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바다와 노인

김현거사 2012. 3. 26. 23:18

미조에서 한 외로운 노인을 만났다.어느 날 노인이 조용히 혼자 뗀마를 저어와 배를 대더니,끝에 납뭉치가 주렁주렁 달린 그물을 메고 내려왔다.땅에 그물을 내려놓고,가족은 없는지 혼자 쭈그리고 앉아 그물코를 하나씩 옆으로 제치고 있었는데,내가 곁에 가보니,그 속에서 집게발 허우적거리는 게와 아직 살아있어 펄떡거리는 전어 숭어도 나오고,성게 소라 해삼도 나온다.

재미도 있고 부럽기도 해서,노인에게 담배를 권하면서,‘고향이 여기시냐’고 묻자,노인은 내 ‘파고다’ 고급 담배는 윗포켇에 넣고,자기 뒷주머니에서 풍년초를 꺼내 신문지로 잎담배를 말아 물더니,고향이 문산이라고 대답하였다.

나도 고향이 진주라고 하자,'진주와 문산은 넘어지면 코 닿을 데지.'진주 문산 삼십리 길을 이리 묶는 그 마음에 혼자 사는 타관살이 외로움이 비쳤다.얼굴과 손마디는 그을어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지고,반백의 머리칼이 덮힌 목덜미는 주름이 골처럼 깊었다.그날 노인은 내게 전어 몇마리와 해삼을 나눠주었다.

 

나도 문학 한답시고 성경과 원고지 몇장 들고 제대후 무작정 섬에 간 사람이다.따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날  이후 노인과 자주 만났다.만나면 담배를 권하고 자주 막걸리를 사면서 어울려 다녔다.노인은 바다에 관해 정통하였다.장어나 게나 문어를,조개와 고동이 어디 많은지,어떻게 잡는지,포인트와 물 때를 잘 알고있었다.

해그름에는 장어가 잘 잡힌다.노인은 날 데리고 등대 밑 석축에 나가서,덕지덕지 붙은 굴을 몽돌로 까서 바늘에 낀다.몽당 낚싯대를 바다에 던지고,봉돌 무게를 감지하며 바닥에 놓았다 당겼다 하노라면,툭하고 장어 어신이 손에 느껴진다.보통 크기 삼십센티 짜리가 당길 때 몸통으로 물 속을 휘젓고 버티는 힘이 여간 강한 것이 아니다.물 속에서 손맛 짜릿하게 올린 장어는 몸체의 미끌미끌한 점액질이 많아 그 미끌미끌한 몸을 손바닥에 호박잎을 깐 손으로 꽉 쥐고 바늘을 빼낸다.간혹 장어가 바위 틈에 들어가 버티어 툭!하고 터져 빈 낚싯대만 휘청 허공을 때릴 때가 있었다.그러면 노인이 친절하게 새 줄을 달아주곤 했다.

문어나 게도 재미있었다.문어는 허허벌판처럼 넓디넓은 물 빠진 갯뻘을 망태 등에 지고 돌아다니며 잡는다.문어는 꼭 사람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뻘밭을 돌아다니다가,인기척이 나면 재빨리 굴로 숨는다.굴 옆에 가서 가만히 기다리면  이놈이 성질이 지긋하지 못해 얼마되지 않아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데,이 때 장대 끝에 매단 낫으로 획 낚아챈다.게걸음이란 말이 있어 게가 느릴 것 같아도 게가 좌우 옆으로만 내뺄 때는 번개처럼 빠르다.동작도 빠른 데다가 이놈 집개가 오죽 무서우냐.그래 무지막지하게 낫으로 등짝을 콱 찍어 잡았다.값 나가는 소라 전복이 어디 많은지 노인에게 배웠다.소라나 전복은 미역같은 해초를 먹고 살아서 우선 해초 많은 곳을 찾아야하고,해초는 뿌리를 바위에 내리니 물 속에 바위 많은 곳을 찾아야 한다.조개는 백사장에 살고,가리비고동은 파도 아래 떼로 몰려 산다.

노인은 자기만 알고 비밀로 해두었음직한 가리비고동 있는 비밀 장소를 파격적으로 나에게 알려주었다.송남초등학교란 곳 앞바다다.거기서 나는 가슴까지 차오르는 파도 속을 발로 더듬어 모래 속의 가리비고동 잡아,바께스 채 삶은 가리비고동을 밤새도록 먹은 적 있다.가리비는 보통 한 곳에 몇가마 넘게 무리 지어 살아 노다지 같았다.그러나 노인은 뭐던지 한번에 다 잡는 법 없이 필요한 만큼만 잡았다.


간혹 두 사람만의 해변 파티를 열었다.내가 막걸리를 사고,노인은 요리했다.노인은 장어를 예리한 칼로  능숙하게 뜨고,물엿과 생강 넣은 양념장 바르고 숯불에 굽는다.이런 노인의 비법 양념장 바른 장어구이는 느끼하지않아 얼마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문어는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살짝 익혀 뜨거운 김이 오를 때 도마 위에 듬성듬성 썰어 놓았다.달콤한 초장맛과 어울리던 문어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게는 원래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수서생물로,게살은 수륙(水陸)의 진미(珍味)를 한몸에 지녔다'고 임어당이 유식하게 설명하지만,실제 오래동안 바다 체험을 이 노인처럼 해본 것은 아닐 것이다.노인은 게 중에서 제일 맛있는 부분,게껍질 안에 붙은 누렇고 흰 황고백방(黃膏白肪)을,항상 나에게 권했다.고동도 구울 때 껍질 속에 고이는 파란 국물이 보약이라며 나에게 주었다.

노인의 손맛을 하얀 모자 쓴 도시의 일식 주방장이 따라올 수 있을까?노인은 장어 문어 게 소라 미역 톳나물에서 바다의 천연 미각을 살릴 줄 알았다.그가 만든 음식은 해풍 냄새가 나고 뻘맛이 짙게 났다.몇월 무슨 고기가 알배기고 기름진지 노인은 알았고,그 시기에 잡아 요리했기에 더 맛있었다.바닷가에서 수십년 자란 고목의 낡은 가지처럼 노인의 손은 쭈굴쭈굴했지만,그 낡은 가지처럼 노인의 손도 바다의 일부였다.노인의 손은 배워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비로운 자연의 오묘한 맛을 갖고 있었다.해변 파티의 유일한 손님이던 나는 어느 재벌도 누리지 못한 바다의 진미를 혼자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바다는 노인에게 커다란 창고였다.냉장고였다.바다는 싱싱한 물고기와 조개와 해초를 키워서 노인에게 주었다.바다는 노인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는 주님이었다.식사 때 일용의 양식을 주옵신 주님께 감사기도하는 기독교인보다 노인은 더 진실되게 식사 때마다 바다에 감사하는 눈치였다.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지식이나 양심 종교까지 팔고,절개를 버리고 의리를 배반하고 남을 속이고,심지어 마약과 술을 팔고 매춘까지 불사한다.그러나 노인은 바다에 순응하고 감사하면서 겸허히 단순히 살 뿐이다.노인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얻는 가장 신성한 직업은 농부나 어부임을 깨달았다.

헤밍웨이는 '바다와 노인'에서 불굴의 의지를 지닌 한 노인을 보여주었지만,나는 미조의 한 노인에게서 단순하면서도 겸허히 감사하며 사는 수도승같은 평화를 발견했다.노인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내가 젊을 때부터 가졌고 지금도 풀지못한,질문의 원초적 해답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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