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해운대 엘레지

김현거사 2018. 4. 30. 11:14

해운대 엘레지

 

 내 불로그에는 흘러간 노래가 많았다. 마리린 몬로의 <The River of No Return>, 앤디윌리암스의  <Moon river>  같은 노래다. 그런데 최근에 그 노래들이 몽땅 날라가버렸다. 음반 보호법 때문이다. 곡은 사라지고 '관리자에 의해 중단된 동영상 입니다'는 멘트만 남았다.

 떠난 것은 우리를 허전하게 한다. 노래가 사라져 허전하고, 그 노래 함께 부르던 사람이 떠나 허전하다. 나는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불러보는 노래가 있다. '해운대 엘레지' 다.  그 노래는 나에게 해운대 백사장에 수없이 오고 또 가는 파도같이 추억이 밀려오게 한다. 그는 나에게 그리움만 남긴채, 이제는 정말  두번 또다시 만날 길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종대가 금년 봄에 이승을 떠났다.  '아버님이 오늘 돌아가셨다'는 따님 전화 하나로 만사는 끝났다. 스므살 때 종대 집은 두구동에 있었다. 부친이 원예고등학교 교장이라 종대 집은 천여평 정원이 있었다. 거기 장미가  만발했고, 큰 바위 옆에 냇물이 흘렀다. 우리는  달빛 아래 키타를 치며  <Moon river>와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렀다. 곁에 커다란 세파트가 누워있었다. 그 종대가 추억만 남겨놓고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불리는 그 강'( There is a river, called the river of no return)을 건너간 것이다.

 

  남부터미널에서 뻐스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니 옛 일이 주마등인양 스쳐갔다. 초등학교와 중학 동창인 그는 부산고로 진학했지만,  방학 때 진주 오면 나하고 어울렸다. 종대는 역기를 잘했고,  나는 평행봉을 잘했다. 둘 다 체격이 보통을 넘었고,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 호걸 같았다. 하나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이고, 하나는 맨손으로 버드나무 뿌리를 뽑은 노지심이었다.

 63년도에 나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친구가 자살하자 군에 입대했다. 운전병 되어 어느 토요일 기름 때 씻으려고  온천장에 갔다가 종대를 만났다.  종대는 그때 금정산 중턱에 토굴을 파놓고 운동만 하다가, 하산하면 건달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는 군대 이등병 계급장을 단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금방 해병대에 입대하여 부산진 헌병대에 나타났다. 그때처럼 종대가 근사해 보인 적 없다. 빨간 줄이 쳐진 해병대 헌병 헬멧에다 팔엔 뻘건 완장 둘렀다. 계급장은 마이가리 하사 계급장이다. 엄청난 거구가 탄  찦차  차체가 한쪽으로 비스듬이 기운채 다니는 모습은 부산진 역의 볼만한 구경꺼리 였다.
 그 시절이 종대 인생의 황금기였을 것이다. 휴가병은 기차마다 가득 타고와서 내렸다. 돈은 그가  '어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손짓 하며 눈만 치껴뜨면 들어왔다. 휴가병은  스스로 알아서 돈 내놓을 줄 안다. 그 돈 종대가 쓸 곳  딱 한군데 있었다. 토요일 외출나오는  229 자동차 대대 운전병한테다. 둘이 자갈치 횟집에 가면 십인분씩 먹어치웠다. 열차는 시간마다 들어온다. 배 꺼지면 종대는 열차에 올라갔다. 그때마다 주머니에 돈 채웠다.  

 때가 종대 제1 전성기다. 제2 전성기는 그가 박통을 만난 뒤다.  박통 만난 단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대하자 종대는 동사무소에 근무했는데, 박통 앞으로 편지를 한 장 띄웠다. 내용이 거창한 것이다. 

  '독일의 청년 나치스 당원,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보라.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이 모양인가?  데모 만능 시대이다. 왜 반정부 데모만 하는가. 나라가 썩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거 독일이나 일본처럼 애국 청년단을 만들 필요가 있다.' 

 원래 이 편지는 서울대 국문과 다닌 수광이 작품이다. 이걸 종대 이름으로 보냈는데,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이다. 박통은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 왔을 때 종대를 불렀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진 대통령이다. 거구의 종대를 보자 호감이 갔을 것이다. '자네 지금 무슨 일 하나?'  묻고, 동사무소에 근무한다고 하자,  ' 그럼 앞으로 어떤 일 하고싶은가?'  물었다. 그때 종대 대답이 걸작이다. '부산 시민 건강을 위해서 서면 위생계서 일하고 싶습니다.' 아주 몫 좋은 장소를 콕 찍어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통이 싱긋 웃으며 배석한 부산시장더러, '어이 임자! 이 친구 이야기 들었지?' 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후 서면 위생계 종대 서랍엔 봉투가 절로 쌓이더라고 한다. 방학때 마다 나를 부산으로 불렀다. 내가 광복동, 해운대, 송정 유명한 술집 다 가본 건 종대 덕이다. 여선생도 소개해주었다. 종대 친구 수광이가 당시 브니엘 여고 선생이다. 공주사대 체육과 나온 여선생을 송정 해수욕장으로 데려왔다. 수광이는 그 후 학교 그만 두고 남포동에서 가장 인끼있는 과외선생 되었다. 돈 만지자 시인이랍시고 문학하는 사람들과 남포동 바닥 좁다고 돌아다녔다. 연극 극본도 썼다. 어울리지 않는 그 덩치 종대는 옆에서 자기도 예술 하는 척 우쭐대고 다녔다.

