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선배님 시전집 받아보고/2012년 6월
김여정선배님 아호가 후소(後笑)니 세월이 지난 후에 웃으신다는 뜻일까. 여든 앞둔 이번 두번째 시전집내어 평생의 시를 정리해놓고 미소하신다는 뜻일까. 시전집이 그냥 시집이 아니다. 근 1500 페이지에 달하는 대형 전집이다. 93년에 낸 <김여정 시전집>에 이어 두번째 시전집이라 한다. 시력(詩歷) 45년의 한국 시단의 원로답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기 문학을 '올레길'이요, '차마고도'라고 했다. 온 길은 얼마나 험했고, 앞으로 갈 길은 또 얼마나 가시에 찔려 쩔뚝이며 그 높고 황량한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하였다. 치열한 작가정신이 아름답다. '앞으로는 깨끗한 한지(韓紙) 한 장에 햇볕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한다. '그 욕심까지는 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라 한다. 담담 정갈한 무욕에 대한 염원이 존경스럽다. 서문이 맘에 쏙 든다.
나는 아침마다 정원에 나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즐거움이다. 밤새 밀폐된 공간에 있던 폐부에 맑은 공기 주입하는 일이 기쁨이다. 새소리 듣는 것도 취미다. 피고지는 꽃 보살피고 생각에 잠긴다. 의자 앞에 매화나무가 있다. 그 나무에 달린 작은 풍경을 간혹 바람이 흔들고 간다. 바깥 일엔 아예 귀 닫고 산다. 뉴스도 별로, 손전화도 별로다,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비운 마음에 원로 여류의 시를 채운다. 꽃을 보다가 시전집을 읽다가 한다. 엄청난 부피를 가진 책은 뜰에 있는 작은 대리석 탁자 위에 놓여있다. 그 책 속에서 꽃 같은 시의 향기가 무진장 나온다. 보석함이 이처럼 귀할까. 책엔 젊은 시절 미모와 시재로 장안의 이목 집중시킨 한 여류의 혼이 담겨있다. 그 분의 사진 속 우수 담긴 쌍가풀진 눈 영원히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눈빛이었을 것이다.
시를 읽으며 시가 내 정원 속의 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시는 지금 막 꽃대가 올라오는 그라디오라스 같다. 주렁주렁 달린 상큼한 빛이 눈을 현혹한다. 어떤 시는 나무를 휘감아 오르는 여주 같다. 마음을 휘감아 오른다. 우툴두툴한 노란 황금빛 껍질 속에 빨간 열매가 숨어있다. 장미를 보다가 저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저자는 백장미일까. 핑크장미일까. 백일홍 보다가, 나리꽃 보다가, 다시 시집을 읽는다. <은난초꽃>이라는 시는 몇번씩 읽었다.
이렇게 청초하고 수줍은 여인이 있었나
저녁 으스럼 조심 조심 밟아 내려오는
운악산 산자락
울울한 나무 그늘에 없는듯 조용히
해맑은 미소 머금고 있는
은난초꽃
수줍디 수줍은 생면부지의 젊은 여인이
나도 몰래
내 마음을 빼앗아 가고 말았네
왜 장못으로 얼굴 가린 아리따운
'조선의 여인'이 떠올랐을까.
은(銀)의 광택
난초의 기품과
은은한 향기를 두루 갖춘 여인의 모습
청아한 은난초꽃
참으로 뜻밖의 귀한 만남
오래 오래 내 가슴 깊은 산자락에서
새벽이슬 같은 꽃 피우고 있으리
이 분이 내고향 진주 선배님인 것이 자랑스럽다. 저자가 책에 담은 사진들을 본다. 박종화, 김남조. 김소운, 전숙희,조경희 수필가. 신석초, 박목월, 구상, 조병화, 모윤숙, 이영도, 김후란, 허영자,추영수, 유안진 시인과 함께 한 사진, 송지영, 김구영 선생이 저자에게 보낸 휘호도 실려있다. 문득 이 분이 소녀 때 거닐며 시심을 키운 곳 생각해본다. 촉석루 서장대 남강을 떠올려 본다. 이 분은 진주성 성곽에 핀 한떨기 은난초꽃 이었을까. 신외무물(身外無物), 항상 건강 하시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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