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진주라 천리길/2

김현거사 2011. 6. 16. 21:16

 

 

 

    진주라 천리길(2)

 

 그 뒤부터 김교수는 진주에 가면 꼭 그 집엘 들렀고, 여인은 그가 갈 때마다 창 밖을 내다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탱자꽃 하얀 향기를 풍기던 어느 초여름이다. 그날은 여인이 평상에다 밥상을 차렸다. 나동면 골짝에서 뻐국새가 목매이게 울던 날 이다. 바람은 부드러웠다. 따끈한 쌀밥에 사근사근한 묵은지, 싱싱한 나물들과 노릇노릇한 갈치구이는 아득한 옛날의 고향 음식이다. 그가 서울에선 꿈도 못꾸던 음식이다. 그걸 섬섬옥수라고 한다. 여인은 대나무 뿌리로 손잡이를 만든 백자주전자에 머루주를 담아왔다. 가늘고 매끈한 손이 아름다웠다.

‘주인도 한잔....’

김교수가 잔을 권하자, 꽃잎에 바람이 스치듯 여인의 얼굴에 복숭아빛 홍조가 어렸다고 한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받더라고 한다. 꽃같은 입술이었다. 잔을 비우자, 문득  ‘선생님 명함 한 장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굴을 붉히며 말하더라고 한다. 더 가까운 느낌인 모양이었다. ‘은퇴 후는 이 명함 밖에 쓰질 않습니다.' 김교수는 직함은 없고 단지 수필가라고 쓴 명함을 건네주었다.

‘저는 밝을 소(昭), 계집 희(姬), 소희라 부릅니다.’

아마 자기 이름을 먼저 말하기 거북했던 모양이다.

‘내 고향은 원래 진주고..., 소희씨 고향도 그렇지요?’

‘저도 진주인데, 어릴 때는 쌍계사 근처에서 컸습니다.’

‘쌍계사? ’ 

김교수는 중국의 장수촌(長壽村)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은 야생 국화가 무성한 산에서 흘러내리는 약수를 마시고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장수했다는 곳이다. 김교수는 자기도 쌍계사 근처에 다원을 차리려고 몇번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길 해주었다.

‘ 쌍계사 근처에 좋은 땅이 있는데요.  시간 내시면 제가 그 땅을 한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석창포가 자라고, 야생 차나무가 자생한다는 것이다. 마치 김교수가 좋아하라고 미리 말하는듯 하더라고 한다.


 그후 두 사람이 그곳을 방문했다. 쌍계사 위에는 의신마을이 있다. 거길 거쳐서 벽소령쪽으로 올랐다. 계류는 바위 사이로 부드럽게 흐르고, 함박꽃인지 산수국꽃 알 수 없는 꽃향기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더라고 한다. 물소리 바람소리만 들리고 인적은 없었다. 소희가 안내한 땅은, 천여평 되는 땅이었다. 바위 곁에 야생 차나무가 듬성듬성 보였다. 물가에 요즘 귀한 석창포가 군데군데 군락을 지어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석창포는 뿌리가 용처럼 얽힌 것을, 옛날 선비들의 책상에 올려놓고 아끼던 것이다. 단오 때 여인들이 그 물에 머리 감던 것이다.  물은 층층 폭포를 이루어 쏟아지는 것이 마치 비단천을 펼친듯 했다. 알 수 없는 물고기가 힘차게 헤엄치고 있었다. 신선이 사는 땅 같았다.

‘환상입니다.’

김교수가 감탄하자, 소희는 네 귀에 정성스럽게 꽃을 수놓은 비단 누비보를 펼쳤다. 그속엔 술과 정갈한 음식이 들어있었다. 술은 야생복숭아주 였다. 선도주(仙桃酒)라 불리는 술 이다. 물가에 넓직한 바위가 있었다. 두 사람의 그 위에 앉았다. 소희는 자개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김교수에게 주었다. 그가 음식을 먹고나면, 하얀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아주었다. 여기 오자, 소희는 완전히 연인처럼 행동하였다. 더 적극적인 쪽이 소희였다. 그는 김교수를 만나자, 이 분이 지금까지 자기가 그리워한 분인걸 깨달았다고 실토했다. 김교수도 동감이었다. 소희같은 여인이 그동안 그가 그리워한 꿈 속의 여인이었다. 둘은 처음 본 그 순간이 바로 운명이었다. 서로 강력하게 끌린 것이다. 여기엔 서로 밀고당기는 사랑노름 따윈 필요없었다. 솔직함만 있었다. 상대를 애태우게하는 기교 따윈 필요없었다. 바람은 부드럽고, 노을은 물 위에 황금빛을 띄우고 있었다.

‘바로 여기가 내가 찾던 무릉도원 같습니다.’

‘여긴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한 땅이에요.’

‘그럼 사랑하는 연인 두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땅에서 상봉한 셈이군요.’

김교수 말에 소희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비 맞으며 솔 모종 옮기고

구름에 쌓인 대사립문 닫네.

산에 핀 꽃은 수놓은 장막보다 좋고,

뜰 앞의 잣나무는 비단휘장이 되네.>


 김교수는 흥에 겨워 한시 한 수를 읊었다. 그 때문에 사건이 급진전 되었다고 한다.

 

<고요한 향료에서 피는 연기 마주하고

한가한 돌다리 위 살찐 이끼 바라보네.

아무도 와서 내게 무엇 묻지마라

나는 일찌기 세상과 맞지않네.>


여인이 그 후렴을 읊더라는 것이다.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원감(園鑑)국사의 시다. 그 시를 아는 여인을 만나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다. 김교수는 너무나 감격해 말을 잊었다고 한다.  ‘나는 일찌기 세상과 맞지않으니, 아무도 내게 와서 묻지를 말라’는 싯구는 속세를 등진 고승의 시다. 그런 고고한 시를 외는 여인을 만나다니! 그건 정말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한 평생 기다려도 그런 여인은 얻지 못하는 법이다.

‘아예 여기서 둘이서 야생 차나무나 키우며 삽시다.’

김교수가 대화를 급진전 시키자,

‘교수님이 차나무 키우시면, 저는 그 곁에서 시중 들며 차나 끓여 들일께요.’

여인이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 들리는 것은 오직 물소리 뿐. 김교수는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넘쳐오름을 느꼈다. 그래서 단정히 앉은 소희의 손목을 가만히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낮에 이러시면 어떡해요? 기분이 이상해져요’

소희가 당황한 듯 손을 빼려하였다.

‘싫어요?’

‘아니예요.’

김교수가 소희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기자, 하는듯 마는듯한 가벼운 저항이 있었다. 소희는 눈을 감은채 입술을 열어주었다. 떨리는 입술이었다. 촉감은 하얀 배꽃같았다. 차갑고 향기로왔다. 바위 위의 푸른 이끼는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2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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