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길/3
그 후로 두사람은 실낙원의 연인이 되었다. 김교수는 진주에 내려가면 으례히 소희 집에 머물었다. 평소에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별과 별처럼 멀고 먼 존재다. 그러나 일단 한번 맺어지면 한 몸이 된다. 신비한 현상이다. 소희의 집은 강돌로 만든 낮은 꽃담이 있다. 문 밖은 전원이다. 반송(盤松) 심은 넓은 묘판과 배나무 과수원이 보인다. 당(堂) 앞에 커다란 석류나무가 서있고, 앵두나무 심어진 우물 옆에 연못이 있다. 연못 속에 석가산이 있어 구부러진 매화나무가 반쯤 누워있다.
소희 아버님은 남명(南冥)을 흠모하던 제자였다. 남명처럼 매화를 사랑하고, 초의처럼 차도를 즐겼다고 한다. 소희도 매화를 사랑하고 차를 즐겼다. 두사람은 봄이면 ‘산청 삼매(三梅)’를 구경하러 다녔다. 단속사(斷俗寺)에는 정당매(政堂梅)가 있다. 이 매화는 단속사에서 공부한 통정공 강희백이 나중에 정당문학(政堂文學) 대사헌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 부른다. 소희는 그 강희백의 손자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의 배경이 소희가 사는 집 앞 약수암 밑 남강을 닮았다고 하였다. 김교수가 가보니 과연 비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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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 예담촌의 원정매(元正梅)는 고려말 하즙(河楫)의 집에 심은 매화다. 그 매화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매(古梅)다. 7백년 세월에 용틀임한 채 죽었지만, 집 뒤에는 강이 흐르고, 집 앞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다. 산천재(山天齋)에는 남명선생이 심고 가꾼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소희 아버지는, 거기서 매실을 주워와 손자뻘 되는 매화를 집에 심고 가꾼 것이다. 이 세 매화를 <산청 3매>라 부른다.
두사람은 가을이면 영남예술제를 보러 다녔다. 후에 개천예술제로 이름 바꾼 이 예술제는 우리나라 예술제의 효시이다. 예술제가 열리는 가을의 진주성은 낭만적이다. 오래된 고목들은 단풍에 물들고, 거리는 국화꽃 가득하다. 시가지는 인근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 이루고, 수백대 포장마차는 각종 먹거리 선보이고, 브라스밴드 행열은 청춘남녀의 마음 설레게 하고, 경찰은 인파 정리에 바쁘다. 남강에는 유등이 수놓아지고, 하늘에는 폭죽이 터진다. 사람들은 낭만에 들뜨고, 도시는 흥분에 술렁인다. 거리는 시와 음악과 무용이 낙엽처럼 흩날린다. 리오의 삼바축제나 베니스의 곤돌라축제 연상시킨다. 이런 개천예술제를 통해 진주 청년들은 시인이나 수필가로 성장한다.
두사람은 손을 잡고 그 속을 헤매다녔다. 유등을 보며 김교수는 고교 시절 한 여학생 이름을 등에 적어 물에 흘러보낸 일을 회고하기도 했다. 소희는 달빛 속의 의암에 올라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주 출신 이형기의 <낙화>를 외기도 했다. 밤늦은 포장마차에서 ‘그것은 머언 벌판에 눈이 오는 소리다. 차라리 그것은 머언 벌판에 비가 오는 소리다. 강물처럼 나직이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진주 출신 최계락의 <낙엽>을 외기도 했다. 소희는 시를 아는 여인이다. 이당(以堂) 김은호의 미인도 속의 여인이다. 분명한 것은 소희는 호화저택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 은퇴한 늙은 남편 나몰라라 집에 두고 밖으로만 돌아다닐 마님도 아니다. 소희는 새벽에 일어나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대밭을 바라보는 여인이다. 그때 대밭은 화가가 그린 풍죽도(風竹圖)가 된다. 댓잎은 이슬에 젖는다. 바람에 흔들린다. 새는 날라와 지저귄다. 소희는 풍죽도 속의 여인이 된다. 죽림은 청초하고 소희도 청초하다. 두 사람은 간혹 새벽에 향을 피워놓고, 밝아오는 남강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곤 했다. 김교수는 그 모두를 사랑하였다.
소희는 촉석공원 아래서 커다란 백자 수반을 구해와 연꽃을 키웠다. 7월이면 넓은 연잎 속에서 연꽃이 피어오른다. 그 그윽한 모습은 집 분위기를 맑게 만든다. 소희는 밤에 오무라지는 연꽃 속에 차봉지를 넣어둔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그 향기로운 차를 김교수 앞에 내놓았다. ‘수반 속에 거름 대신 오징어 조각을 넣으면 연꽃이 더 소담하게 피지요.’ 지식을 자랑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불경을 좋아하고, 목탁소리를 좋아했다. 간혹 배를 타고 강 건너 약수암을 찾아갔다. 안개 낀 부드러운 물살을 가르며 강을 건너노라면 피안으로 가는 것 같았다. 둘은 부처님 전에 ‘지금 우리가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말게 해주소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소희 집에는 아버님에게 물려받은 유물이 많다. 작은 이조다완과 초화문 접시들이 있었다. 소희는 청화백자에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이 접시들을 보물처럼 아꼈다. 철 따라 딸기나 자두, 비파같은 과일을 거기 담아내오곤 했다. 빨간 딸기, 자색 자두, 노란 비파는 하얀 백자에 비치면 너무나 깔끔하였다. 소희는 계절을 아는 여인이다. 대바구니에 딸기나 자두가 담겨 나오면 여름이고, 감이나 배가 나오면 가을이고, 계피 우린 수정과가 나오면 겨울이다. 비 온 뒤엔 꽃모종 옮기고, 죽순 따러 다니는 일이 둘의 줄거움 이었다. ‘요즘 남강엔 은어가 귀해요.’ 소희는 은어가 귀해졌다고 가끔 하소연 했다. 죽순회에는 은어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소희가 만든, 산초와 오가피잎 튀김, 곰취나 산마늘 장아찌, 조개살 다져넣은 전을 좋아하였다. 식사는 대개 간결하였다. 아침은 검은 깨 뿌린 잣죽이고, 저녁은 산채였다. 나물은 텃밭에서 키운 것이다. 텃밭이 천여평 되었다. 그 가운데 무화과 복숭아 감나무같은 나무들이 있어 그때 그때 제철 과일이 열렸다. 비닐 하우스에는 겨울철 딸기가 열렸다. 연못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고, 물 속에 붕어와 논고동이 있었다. 그 옆에 사람 키 높이의 대나무 허리 네 귀퉁이를 칡넝쿨을 엮어 만든 원두막이 있다. 그 위에 올라가 바둑 두는 일이 둘의 즐거움 이었다. 소희는 항상 두사람이 다 남강가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음을 천지신명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곤 했다.
소희는 완벽한 진주 스타일 여인이다. 간혹 김교수가 서울 버릇대로 설겆이 하러 부엌에 들어가면, ‘남자는 절대로 부엌에 들어오면 안돼요.’ 웃으며 김교수를 몰아내곤 했다.
(3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