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천리길 2

이유식의 에세이집, '풍속사로 본 한국문단'을 읽고 /2016년

김현거사 2018. 5. 12. 08:18

 

이유식의 에세이집, '풍속사로 본 한국문단'을 읽고/2016년

                                                       김창현/수필가

 

 

 가방 끈 짧은 놈이 글은 어렵게 쓴다고 한다. 쉬운 내용 어렵게 쓰는 사람 있고, 어려운 내용 쉽게 쓰는 사람 있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한국문인협회 고문 이유식 교수 글은 후자에 속한다.

 그가 최근 내놓은 에세이집 원제 '문단 풍속, 문인 풍경'('풍속사로 본 한국문단')은, 문단 경력 50년  이상의 한 원로작가가 그가 만났던 사람, 문단에 흘러간 이야기 등 아무도 몰랐던 문단골 뒷이야기를 그야말로 구수하게 풀어놓았다.

 문인들의 필명과 아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 애창곡, 문인들 단골 술집과 다방, 문단에서 벌어진 외설 시비, 집필 습관, 자유연애, 문단 권력과 문협 이사장 선거 등, 우리가 궁금한 문단 이면사가 재미있는 각도에서 르포르타주(reportage) 되어있다.

 본인 생각은 '문단풍속박물관' 내지 '풍속사 인명사전' 하나 내놓는 것이라 한다.

 

 아호(雅號)는 불교에 법명이 있고, 기독교에 세례명이 있듯이 문인과 예술가들의 아취와 정이 넘치는 풍속이라 한다.

 팔봉(八峰) 김기진은 태어난 충북 청원군 팔봉산 밑이라 취한것이고, 노산(鷺山) 이은상은 마산에 놀러왔던 이광수, 박종화, 양주동이 생가 뒷쪽에 해오라기가 날고있는 노비산(鷺飛山)을 보고 가운데 글자를 빼고 호를 따왔다고 한다. 수주(樹州) 변영로는 고향인 부천 옛 이름에서 따왔다. 시조시인 설악(雪嶽) 조오현은 그가 회주인 백담사의 설악산에서 따왔다.

 박종화는 달여울이 좋기에 월탄(月灘)이고, 이병기는 강이 좋기에 '가람'이고, 김진섭은 냇물소리 듣기 좋아서 청천(聽川)이고, 김달진은 달이 좋아 월하(月下)이다.  

 

 파이프 애용 작가는 박종화, 유주현, 오영수, 이병주가 있고, 시인은 오상순, 이상, 서정주, 조지훈, 조병화, 신동엽인데, 오상순만 상아빨뿌리였고, 다른 분들은 마도로스파이프 였다.

 베레모 애용한 시인은 서정주, 유치환, 김수영, 조병화 있고, 소설가로는 황순원, 김상옥, 정종명 있고, 여성 문인중에는 정연희 김녕희, 김지연 있고, 수필가 김시원, 지연희 있다.

 서양에는 피카소가 파이프 담배와 베레모를 애용했고, 싸르트르가 파이프 담배를 즐겼다고 한다.

 

 노래 18번은 서정주는 김세레나의 '쑥대머리'고, 조병화는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고, 박재삼 시인은 고향 삼천포 부둣가를 연상한 고운봉의 '선창'이고, 수필가 정목일은 안정애가 부르고 뒤에 조용필이 리바이벌한 '대전블루스'다. 마광수는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이고, 조정래는 '눈물 젖은 두만강', 박범신은 '봄날은 간다', 44세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발을 헛디뎌 비명횡사한 여성시인 고정희는 양희은의 '이룰 수 없는사랑'을 좋아했다.

 

 문인 중엔 이태백과 두보처럼 술을 좋아한 주선(酒仙), 주호(酒豪), 주광(酒狂)도 많다.

 주선이나 주호급으로는 염상섭, 현진건, 변영로, 조지훈, 김동리, 마해송이 있다.

 이중 염상섭은 술 먹고 비틀거려 호가 횡보(橫步)인데, 그가 젊은 시절 오상순 변영로 등과 지금 성균관대 뒤 약수터에서 대취하여 마침 비가 오자 옷을 몽땅 벗은채 소를 타고 민가까지 내려왔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양주동이 도꾜에서 같이 하숙할 때 보리 밥풀로 잉어 낚듯, 처음엔 그를 꼬득여 술을 사준 후 결국 염상섭의 돈을 여러번 털어먹은 적 있다고 글에서 실토한 적 있다.