 그런데 세상 일 호사다마다.  몇년 뒤 내가 신문기자 할 때 종대가 명동에 찾아왔다. 같이 내무부로 가자고 한다. 왜 그러냐고 하니 가면 안단다. 내무부 감사관실에 중학교 동기가 하나 있다. 그가 처음 고시 합격하여 부산 근무할 때 종대와 어울렸던 모양이다. 그는 종대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 D일보 기자를 폭행하여 지방판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난 후다. 감사관 친구는 종대 앞에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종대가 잠간 화장실에 가자 나에게 호소했다.

 '종대 일이라면 내가 무조건 나서야하지만, 이번 건은 내 목이 달아난다 '.

 나도 신문기자다. 사정 알만했다. 그래 종대를 데리고 나왔다.

 '뭐라더노?' 

 '니가 사표 써라. 잘 나가는 친구 신세 망쳐놓을 일 없다.' 

이렇게 종대는 공무원 생활 마감했다. 그후 종대는 작은 사업체 운영했다. 무슨 전기제품 만들던 회사다.

 종대는 용감은 하지만 섬세하지 못하다. 사업은 시작했지만, 잘 될리 없다.

 그후 내무부 감사관 하던 친구가 총무처 장관 되었을 때다. 종대 딴엔 '전엔 안봐줬으니 이번에는 부탁 하나 하자' 작정했던 모양이다. 그를 찾아갔는데 마침 날이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날이다. 행사 주무 장관이 제 자리에 있을리 만무하다. 종대가 노발대발했다. 약속을 해놓고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 화상아, 이건 니를 무시한 게 아니다. 주무 장관이 지금 행사장에 있지 널 기다리것나? 차나 한 잔 마시며 기다리자.'

이리 말해 기다리는데 장관이 행사 끝나고 바로 나타났다.

'어이! 니 출세했다고 사람 무시하나?'

종대 첫말이 이렇다.

'아니다, 강사장이 오늘 날 만나자는 용건이?'

그러자 종대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고개 돌린채 한참 말이 없다.

'김장관 오늘 바쁠끼다. 종대야 말을 해라.'

옆에서 재촉하니.

'내 좀 잘 봐도라.'

한다. 그게 용건이다. 웃음 터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알았다.'

 김장관도 나한테 눈웃음 치며 종대한테 대답했다.

 또한건 동키호테 행차가 있었다. 하루는 종대가 부산서 오도리 한 상자를 가지고 올라왔다. 종대 삼촌은 충남 지사 지낸 분으로 박대통령 누님 사위다. 신당동 누님댁 찾아간 것이다. 살아있는 생생한 오도리 상자를 내밀자 그 분 눈치가 백단이다.

'사돈 양반. 대통령은 친인척한테 남보다 더 냉정합니다. 오도리는 집에 먹을 사람도 없으니 가져가세요.'

한다. 그러자 공자 아니면 맹자다. 그걸 들고 강남 모 장군 댁으로 갔다.

'제가 해병대 **기 출신입니다. 존경하던 사령관님이 퇴역하셨다는 신문 보고, 이렇게 부산에서 비행기 타고 오도리 상자 들고 찾아왔습니다.'

오도리 들이대는데 싫어할 사람없다. 장군은 전날 밤 제대 회식하여  전작이 있는데도 양주 내오라해서 오도리 안주로 둘이 병을 다 비웠다고 한다. 뒤에 장군이 수협 회장 취임하자 종대는 거기 들락거렸다.  

  종대 친구로 부산에 수광이가 있고, 수광이 서울대 동기로 서울에 길웅이가 있다. 길웅이는 내가 신문사 퇴직하자 자기가 운영하던 '제2산업' 부사장 자리 내게 내놓았다. 길웅이 친구에 장천이가 있다. 장천이는 대치동 한샘학원에서 이름 떨친 명강사다. 장천이는 뒤에 내가 모그룹 비서실장 퇴직하자 날 불러내었다. 한샘그룹 케이불TV 사장직 제의했다. 종대 친구는 모두 양산박 도둑 같은 사람이다. 모두 한 성질하고 목소리 크고 선이 굵다. 사람은 친구 보면 사람 됨됨이 알 수 있다. 그러나 날 아껴준 종대처럼 나는 굵게 보답치 못했다. 딱 한번 이런 일은 있다.

