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첫사랑< 3편>

김현거사 2013. 1. 24. 20:55

   첫사랑< 3편>

 

 케엘케골의 '유혹자의 일기'를 보면, 관념에서 시작해서 관념으로 끝난 사랑이 있다. 나의 경우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 실제 만난 일은 전혀 없었다. 실타래처럼 얽힌 생각만 산처럼 높고 물같은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턴넬에는 끝이 있기 마련, 7년의 짝사랑도 끝이 있었다.

   이때 혜정이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나는 군인이었다. 나는 명문대에 입학하여 서울로 왔으나, 나와 가장 친하던 철수라는 친구는 재수를하여 진주에 남았다. 이틀이 멀다하고 서로 편지를 교환하였는데, 그는 어느날 주약동 굴 속 철도에 투신자살하였다. 그래서 나는 마치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뭐르소’처럼 되고 말았다. 군대에 자원입대 하였다. 문학 동경하는 젊은이가 흔히 그러듯, 허무와 죽음을 무슨 훈장인양 겉에 내비치고 다녔다. 끝나지도 않은 사랑을 실연인양 미리 절망하기도 했다. 일부러 난잡한 서면 하이에리아부대 근처 사창가와 술집을 헤매다녔다.

 그러다가 혜정이 혼처가 정해진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부랴부랴 임시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가 교사로 근무하던 문산초등학교를 찾아갔다. 나는 군복 상하의를 빳빳이 풀먹여 다려입었다. 모자의 병장 계급장은 광약으로 반짝빤짝 딱고,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군화도 미끄럽게 칠했다. 수송병 빨간마후라를 목에 걸쳤고, 어깨는 떡 벌어지고, 허리는 잘룩하고, 걷어올린 팔뚝은 구리빛 억센 근육으로 덮혀있었다. 내 생애 그렇게 외모에 신경 쓴 일 두번 다시 없다.

 

  문산초등학교 운동장 푸라타나스 그늘 아래는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온종일 화랑담배를 피우며 기다렸고, 이윽고 교정엔 하학종이 딸랑딸랑 울리자, 재잘거리는 활기찬 초등학생들 흐름 속에 퇴근하는 혜정이가 보였다. 코스모스 하늘대는 신작로 길을 따라가서, 석탄연기 품으며 들어온 기차에 올라갔다. 기차 안은 '오징어 땅콩!' '석간신문이요!' 행상들 외침소리, 마른 미역 등을 선반에 올려놓은 장사꾼 아줌마들 소리가 요란했다. 기차 통학생들은 그런 소란을 틈 타 슬쩍 좋아하는 소녀 옆에 닥아가 말 붙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군 부대에서 자살한다고 칼빈 실탄을 지니고 다녔고, 외출 나가서 15P 헌병을 구타하여 내무반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남자사회에서는 맹견같이 굴던 내가, 혜정이 앞에 서니 작은 어린 양이었다. 영주의 따님을 사모하는 중세 기사처럼 나는 온순했다. 그 당시 내 영혼에 수소폭탄처럼 큰 충격을 가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은 물리적인 외부의 어떤 위협이나 힘이 아니었다.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신(神)은 내 생명 어딘가에 그렇게 반응하도록 회로를 심어놓았던지 모르겠다.

 

 기차가 주약동 터널을 통과하니 진주역 이다. 역은 돌아오는 사람을 마중나온 사람들과 택시들과 여인숙 호객꾼들로 혼잡하였다. 이 틈을 이용하여 혜정이에게 닥아가서 말을 건네려고 작정하였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상대방이, 수업 중에 학교 교정에서 서성거리고, 기차를 타고 따라온 군인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다. 정상적인 개찰구 방향이 아닌 반대편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 길은 망진산 쪽 들판길이었다. 길은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노란 벼이삭을 바지가 스치자 메뚜기가 툭툭 튀어올랐다. 대지엔 감미로운 바람이 불고, 간신히 산 허리에 남은 황혼은  붉은 빛을 던지고 있었다. 저녁 안개가 들판에 가득 덮혀 있었다. 산 위의 외딴 집 굴뚝 연기는 조용히 허공으로 오르고 있었다. 혜정이는 <스와니 강변>의 제니 같았다. 천천히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치 내가 닥아가 무슨 말을 해보라는 듯 고개를 숙인채 한 자리에 멈춰섰다. 그 순간 이다. 내 가슴의 고동은 안타깝게 왜 그렇게 쿵쾅쿵쾅 크게 뛰기만 했던가. 일종의 감격과 환희였는지 모르지만, 심장이 너무나 쿵쾅거리는 바람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입은 바짝 말랐고, 다리는 허공을 밟듯 휘청거렸다. 뭔가 말을 하려하니 턱이 덜덜 떨려 한마디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곁으로 한걸음이나마 닥아가려고 걸음을 떼려하니 발이 떨려 걸을 수가 없었다. 쿵쾅쿵쾅 뛰는 내 심장의 고동소리를 혜정이가 들을까봐 오히려 겁만 났다.  나는 한 그루 사시나무였다. 그 자리에서 그냥 떨고만 있었다. 고통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감정만 안타깝게 내 속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덮히고 멀리 동네의 등불이 별처럼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혜정이와 나란히 서있던 그 감미롭던 시간이 몇분인지 몇초였던지 모르겠다. 그리고 혜정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고 가버렸다. 그는 먼 유성에서 날라온 요정이었다. 이렇게 첫사랑은 가버렸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것은 한 여름밤의 꿈이었던지 모른다. 그러나 손자까지 둔 이 나이에도, 아직도 내가슴 속에는, 황혼의 안개 덮힌 들판과, 어둠 속에서 별처럼 깜박이던 마을의 등불과, 고개 숙이고 서있던 한 소녀 모습이, 천 권의 서사시보다 황홀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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