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금강경을 읽으면서

김현거사 2012. 6. 20. 09:04

금강경을 읽으면서

  아침엔 금강경을 읽는다. 정원에서 향 피우고 경을 읽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금강경은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경이다. 책 읽다 눈 피로하면 나무를 본다. 명상에 잠겨보기도 한다. 

 감나무와 목련은 녹음이 한창이다. 목련은 과거 시점이다. 흐드러진 꽃이 화단을 낙화로 어지럽히다가 갔다. 지금은 잎만 무성하다. 감꽃 떨구는 감나무는 미래 시점이다. 감은 여름 지내고 가을이라야 붉은 홍시가 되기 때문이다. 비스듬히 고목이 된 살구나무는 현재 시점이다. 연분홍 꽃빛은 갔고, 파란 살구를 달고있다. 노랗게 익기 전이라, 과거와 미래 중간 시점이다. 나무 셋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점을 보여준다.

 조계종이 의존하는 경전은 반야심경과 금강경이다. 둘 다 불교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불교 사상이 대체로 어렵다는 평을 받지만, 금강경은 그렇지 않다. 몇번 되풀이해서 읽고있다. 여기서 <마음>도 없고 나도 없다는 요지만 잘 터덕하면 팔만사천 그 많고 복잡한 대장경 볼 필요없다. 

  <마음>이란 놈은 알 수도, 붙잡을 수도, 얻을 수도 없는 놈이라고 한다. 그냥 空이라 한다. 놈은 어디 있는가. 신체의 속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신체의 안과 밖에 같이 있는가. 다 아니다. 따지고 보면 어디에 있지도 않다. 마치 불과 같다. 불이 돌 속에 있는가. 쇠 속에 있는가. 공기 속에 있는가. 돌과 쇠가 부딪쳐서 불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불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돌이나 쇠를 가루로 만들어본들 불이 나오겠는가. 인연이 만들었을 뿐이다. 어제 생각 오늘 다르고 오늘 생각 내일 다르니 계속 변하는 생각 중 어느 것이 내 마음인가.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가 없어진 것이니 알 수가 없다. 현재심이라는 것은 따지고보면 없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가 갈라지는 점(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 현재라고 생각할 때에 벌써 그 현재는 이미 지나가버리고 미래가 현재가 된다.그러므로 지나간 현재가 과거요, 오지않은 현재가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니 현재니 미래니 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의 갈림점을 가정해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같이 <마음>의 위치도 없는데 <나>란 것이 있겠는가. 

   금강경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마음>과 <내>가 없을뿐 아니라, <세상>도 없다고 한다. 세계를 부수면 먼지(티끌)이 되고, 먼지가 모이면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지나 세계나 따로 제 實相이 없다. 오직 끊임없는 변화만 있을 뿐이다. 제행무상이라는 것이다. 고착된 <세상>은 없고 있는 것은 오직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만 있다고 한다. 그 변화는 무어라고 이름 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 한다. 고정할 수 없으니, 이름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法은 말과 글자가 아니라고 한다. 생각을 떨쳐버리고 그 어느 것에도 머무르지(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이것이 불교철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지구가 돈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조계종단 밥을 축내며 불교신문 기자를 했었다. 사회 첫발을 조계종의 목탁으로 시작했으면서도 현재도 평소에는 <마음>이 있듯이 생각한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 읊는다는 말 있다. 그런데도 풍월커녕 아직 짖지도 못하는 강아지다. 뭐가 싫고 뭐가 좋고 시비가 많다. 마음에 끌려다닌다. 희노애락을 글이라고 수필을 쓴다. 하근기의 업보일 것이다.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진리 하나만 몸으로 얻으면, 그대로 여래요 부처라고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마음> 공부한 것은 근 40년 세월이 어느새 흘렀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데, 어쩌면 길은 이토록 멀고 아득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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