  한번은 종대가 날 만나러 학교에 왔다가 벽보를 읽었다.

 '저기 장학생 명단에 있는게 니 이름 아니가?'

 장학금은 두 달치 하숙비에 해당됐다. 마침 전방에서 규용이도 휴가나와 있었다. 호전이까지 불러 넷이서 하월곡동 색주가로 갔다. 넷이 다 사람 아니다. 홀딱홀딱 마시다보니 중간에 그 돈 다 떨어졌다. 그래 우선 아가씨 팁부터 계산해주고 마담한테 가서,

'사실 내가 K대생인데 오늘 장학금 받아 여기서 마시다보니 돈이 바닥났는데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진흑 바닥에도 연꽃은 있다. 마담이 아가씨들 팁 어쨌냐고 묻고, 팁 먼저 계산했다고 하니,

'K대와 우린 서로 이웃사촌 아닙니까? 됐어요.'

이렇게 화통하게 나오더니, 네 명 취한을 네 명 아가씨 대동하여 버스 정류장까지 부축 전송해준 적 있다. 

  

   김해 장례식장에 닿은 시간은 밤 11시다. 조문객 돌아간 식장에는 하얀 상복 입은 부인만 있었다. 젊은 시절 꽃처럼 아름답던 부인이다.  수척한 눈빛이 마음 아팠다. 불시에 옛 일이 떠올랐다. 부인은 가덕도 출신으로 경남여고 출신이다. 종대와 맺어질 때 종대 집에서 말이 많았다. 규수가 미모이고 머리 좋은 건 틀림없지만, 양부모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종대 집안은 곤양에서 알아주던 가문이다. 곤양성 성에 집이 있었고, 삼촌이 박통 누님 사위다. 섬처녀를 종갓집 종손 며느리 삼는데 어른들 의견이 분분했다.

  '우짜모 좋것노?' 

종대가 나에게 전화 했다.

'가만 있거라. 부산 내려가서 보자!'

 이렇게 서대신동에서 만났는데, 처녀 모습이 마치  애련한 한송이 동백꽃 이다. 그렇게 고울 수 없다. 첫눈에 내가 반했다.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는 말은 들었다. 종대 옆에 있는 모습은 노틀담의 곱추 옆 짚씨 여인 같다. 

'이놈이 복도 많구나' 

그날  셋은 송정해수욕장 가서 백사장에서 밤을 새웠다. 수없는 이야기 볓빛에 뿌렸고, 수없는 노래 파도에 묻었다.

 ‘우짜꼬?’

 이튿날 종대가 물었다. 

 '우짜긴 뭘 우째? 뜯어 치아뿌라. 내가 옥이씨 데리고 살란다. 우하하하! ’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옆의 그녀 그 말 들었다. 이런 사연이라, 그뒤 부인은 평생 나를 특별히 생각했다.  전화 걸면  애교스런 경상도 사투리로 그리 반가워 할 수 없었고, 부산 가면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시장에서 사오곤 했다. 언제 셋이 노래방 갔을 때다. 이 노래를 옥이씨에게 바치렵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품에 겨워...나는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밤 깊은 상가에서 친구 부인 눈에 맺힌 이슬 보니,  세월이 무정타 싶었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그날 밤 나는 잠 한숨 붙이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제 나는 물 빠진 갯가에  홀로 선 것이다. '쏴아아! 어디선가 쓸쓸한 썰물소리 들려왔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  송정의 그 밤 셋이 합창한 그 노래가 귀에 들렸다. 

  종대와 이별하고 돌아온 얼마 후다.  케이불 TV에서 수호지를 방영하고 있었다. 거기 무송과 노지심을 보자,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 왈칵 솟았다. 종대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래 핸드폰으로 전화 걸어보니,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  하는 멘트만 나온다. 하도 허망해서 동창록을 꺼내보았으나 집주소가 옛날 집 주소다. 따님에게 전화해도  '없는 번호 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십시오.'한다. 평소 종대와 가깝던 부산 이교장에게 전화해도 그도 모른다. 

  인생의 끝자락은 이런 것인가. 갑자기 발을 헛디딘 것처럼 휘청했다. 전화는 결번이고, 그와 부르던 노래는 관리자에 의해 중단되었다. 멜랑꼬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리움만 파도 속에 오고 또 간다. 이제는 정말  '해운대엘레지'  노래말처럼, 다시 두번 또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저 바다 멀리멀리 던져버려야 하는가.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흐느끼며 살아야 하는가.(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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