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It's lonesome oldtown

김현거사 2020. 2. 4. 12:26

 It's lonesome oldtown


 현미의 '밤안개' 원곡 가사는 처음 'It's lonesome oldtown, when you're not alone.'으로 시작되는데 뒤는 생각나지 않는다.

 20년 전 나는 진주의 한 목로주점에 어떤 여인과 단둘이 앉아있었다. 시간은 자정 넘은 시간이고, 위치는  YMCA 앞인 것은 기억나는데, 골목 어디 쯤이었는지, 좁은 2차선 길인데 기억 희미하다.

 어쨌던 차를 집 앞에 세우고, 나는 불문곡직 불꺼진 주점 문을 녹크해서 잠든 여주인을 만났다. 문을 열어준 정란이는 백열전등 스위치를 켜고 파자마 바람인채 주점 안에 서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타향살이 20년에 멜랑코리 훔뻑 젖은채, 고향 온김에 밤늦게 초등학교 여자 동창집 찾아온 것이다.

 정란이와 나는 과거 무슨 연분 있던 사이도 아니고, 인연은 둘다 초등학생 시절 육상선수로 여름방학 때 교정에 나와서 선생님 지도를 받은 일 밖에 없다. 그러나 정란이는 여고 다닐 때 대대장으로 '맥아더'란 거창한 별명으로 남학생들이 다 알만치 유명했고, 체격 작고 시근방 먼저 떠는 꼬맹이 남학생이 남자라고 괜히 뭐라고 치근덕거리면 혼쭐 내주는 그런 여걸이면서, 덩치가 비슷한 나에겐 유독 여자티를 내며 수줍음 떨던 그런 정도의 사이였다. 

 나는 63년도에 서울 올라와 그후 대학 나왔지만, 직장이 여의치못해 오래 동안 고향 못간 고독과 서글품에 잔뜩 찌든 초라한 중년이 되고 말았고, 정란이는 첫 결혼이 파탄나고, 그 뒤 진주 모 검사와 복상사라는 이상한 소문 남긴 정사 끝에 술집을 차렸고, 얌전전한 주부들인 여고 후배들이 쉬쉬 하며 기피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세월 속에 두 사람 다 인생의 애수를 알만한 나이로 변해있었다.

 이렇게 만나 그녀 침실에 개다리소반 술상 하나 놓고 마주 앉았다. 서로 잔이 비면 채워주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모처럼 찾아온 고향은 타향 같다는 것, 친구들 소식은 전혀 모른다는 것을 말했다. 출세도 못했고, 고향에 와도 너무 허전해서 정란씨가 여기 산다는 소식을 사촌 여동생한테 듣고 반가웠고, 내일 새벽에 회장 모시고 함양 양왕릉으로 갈 형편이라, 시간이 없어 한밤에 잠시 얼굴이나 보고갈려고 찾아왔다는 걸 이야기했다. 정란이는 내가 K대에 진학한 것, 가장 친하던 철수가 자살한 후 자원입대하여 월남에 갔다는 소문, 서울서 신문기자 한다는 소문은 알고있었다. 

 나는 정란이가 여고 후배들과 연락 끊긴채 사는 것이 마음 아파, 왜 차라리 마산이나 부산 같은 타향에 가서 살지 않느냐고 물었고, 정란이는 그래도 고향은 떠나기 싫었다는 쓸쓸한 대답을 해서 내마음을 찢어놓았다. 

'이번에 다녀가면 10년 20년 뒤에 언제 또 올지 모르겠네요?'

정란이가 물었고, 나는 머리를 끄떡였다.

정란이는 휴가차 온 군인 아들을 옆방에 가서 깨워 데려왔다.

'엄마 초등학교 동창이신 김선생님께 인사 올려라.'

아들은 엎드려 큰 절을 올리고 물러갔다. 

이렇게 정란이와 만나고 헤어진 것이 20년 전이다. 

밖에 나오니 골목길엔 안개가 가득했다.

'정란씨 먼저 들어가세요.'

'아니요, 창현씨가 먼저 떠나세요.'

그렇게 차는 떠났고, 뒤를 돌아보니, 정란이는 밤안개 속에 떠나가는 차가 보이지않을 때까지 못 박힌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후 서울로 올라온 몇 년 뒤에 나는 정란이가 죽었다는 소문을 풍문으로 들었다.

(2006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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