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현대에세이 평론/ 김창현의 '대나무의 멋에 대해서'

김현거사 2019. 6. 7. 09:47

특집 : 창작적 현대에세이수필 - 현역작가 편

 

대나무의 멋에 대해서

 

김창현

12kim28@hanmail.net



어릴 때는 대나무를 한 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대나무는 그저 생활용품 만드는 재료거니 생각했다. 아이들은 대나무로 포구총, 방패연, 낚싯대를 만들었다. 어른들은 울타리, 빗자루, 복조리를 만들었다. 장에 가면 죽부인, 대삿갓, 대평상 같은 것이 많이 눈에 보였다.

그러다가 대나무를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백팔십도 발상 전환한 것은 어느 봄날 교또에서다. 차창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즈막한 구릉에 매화가 피어있었다. 비 젖는 매화를 감상하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 대나무다.

대밭은 하얀 안개에 덮혀 있었다. 댓잎에 맺힌 이슬은 은구슬이 되어 땅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미풍에 흔들리며 부드럽게 휘어진 대나무는 선녀가 안개 속에서 섬세한 옷자락을 흔들며 춤추는 것 같았다. 대나무가 저렇게 아름다운 나무였던가.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 편의 시였다. 대나무가 그렇게 청량한 나무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이렇게 대나무의 아름다움에 개안한 후, 드디어 묵죽도(墨竹圖)의 멋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국립미술관에 있는 묵죽도를 보면 그저 덤덤했었다. 비 젖은 우죽도(雨竹圖), 바람에 휘어진 풍죽도(風竹圖), 댓잎에 눈 쌓인 설죽도(雪竹圖), 괴석과 대를 올린 죽석도(竹石圖)가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저 대나무 그림 대가에는 조희룡, 신위, 이정, 민영익, 김규진 같은 분이 있다는 것만 알고 왔다.

그러나 한번 대나무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때가 오십 초반이었다. 묵죽도는 그냥 대나무를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고고한 선비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비 젖은 대나무의 모습, 바람에 휘어진 모습, 눈에 파묻힌 모습, 괴석 옆에 선 모습은 바로 고고한 선비의 초상화 이었다.

소동파는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無竹令人俗)는 싯구를 남겼다. 왜 대나무가 없으면 속되다고 했을까. 백거이는 양죽기(養竹記)’에서 대나무의 미덕을 4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뿌리가 단단하여() 뽑히지 않고, 둘째 성질이 곧아서() 기울지 않고 똑바로 서있으며, 셋째 속이 비어서() 욕심을 버리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넷째 마디()가 정절(貞節)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 (), (), ()은 모두 군자가 본받아야 할 정신적 덕목이다.

그런데 최근 지방에서부터 대나무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대나무 축제 열리는 담양 죽녹원으로, 대숲길 새로 단장한 울산 태화강으로, 진주 남강으로 찾아간다. 죽림의 청량한 공기가 힐링에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대나무의 멋도 알겠다, 은퇴도 했겠다, 이쯤에서 나도 아주 귀향함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사실 내 고향 진주는 대밭이 많은 고장이다. 촉석루 건너편은 말할 것 없고, 남강 상류 곳곳도 대밭이다. 지리산 중산리는 광활한 산 전체가 대밭인 곳도 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유비가 삼고초려한 제갈량 살던 와룡강(臥龍岡) 모습은 이렇다.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깨끗하다. 땅은 넓지 않으나 평탄하고, 숲은 크지 않으나 무성하다. 원숭이와 학이 어울려 놀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름을 더하였다.’

진주 어디쯤이 그런 곳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쌍계사 경내 죽림에 감탄한 적 있다. 거기 대밭은 청량하다 못해 고결하다. 보는 이 마음까지 씻어준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죽림정사(竹林精舍)가 그랬으리 싶다.

터만 잡으면 마당에 괴석과 오죽(烏竹) 올린 화분 하나 놓으리라. 아침엔 먹 갈고 묵죽도(墨竹圖) 치고, 저녁엔 풍로에 하얀 차 연기 올리며 살리라. 미리 그런 생각하며 김칫국부터 마셔보기도 했다.

사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사시던 집 대밭 속 평상은 천국이었다. 거기 새소리는 얼마나 맑던가. 바람은 얼마나 시원하던가. 칡꽃은 얼마나 싱싱하던가. 수박은 얼마나 달던가. 나는 거기서 방학 숙제하고 낮잠 잤다.

수구초심이란 말이 있다. 이제 칠십 넘어서자, 비 그친 대밭에 올라오던 죽순처럼 그런 생각이 쑥쑥 사정없이 올라온다.

(월간문학 201711월호 )

|작법공부|

정태헌의 <대하여>에 이어서 김창현의 <대해서>에 관한 작법공부를 하게 된 까닭은 에세이의 본질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사람은 빈손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사람이 태어난 세상은 알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우주다. 에세이는 바로 저 알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우주를 향하여 너는 무엇이냐?’고 감히 묻는 문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하면 몽테뉴 같은 위대한 문학이 되고, 실패하면 신변잡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만약 어느 시인, 소설가가 자기는 에세이로 성공할 자신이 없어서 시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에세이가 무엇인지 바로 아는 사람일 것이다. 문학평론가로 창작에세이수필 비평을 전문분야로 삼고 있는 필자는 수 없이 에세이 앞에서 절망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감히 우주를 향하여 너는 무엇이냐?’ 물을 수 있는가? 그에 대한 합당한 대답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에세이는 평범과 상식을 거부하는 전문가적 식견을 갖춘 사람의 글이라는 에세이 본질적 정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에세이는 <대하여, 관해서> 묻고 대답하는 양식의 문학인 것이다. 이를 대우법(對偶法)이라고도 하고(백철) 토의 양식이라고도 한다.(몰톤조연현) 이 작품은 대나무에 <대해서, 관해서> 묻고 대답하는 양식의 에세이 작품이다.

작가는 글의 전제로 어릴 때는 대나무를 한 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를 제시한다. 이 문장에서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단어는 당연히 아름답다는 어휘다.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은 인간은 아름다움을 알아볼 줄도 알고, 아름다움에 미칠 정도로 빠져들기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나무에 대해서관심 있는 독자도 있고, 관심 없는 독자도 있겠지만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작품의 제목을 <대나무의 멋에 대해서>라고 잡아 놓고 멋 중에서도 아름다움을 화두로 꺼낸 것이 이 작품이 많은 독자를 얻은 비결일 것이다. 이어지는 문단에서 작가는 매화와 대나무를 결부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선녀가 안개 속에서 섬세한 옷자락을 흔들며 춤추는 것 같은 아름다운 이미지 조성법이 아닌가. 이쯤 되면 독자는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 할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닭은 알을 낳기 위해서 태어났고, 소는 힘 써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과 같다. 닭이 알을 낳지 않고, 소가 일을 하지 않으면 식용이 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끔 만들지 못하면 독자에게 버림 받는다. 그래서 신변잡기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떻게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게 만들고 있는가? 풍부한 자료조사와 소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글과 인생에 쌓인 연륜이 아닐까.

에세이는 창작보다 어려운 문학이다. 그런데 시 한 편, 소설 한 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수필에 뛰어들어 글을 쓰고 있으니 신변잡기소리를 안 듣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