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봄은 오케스트라처럼 시작된다

김현거사 2017. 3. 19. 10:35

 

 

  봄은 오케스트라처럼 시작된다

 

  봄은 오케스트라처럼 시작된다. 봄비는 소리없는 청소부다. 우선 무대 먼지를 깨끗이 씻어버린다. 그 다음에 봄이다 봄이다 산새들이 부산하게 운다. 그때 쯤 애잔한 꽃이 핀다. 동백꽃이다. 그 꽃은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 같다. 비올레타를 만나면 풀륫처럼 청아한 목소리로 우는 새가 있다. 동박새다. 

 

 

 동박새 울면 '호오, 호케꼬, 케꼬' 휘파람새도 운다. 그 소리는 목동의 뿔피리 같고 휘파람 소리 같다. 휘파람새 소리 듣고 먼저 얼굴 내미는 건 수선화다. 수선화는 동토의 여인이다. 얼음 뚫고 솟은 신비로운 알뿌리는 정갈한 여인의 발목같이 희다. 불어오는 봄바람은 왈쓰 다. 바람에 수선화가 발레를 시작한다. 봄바람은 하얀 토슈즈(Toe Shoes)를 들춰보고 간다.

 

 수선화와 친구가 매화다. 둘은 해마다 누가 먼저 꽃이 피나 경쟁한다. 매화는 봄비를 좋아한다. 젖은 얼굴이 더 청초하기 때문이다. 매화는 몸으로 향수를 만든다. 콤팩트 없어도 향기가 난다. 매화는 평생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남에게 팔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제2장은 개울물에서 시작된다. 졸졸졸 소리 듣고 피는 꽃이 진달래 꽃이다. 진달래는 이웃 동네 마실나온 시골 여인이다. 엷은 루즈만 발랐다. 팔목에 옷도 걸치지 않았다. 호젖한 산길 보라빛 입술이 유혹적이다. 숲이나 바위 뒤로 사람을 유혹한다. 겨울은 산길로 혼자 걸어 가버렸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이때 두견새는 이렇게 노래한다.

 

 미당은 '귀촉도(歸蜀途)'에서 진달래를 이리 읊었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진달래 단짝 친구는 개나리다. 개나리는 키다리 소녀다. 가는 손목에 수많은 황금의 종을 늘어뜨리고 있다. 바람 불면 개나리 옆에서 은은한 황금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릴 입에 물고 노란 병아리가 삐약삐약 줄달음질 친다. 개나리는 황금향에서 온 소녀다. 팔목에 감은 초록빛 손수건이 인상적이다. 

   

  삣쫑 삣삐 삣쫑! 종달새가 청보리밭 높이 치솟으면 오케스트라는 절정이다. 벌과 나비 나타난다. 벌은 웅웅대고, 나비는 너울너울 춤 춘다. 논둑에 돌미나리, 냉이, 달래, 민들레, 씀바귀 돋아난다. 

 산 너머 남촌에서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나? 미풍은 불고 하늘은 옅은 청자빛이다. 지지배배 제비는 새끼 치고, 박새, 곤줄박이, 직박구리는 오케스트라 단원이다. 풀륫, 크라리넷 혹은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한다. 대지는 은총과 축복에 덮힌다. 성스런 봄의 음악회가 열린 것이다. 

 

 산도 가만 있지 않는다. 여인의 젖가슴처럼 봉긋봉긋한 봉오리, 드러누운 황소의 허리처럼 보드러운 능선에다 수를 놓는다. 산벚꽃은 수놓은 기모노를 입히고, 느티나무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입히고, 버들은 연초록 저고리 입힌다. 그 중 가장 이쁜 복숭아꽃은 목월이 '산도화(山桃花)'란 시에서 이리 읊었다.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은 발을 씻는다.' 

 

 꽃들은 사육제의 밤 가면무도회 초대 받은 아가씨들 같다. 목련은 옥으로 만든 연꽃을 손에 들고, 배나무는 비단 쇼올 목에 감았다. 저마다 차려입고 설렌 가슴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이 장면을 김춘수는 이리 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꽃의 여왕 모란이 지면 3개월 봄은 끝난다. 

 

영랑이 이리 읊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면 봄의 축전도 끝난다. 오케스트라는 막을 내린다. 더이상 수선화와 매화를 볼 수 없고, 두견새 종달새 곤줄박이 노래를 들을 수 없다. 벌 나비 춤판도 볼 수 없다. 

 

  이렇게 5월이 가고나면, 여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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