 현진건은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스타일인데,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 술에 떡이 되도록 대취하여 우연히 사장 인촌 김성수와 복도에서 마주치자 자기 앞을 가로막는다고 인촌의 뺨을 후려친 적 있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는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온다.'고 했다. 문학이 있었기에 술이 있었고, 술이 있었기에 문학이 살아있었다. 

 1950년대 문인들이 자주 드나든 술집은 남대문로 2가에 있던 찻집 '문예쌀롱'에서 멀지않던 '명천옥'인데 이른바 '김동리 사단' 문인들이 자주 모인 곳이다.

 탈렌트 최불암의 모친이 명동극장 옆 골목에 문을 연 '은성'은 터줏대감이 변영로, 이봉구, 김광균, 천상병, 전혜린 이다.

 60년대로 들어서면서 막걸리집 '은성'과 달리 양주집이 생겼다. 퇴계로에 있던 술집 '포엠'이다. 국산 리베라 위스키 시험장으로 문을 열었는데, 맥주도 팔았다. 단골 문사는 이진섭, 이봉래, 김수영, 박계주, 송지영, 정한숙, 선우휘 마해송이다. 술은 못하지만 분위기에 젖어볼까 하여 공초도 가끔 들렀는데, 마담은 공초가 일부러 찾아준 관심이 고마워 꼭 담배 두 갑씩을 선물했다.

 80년대로 오면,송지영, 이병주, 조병화가 단골인 관철동의'사슴', 천상병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생계수단으로 연 인사동의 '귀천', 트럼펫의 황제 이봉조 누님이 경영하던 '사천집'이 유명했다.   

 

 다방도 문인들의 아지트다. 1950년대 문인들 주무대는 명동의 다방이다. 다방은 문화예술인의 만남과 교루가 이루어지는 곳이요, 연락처며 사랑방이요, 집 밖의 집필실 구실을 했다. 여기서 시화전이나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기자로부터 원고 청탁도 받고 또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명동 초입에 있던 '마돈나'는 소설가 손소희, 수필가 전숙희, 두 미인이 열었는데,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 넷을 두고 혼자 살고있던 소설가 윤금숙이 얼굴마담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이 집 단골은 시인 정지용, 김영랑, 소설가 김동리, 평론가 조연현, 소설가 김광주 이다. 특히 김동리는 손소희에게 꿍심이 있어 자주 들렸는데, 결국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고, 김송은 윤금숙과 동거하게 되었다.

'갈채'는 명동 한 한복판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박종화, 양주동,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박목월, 손소희, 신인시절의 박경리가 드나들었다.

 동방문화회관 1층에 있던 '동방쌀롱'은 김광섭, 모윤숙, 이헌구, 안수길, 백철, 박인환, 김수영, 화가 천경자가 자주 찾던 곳이다.

 

 그 다음 언급해둘만한 곳은 '휘가로'와 '청동다방' 이다.

'휘가로'는 시인 이진섭의 누님이 경영하던 부산 '휘가로'를 옮긴것인데, 조풍연, 김광주, 김수영, 이진섭, 박인환이 드나들었다.

 이진섭과 박인환은 1956년 이 집 옆의 막걸리집 '경상도집'에서 가수 나애심을 만나자, 박인환이 종이를 꺼내 단숨에 후에 '명동의 샹숑'으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을 작사했고,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붙여 나애심에게 건네 노래를 청해, 1차 신곡발표회(?)를 했는데, 박인환은 그 가사가 유언인양 1주일 쯤 지난 후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만다.

'청동다방'은 사보이호텔 뒤에 있었는데 '공초' 오상순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그는 매일 오후면 출근하다시피 나와서, 늘 묵상하는 자세로 마치 향불을 피우듯 생불인양 담배연기를 피워올렸고, 찾아온 사람에게 '청동산맥'이란 낙서첩을 내밀었다. 거기 노산 이은상은 '오고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라고 그의 도인같은 면모를 적었으며, 박경리는 '자학의 합리화가 종교이며, 자학을 벗어나 경지에 신이 존재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문인과 자유연애는 무관하지 않다. '인생의 연애는 예술이요, 남녀간의 예술은 연애'라고 설파한  이광수부터 살펴보자.

 이광수와 허영숙의 염문은 1910년대 우리나라 자유연애의 스타트다.

