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마음 편하게 살기

김현거사 2016. 11. 21. 09:22

마음 편하게 살기

 

 은퇴 후부터 마음 편하게 살기로 작정했다. 우선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주부터 달리 해석하기로 했다. 사실 사람은 입고, 먹고, 사는, 이 세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먼저 입는 것부터 생각을 백 팔십도 전환했다. 그동안 직장 다닐 때 입던 옷이 장롱에 빼꼭하게 차 있다. 아들 딸 결혼시킬 때 장만한 정장도 두 벌 다 아직 새것이다. 양복 뿐 아니라 점퍼같은 평상복도 많다. 등산복도 모자도 충분하다.

 그래서 아예 죽는 날까지 새 옷 장만 하지 않기로 맘 먹은 것이다. 신라 시대 경주 낭산 아래 살던 백결선생은 집이 가난하여 해어진 옷을 100군데나 기워입었다고 한다. 나라고 백결선생 본 받아 옷을 백번 기워입고 산다고 누가 탓하겠는가?

 수입 없는 노인네가 유치원 아이처럼 새 옷 자랑하는 건 보기 좋지 않다. 오히려 옛 옷 멋있게  입어야 잘 나가던 젊은 시절 모습 보인다.

 

 먹는 것도 간결히 줄여버렸다. 모든 비만의 원인은 음식조절 못한 데 있다. 당뇨나 고혈압은 식습관과 관련 많다. 그래 나는 반찬을 세가지로 줄여버렸다.

 

 청담스님이 도선사(道詵寺)에 계실 때 일이다. 도선사 스님은 아침에는 반드시 죽을 쑤어 먹도록 했다. 그 죽에도 조건이 붙었으니, '죽이 밖에서는 하늘이 보여야 하고, 방안에서 들여다보면 죽에 천정이 그대로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멀겋게 쑤라'고 하셨다.

 

 또 하나 일화도 있다. 스님이 정화 종단의 총무원장 시절에 한번 동국대 불교학과에 다니던 따님 묘엄스님이 찾아갔다.

'니 점심 묵었나?'

'예, 저는 먹고 왔습니다.'

 그런데 스님 밥상에 밥 한 그릇, 국 하나, 김치 한 접시, 그리고 간장 종지 하나가 달랑 놓여있다. 그래 묘엄스님이 가슴이 허전해서,

'아이구 스님...공양상이 이래 허전해서 어쩝니까?'

했더니,

 '공양상? 이기 이래도 나한테는 한 가지가 더 있는기다'

 '무엇이 한 가지 더 있다는 말씀 입니까?'

'그래도 오늘은 간장이 한 가지 더 올라왔구먼. 중 밥상 3찬이면 족한기다'

하셨다고 한다.

 

 나야 고승은 아니지만,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산해진미사 왕년에 다 먹어보았다. 늙고 시들은 몸 음식 탐 해서 무엇하나.

 

 집에선 이리 노력 하지만 밖에 나가면 먹을 것 천지 아닌가?

 결혼식장 부페에 가면, 초밥 메밀소바 타코야끼 등 일식, 탕수육 팔보채 베이징덕 등 중국음식, 불고기 갈비찜 잡채 등 한식, 그 밖에 수박 참외 등 각종 과일, 도미회 민어회 우럭회 등 각종 회, 호박죽 전복죽 등 각종 죽, 새우 오징어 고구마 등 각종 튀김, 수박 참외 감 배 사과 바나나 등 각종 과일, 빵 심지어 콜라 사이다 맥주 소주까지 다 있다. 

 

 언제 한번 마트나 백화점에 가보시라. 바지락 새우 홍합 꼬막 성게 해삼 전복부터 시작해서, 생태 갈치 꽁치 꼴뚜기 게 대하 도루묵 갑오징어 천지다. 육고기는 갈비만도 닭갈비 소갈비 돼지갈비가 있고, 돼지고기도 앞다리 뒷다리 등심용 찌개용 로스용 따로 있다. 닭도 삼계탕 황기백숙 오골계 따로 있다. 시금치 고들빼기 알타리 당근 고구마 감자 홍고추 꽈리고추 파프리카 버섯 있고, 자몽 대봉감 귤 포도 대추 도마도 파인애풀 복숭아 밤 배 모과 등 각종 과일 있다.

심지어 물도 제주도 한라산 설악산 백두산 생수 있고, 동해 해저 4백 미터에서 퍼올린 해양심층수도 있다. 

이 모든 걸 카드로 쓱 귿고 집에 돌아오면 배달까지 된다.

 

 또 배달음식 광고지 살펴보라. 밥 하기 싫은 사람 전화 한 통화면 자장면 짬뽕 잡채밥 탕수육 난자완스 깐풍기 득달같이 배달 오고, 제육덧밥 김치덧밥 육개장 칡냉면 생맥주와 치킨까지 배달온다. 

아마 조선 조 임금도 이런 전국 특산품 풍족히 맛볼 수 없을 것이고, 특히 완벽한 냉장상태 해산물과 육류는 기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는 집은 어떤가?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미안하다.

 이게 서민 사는 집인가 왕궁이지. 아파트 단지에 후궁은 아니지만 한 칸에 한 명씩 천 여명 여인이 산다. 무수리같은 젊은 처자도 많다. 매일 오가는 그 자태 혼자 감상하는 일 싫지 않다.

 정원도 왕궁 못지않다. 덕수궁보다 더 넒은 정원에 각종 수목 심겨져 있다. 라일락 철쭉 영산홍 목련 백일홍이 철마다 꽃을 피운다. 봄이면 벚꽃 향기 천지 진동하고, 가을이면 감이 익고 모과가 익는다. 귀여운 손자뻘 어린 왕자 공주 타라고 그네와 미끄름틀 있고, 유치원 있고, 빨가둥이들 목욕하라고 수영장도 있다. 소나무는 그 밑에 바위가 있어 운치 있고, 단풍은 그 아래 산책길 있어 정취 있다.

 

 내가 거처하는 방은 오르내릴 때 공중에서 내려오는 수레 타고 오르내리고, 문 나서면 대영제국 황실 근위병은 아니지만 수위가 차렷자세로 경례 부친다. 방은 항시 냉난방 되어있고 한겨울에도 온수 펑펑 나온다.

 리모컨 돌리면 미국 러시아 독일 일본 세상사 알 수 있고, 수많은 방송사 수시로 국내정세 보고한다. 음악이나 춤 원하면 가수가 노랠 불러주고, 무희는 여체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보일 둥 말 둥 가린 채 춤 춘다. 피지 타히티 남국 바다 볼 수 있고, 에베레스트 몽불랑 록키 히말라야 세상 산 다 볼 수 있다. 빠리 런던 뉴욕 북경 뒷골목 다 볼 수 있고, 호랑이 사자 늑대 하이에나 맘대로 볼 수 있고, 심지어 로마 원형경기장 검투사처럼 피 흘리고 싸우는 이중격투기도 볼 수 있다.

 

 입는 것은 백결선생처럼 입고, 먹는 것은 청담스님처럼 먹고, 사는 곳은 덕수궁과 비교하니, 마음 한번 후련하다. 사람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을 부러워 하고 무엇을 근심할 것인가. 날 맑으면 등산 하고, 달 밝으면 달 보고, 목마르면 약수 마신다. 가을 산에서 칡 뿌리 몇 개 감국화 몇 줌 얻었다. 낙은 그 속에 있다(樂亦在其中). 올 겨울은 칡차 감국차 몇 모금으로 넘길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