마라. 모든 간담이 하나같이 철렁했으리라. 여인이라고 작다고 말하지 마라. 만명 장부의 팔같이 휘둘렀네. 강물에 바위돌 닳지 않아 천년 세월 의리가 남아있다네>. 논개의 의기사(義妓司)에는 또하나의 명기, 산홍의 충절을 읊은 매천(梅泉) 황현의 시와  산홍의 시가 나란히 걸려있다. 촉석루 바위 벼랑에는 산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매천야록>에는 그가 내무대신이던 매국노 이지용의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는 ‘세세년년’이란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는 혼자 버리기냐. 너 없는 내가슴은 눈 오는 벌판이다. 달 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 진주는 특히 여인이 아름다운 고도(古都)다.

 촉석공원 아래에는 골동상가가 많다. 한번은 김교수가 거기서 청옥 쌍가락지를 발견했다. ‘이 반지가 혹시 논개가 왜장을 껴않고 강물에 뛰어들 때 섬섬옥수에 끼었던 것이 아닐까?’ 김교수는 그 옥가락지를 소희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진주 여인 아니면, 누가 선생님같은 선비한테 이런 희귀한 청옥 가락지를 받는 행복을 가질 수 있을까요?' 가락지를 낀 소희는 이렇게 말했다. '진주 여인이 아니면, 아무나 소희씨처럼 시를 알고, 순결한 사랑을 아는 그런 여인이 있을가요?' 김교수가 응답했다.

 

 소희를 만난 이후 김교수에겐 대학의 여름 겨울 두 방학이 지루했다. 두달간 진주에 갈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9월이 오자, 김교수가 기쁜 마음으로 진주로 떠났다. 덕유산 지나면 육십령터널 나오고, 터널 지나면 지리산이 보인다. 함양 서상 지나면 남강 상류 경호강이 나오고, 경호강 따라가면 진양호가 나온다. 호반의 버들은 벌써 노란 추색이 띄우고 있었다. 진양호만 바라보아도 김교수의 마음은 쿵쾅거렸다. 곧 소희를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서장대 아래로 바삐 차를 몰아 소희가 살던 <습지원> 근처로 갔을 때다. 군데군데에 '아파트 부지 조성' 이라는 큰 팻말을 세워놓고, 불도저들이 터를 닦고 있었다. 넓은 들판이 온통 공사판이다. 소희가 살던 집터를 어림하기 어려웠다. 그래 김교수는 일하는 인부에게 물어보았다. '이 근처 어디에 있던 한옥을 혹시 모르시오?' 그러자 사내가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 근처는 원래 집이 없었고, 무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니 여기에 무덤만 있었다고요?'  놀래서 묻자, '나도 잘 몰라요. 소장님한테 가서 물어 보시오.' 김교수는 현장소장에게서 자세한 이야길 들었다. '원래 그 자리는 백년 전 무덤이 있었습니다. 청화백자와 오래된 바둑판이 나와서 진주 박물관 직원이 나와서 가져갔습니다. 유허에서 청옥 쌍가락지도 나온 걸로 보아 아마 사대부가 여인의 무덤이었지 않느냐고 합디다.' 그 뒤부터 김교수는 진주엘 가면 약수암에 묵었다. 거기선 소희가 살던 강건너가 보인다. 나무관세음보살! 생주괴공(生住壞空)이 연(緣)에 의한 것이라지만, 이승을 초월한 사랑은 어디서 오는것인지요? 김교수는 그때마다 매번 부처님에게 물어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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