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낮은 데로 임하소서

김현거사 2017. 6. 26. 15:00

 

 낮은 데로 임하소서

 

 우리집 뒤에 큰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무 둥치가 엄청나고 높이는 내가 사는 아파트 3층 보다 위로 한참 솟았다. 나는 간혹 그 나무를 바라본다. 새벽에 명상하면서 보기도 하고, 밤에 별이 총총한 나무를 보기도 한다. 봄엔 신록, 여름엔 소낙비, 가을엔 낙엽, 겨울엔 적설을 본다.

 

 간혹 나무 잎이 소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어느 날 이런 소리를 들었다.

'맞은 편 아파트 3층 그 교수님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며?'

'글쎄 말이야. 교수라고 운동은 너무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만권서(萬券書)를 머리에 담았으면 무슨 소용이랴? 한번 가면 못오는게 인생인데 어리석어.'

'4층 벤츠 타는 그 양반 알지?'

'그래, 맨날 골프채 차에 싣고 다니는 사람?'

'그가 얼마 전에 대장암 말기 판정 받았어. 무슨 큰 회사 회장이라는데.'

'싫컿 벌어놓고 아까워서 우짜꼬?'

'5층 사는 부인이 탈렌트 보다 미인이던 사람 알지?'

'알지. 성격 차분하고 인사성도 있어 보이던데?'

'맞아. 왕년에 기획원 고위직에 있었다 하더라고. 그가 전과자래. 경제 사범으로 감방서 3년 썩고 나왔는데 그 통에 부인은 바람을 피웠더라고. 그 집구석 1년 365일 전쟁이래!'

 

 나는 나무 잎들이 소근거리는 소릴 듣고 깜짝 놀랐다. 적어도 5층 그 양반은 나와 마주치면 서로  인사도 잘하고 친하게 지냈다. 겉으로 얼마나 차분하고 젊잖던가? 그런데 젊잖은 개 부뚜막 먼저 올라간 셈이다. 이 엉컴 첨지 바람쟁이 부인 컴비라? 세상 참 희극이다. 

 4층 벤츠 타는 그 인간은 내 처음부터 반갑지 않던 인간이다. 사람 눈에 뻔히 보이는 위치에서 못본 척 승강기 문 닫고 올라간 인간이니까. 같은 동 있어봐야 주차하다가 벤츠차 부딪힐까 신경만 쓰게 만드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걸 모르고 저 혼자 잘나서 모가지 뻗뻗하게 기브스하고 다니는 꼴이란?

 3층 교수 그 양반이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늙어 저승 가기 직전까지 옆집 할배한테 지적 우월감 비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은 애교로 봐주자. 상복 입은 애처러운 부인 남겨놓고 간 그가 그래도 셋 중 나은 편이다.

 

그런데 이웃들이 모두 문제 있는 걸 알고보니, 간혹 막걸리 마시고 귀가하는 사람이 생각이 착잡하다. 도대채 이 아파트 누구하고 벗하고 살아볼까? 그때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다리 절던 장애인 노인이다. 그분은 몇 층에 사는진 모른다. 만날 때마다 인사를 잘 한다. 텃밭에 물 줄 물통 실으면 승강기 정지버튼 꾹 눌러놓고 기다려주곤 했다. 그 노인 생각하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 노인한테 고추 상추 조금씩 갖다 드리자.

 

 갑자기 기독교 성가 한구절이 떠올랐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겸손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돈이나 지식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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