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좌판 할머니

김현거사 2012. 4. 3. 19:57

그날 봄바람은 마치 바람난 여인 같았다. 방향이 없었다. 앞에서 불다가, 뒤에서 불다가, 옆에서 불었다. 서초역 3번 출구 옆에 좌판 놓고 앉은  할머니가 있었다. 그 할머니 싸구려 스카프 아래 헝크러진 머리칼을 앞으로  옆으로  뒤로,  획획 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탱고 추는듯 했다. 하필이면 평생 춤 한번 못춰본 할머니 머리칼 갖고 봄바람이 왜 이리 작난을 치나 싶었다.

 

 좌판 위 까만 비닐봉지 속에 빼꼼히 얼굴 내민 것은 쑥, 냉이, 달래였다. 아마 3만원 장사 밑천 들고 가락시장에 가서 새벽장 봐왔을 것이다. 3월이라도 서울은 봄이 아니다. 차그운 날씨에 하루 종일 시멘트 바닥에 앉아 바람에 시달리는 것은 차라리 형벌이다. 가난이 무슨 죄인가 싶었다. 강남 대로변은 땅 한 평 5천만원 이상 한다. 그 위에 달랑 3만원 어치 물건 놓고 장사한다고 종일 앉아있는 것이다. 쑥과 냉이와 달래도 그랬다. 눈에 밟히듯 그리운 고향 뒷동산에 가장 흔하게 돋아나던 낮익은 것들이다.

 

  농투성이 영감 돌아가신 후, 서울 사는 새끼들 따라 왔을까. 아들 며느리 둘 다 일 나가고, 빈집에 배고픈 제비 새끼같은 손자들만 있을까. 서초역은 법원과 검찰청 있는 곳이다. 법관들과 변호사들은 승용차 타고 다닌다. 아파트가 없으니 주부들이 올 리 없다. 장사 자리 잘못 잡은 것이다. 미처 그런 건 생각도 못하는 눈치다. 그냥 아무데나 자리 잡은 모습이 바람에 날라온 민들레 씨앗같기도 했다. 하기사 민초란 다 잡초 아니었던가. 바람까지도 없는 사람에게 작난을 치는 서울 바닥이다. '할머니 이 쑥 모두 얼맙니까?'  그분의 까칠한 손에 5천원을 쥐어드렸다. '쑥은 이따가 와서 갖고 가겠습니다.' 속으로 점심 요기는 어떻게 해결 했을까 하면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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