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사시 출제위원과 서울시립대 총장을 역임한 제자 정희채씨의 글이다.
"1945년 10월 이승만 박사의 지방 순회 때 일 이다.
진주는 청년단, 부녀단, 공무원, 진주사범, 진주농고, 진주고, 진주여고, 인근의 군민까지 전부 길에 나가 환영했다.
그러다 진사와 진농의 행열이 서로 얽혀 싸움이 벌어졌다. 진농 학생 천여명이 진사로 몰려왔다. 진주사범 교장은 교기를 앞세우고, 전 교직원과 학생을 데리고 진농에 와서 사죄하라는 것 이었다.
해방 후, 시대는 좌우익 싸움에 백주에 테러가 자행되고, 사람 목슴이 파리 목슴과도 같던 극도의 치안부재 시대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피차 수백명의 사상자가 예상되었다. 쌍방은 대창과 칼, 삽, 쇠스랑등으로 무장하고 벼르고 있었다.
진사 학생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일전을 하고 죽자고 결정했다. 강당에 모여, 손에 붕대를 감고, 죽창을 다듬었다.
사태가 험악하자, 若山 金性奉 선생님이 나섰다. 제자들 생명이 중요하니, 세번이나 진사에 쳐들어와 굴욕적 사죄를 요구하는 진농에, 당신이 목슴을 걸고, 화의사절로 가겠다는 것 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나서자,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가서 죽겠다며, 학생 대표도 나섰다. 朴槿(전 U.N.대사), 姜甲秀, 鄭九鉉(교육자)과 나 였다.
진농에 도착하니, 진농학생들은 젊은 혈기에 전원이 손에 무기를 들고, 운동장에 집합하여, 총공격을 기다리는 살벌한 분위기 였다.
선생님은 태연자약 조회대 단상에 오르셨다. 적의에 가득한 눈들이 선생님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하시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못마땅하면, 당장 밟아죽이겠다는 것 이다.
이때 선생님의 현하 웅변이 터져 나온 것 이다.
"친애하는 진농의 건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여 있는가? 여러 피끓는 젊음이,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왜놈들은 현해탄 너머로 사라져 버렸는데, 그 불구대천의 적은 고스라니 노쳐버리고, 이제 그대들은 내동포, 내형제를 때려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이것이 광주 학생의거같은 목슴을 걸고 싸워야 할 의로운 일입니까? 목슴을 걸고 조국 해방을 맞고, 그 첫번째 일이 겨우 이것 입니까. 이것이 사내로서 꼭 하지 않으면 않될 일입니까? 진사 학생들도 약세지만, 결사대를 조직해 죽기로 작정하고, 명예를 지킬려고 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나는 이 더러운 꼴을 내눈에 담지않고, 심혈을 기울러 키운 내 제자의 목슴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빌다가 죽기 위해서 이자리에 왔읍니다. 싸움의 주원인은, 시장이 대열의 순서를 정해준 것을 어기고, 진농이 진사의 후미대열을 끊은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이 꼴을 보고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할말을 다 했읍니다.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지성 입니다. 자 이 김성봉이를 때려 죽이고, 스승의 시체를 넘어 진주 사범을 공격하시오."
선생님은 팔장을 낀채 단 위에 서 있었다. 미쳐 날띄던 천여명 학생이 숨을 죽였다. 폭풍 전야의 그 무시무시한 고요였다.
그 때 진농 학생 대표는 생각이 깊은 사람 이었다. 간단한 숙의가 끝나자, 학생들을 조회대형으로 정렬 시켰다.
"일동! 선생님에게 경례"
힘차게 외쳤다.
"선생님! 우리들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우려 했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물러서겠읍니다. 선생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훌륭하신 김성봉 스승님께 만세 삼창으로 진농의 의기도 보여드립시다! 만세! 만세! 만세!’
진농 교정 안은 봇물처럼 터진 만세 삼창 소리로 뒤덮혔다. 선생님은 단 위에서 울고 계셨다.
그 후 진농 대표가 오히려 진주사범에 사과하러 가서, 그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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