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그리운 나무

김현거사 2012. 7. 13. 09:48

   그리운 나무

 

  사람도 그리운 사람이 있지만, 나무도 그리운 나무가 있다. 나무 중에 품격 높고 아름다운 나무가 있으니, 청순 가련형은 배꽃이요, 시적 낭만형은 매화요, 태고 선인형은 솔이다. 그러나 이런 나무들이 다 그리운 나무가 되는 건 아니다. 미인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만인 선망의 대상이긴 하나, 미인이라고 다 그리운 사람일 수는 없다. 그리움은 반드시 나와의 인연을 필요로 한다.

 

 내 나이 쯤 되면 그동안 살면서 그리운 나무가 한 둘 있기 마련이다. 그 나무 생각하면, 그 주변 풍경이 떠오르고. 그리운 사람들이 수채화처럼 자동으로 떠오르는 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진주 신안동 언덕 위에 대밭에 둘러쌓인 삼칸 기와집이 있었다. 우리 큰집이다. 추석에 가보면, 정지 앞 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감들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먼 길 걸어서 오가던 시절이다. 찰랑찰랑 한 대접 건네주는 샘물 마시며 바쁘게 눈길이 더듬는 것은 감이다. 어느 놈이 더 익었나. 어느 놈이 더 큰가.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을 비교해가며 입맛 다시곤 했다. 나무에 무수히 달린 감은 내 마음을 한없이 행복하게 하였다. 손자의 특권은 이 감을 아무리 따먹어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 점이다. 겉은 주황빛이고, 속은 까만 점이 박힌, 그 감을 '아마가끼'라 불렀다. 감은 가지 끝이 휘도록 늘어져 내가 손 뻗히면 잡히는 편리한 위치였다. 또하나 편리한 점은 감나무가 바로 대청 앞에 있어 닿기 쉬운 점이다. 또하나 편리한 점은 껍질을 깍을 필요가 없는 점이다. 그 감 때문에 나는 큰집에 갈 때 마다, 매번 가을의 풍요를 느꼈다. 그 감나무는 행복을 주렁주렁 단 나의 꿈나무 였다.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할 때, 나는 그 단감나무를 생각한다. 나중에 천여평 그 집을 팔 때 가장 아쉽던 것도 그 단감나무 였다.

 배건너 우리집에 있던 나무는 떫은 감나무 였다. 그러나 가을이면 홍시가 볼만했다. 잎 떨어진 가지와 홍시에 앉은 하얀 서리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깍깍 까마귀는 날아와 우짖었고, 홍시는 늦가을이 될수록 맛의 절정에 이른다. 차급고 농익은 그 맛은 제호(醍醐)를 앞선다. 석양에 보아도, 달밤에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 홍시다. 대문 안에 홍시 늘어진 감나무 있는 아이는 행복하기 마련이다. 훗날 내가 화랑에 가면 그 앞에 가장 오래 머무는 그림이 있다. 감나무 그림이다. 사진작가 작품도 마찬가지다. 감나무 사진을 만나면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버린다. 가을에 제일 먼저 사오는 과일은 홍시다. 한겨울에 가장 좋아한 먹거리는 곶감이다. 내가 서울서 살았던 집은 모두 일층이었다. 그 모든 집에 감나무를 심었다. 감은 나에겐 고향의 詩다. 

 

  두번째 그리운 나무는 푸라타나스다. 소년 때 여름방학은 할 일이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시골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나는 말못하는 매미와 고추잠자리와 놀 수 밖에 없었다. 넓은 교정을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큰 푸라타나스 나무가 있었다. 푸라타나스 밑은 하루 종일 그늘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그늘에 쉬는 한마리 양이었다. 논의 자운영도 보고, 공터의 크로바도 보았다. 논가의 뜸부기 소리도 듣고, 나무 속 뻐꾸기 소리도 들었다. 나는 꽃에 날아다니는 벌과 나비과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씰룻씰룩 씰룩대는 쓰르라미, 맴맴 우는 매미 소리 들으며 한 여름을 보냈다. 황혼은 떼지어 다니는 고추잠자리 군무 속에 아름다웠다. 나는 푸라타나스 품에 찾아온 한마리 딱다구리 였다. 나무 아래서 풋잠에 들기도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싱싱한 푸라타나스 향기를 맡기도 했다. 나무로 올라가는 개미를 골리기도 했다.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뭉게구름도 나의 친구였다. 면사포마냥 하늘을 가린 구름, 명주실 모양 줄무뉘를 이룬 구름, 비늘 모양으로, 목화처럼 생긴, 모든 구름이 나의 친구였다. 하늘은 구름이 날라다니는 도화지 였다. 나무잎은 푸르렀고 뭉게구름은 아름다웠다. 간혹 책을 가져갔지만, 나는 책보다는 매미소리를 더 유심히 들었다. 고추잠자리를 더 오래 보았다. 꽃을 더 오래 보았고, 벌과 나비의 춤을 더 오래 감상했다. 싱싱한 푸라타나스 잎을 흔들던 시원한 바람을 더 즐겼다. 나는 거대한 푸라타나스 밑에서 자연을 배웠다. 

 그리고 고향 떠난지 50여년 세월이 갔다. 이제 노인이 되었고, 할 일이 없다. 출근할 일 없어 영원한 방학을 맞은 셈이다. 자식들 분가했으니, 집안도 조용하다. 간혹 새벽에 일어나서, 은퇴 후는 자연을 관조하며 살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한다. 이제 나는 나의 인생이 처음으로 되돌아갔음을 느낀다. 이제는 흰구름과 하늘과 녹음과 친구할 일 밖에 없다. 사람들과의 일은 대충 끝난 것이다. 산비둘기 소리, 쓰르라미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럴 때 고향의 푸라타나스 나무가 눈 앞에 떠오른다. 시간 저쪽의 푸라타나스가 눈 앞에 나타난다. 그 푸라타나스 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고향의 흰구름, 푸른 하늘이 새삼 그리워진다. 간혹 거리에서 푸라타나스 가로수를 만난다. 그 때 나는 문득 고향 지인을 만난듯한 몽클한 감회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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