 이광수는 1915년 와세대 대학에 편입하여 의학전문학교에 유학 중이던 허영숙을 만나 폐결핵을 헌신적으로 도와준 허영숙과 결혼했다. 또 미술학교에 유학 중이던 나혜석과도 연애를 했다. 물론 고향에 부인이 있던 유부남일 때다.

 1920년대는 양주동이 문학소녀 강경애와 한 문학강연회에서 만나 눈이 맞았다가 주변의 눈총을 받아 강경애가 만주로 떠나는 바람에 끝났다.

 평론가요 극작가인 김우진은 와세다대학을 다닐 때 성악가로 유명했던 윤심덕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고향에 아내와 1남 1녀를 둔 가장이라 둘은 현해탄에서 투신자살하게 된다. 그 당시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다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사(死)의 찬미'란 노래 때문에 이 이룰 수 없어 죽음으로 끝낸 정사는 청춘들에게 큰 감명을 남겼다.

 1930년대는 백철과 송계월의 염문이 있다. 백철은 도쿄고등사범 영문과 졸업하고 신진 평론가로 '개벽'사에 입사했다가 미인으로 국내 언론계에 두루 인기가 있던 송계월을 만나 사내연애로 발전했으나, 송계월이 폐병으로 저 세상으로 가는 바람에 유행가 노랫말처럼, '나팔꽃 같은 속절없는 짧은 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다음 시인 백석과 김영한(子夜)의 순애보가 있다. 백석이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로 있을 때, 교사들 회식 장소에 기생으로 자야가 나타났다. 그 뒤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두 번이나 혼례를 치뤘지만 뿌리치고 서울로 올라와 자야와 3년간 동거생활을 한다. 그러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즈음 만주로 떠나 생이별 했는데, 훗날 자야는 1천억원이 넘는 요정 대원각 재산을 길상사에 내주며 그 재산보다 백석의 시 한 줄이 더 값지다는 말을 남겼다.

 수필가 나혜석은 도쿄 여자미술전문학생 시절 이광수와 만나 연애를 했고, 서울로 와서 김우석과 결혼했지만, 파리에서 외교관 최린을 만나 염문을 뿌렸다. 

 김일엽은 어느 재산가와 파혼하자 연희전문 교수였던 이노익과 결혼한다. 그후 도쿄에서 시인 임장화와 동거하고, 일본 청년 오타 세이조를 사귀었다. 방인근과 사귀어 스캔들을 일으켰고, 동아일보 기자 국기열을 만나 동거했고, 불교학자인 백성욱과 동거했고, 대처승 하윤실과 결혼했다. 그의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처럼 살다가 만년에 수덕사 비구니가 되었다.

 소설가 김명순은 평양 부호 김우방 도움으로 이화학당 다닌 것을 계기로 경성에서 동거했고, 그후 도쿄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화가 김찬영과 그의 친구 임장화와 연애를 하고, 귀국해서도 숱한 염문을 뿌렸다. 그래 평론가 김기진이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이란 글을 남겼고, 김동인도 '김연실전'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전영택이 '김탄실과 그 아들'이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후 김명순은 도쿄로 건너가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로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병사했다.

  또 청마 유치환과 시조시인 이영도와의 사랑도 순애보인데, 이영도는 후에 청마에게서 받은 2백여통의 서간을 간추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를 펴냈다.      

 

 문인 중에 글씨가 달필인 사람 있고, 악필인 사람 있다.

 달필가는 오상순, 이상화, 채만식, 이효석, 김영랑, 유치환, 이상, 박인환이 있고, 악필가는 이광수, 정비석, 백철, 피천득, 박완서, 최인호, 이해인이 있다. 백철은 글씨가 흡사 지렁이가 꼬물꼬물 기어가는 듯했고, 정비석은 글씨가 크고 굵지만 삐딱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맵시있게 알아보기 쉬운 글씨를 쓴 사람은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이주홍이 있다.

 

 부부가 문인인 경우는 김동환(시)과 최정희(소설), 김동리(소설)와 손소희(소설), 이어령(평론)과 강인숙(평론) 등이 있다.

 부자가 문인인 경우는 박목월(시)과 박동규(평론), 황순원(소설)과 황동규(시), 마해송(아동문학)과 마종기(시), 김광주(소설)와 김훈(소설)이 있다.

모녀가 문인인 경우는 장덕조(소설)와 박하연(시) 박영애(소설) 자매가 있고, 최정희(소설)와 김지원(소설) 김채원(소설) 있다.

부부가 문인인 경우도 있고, 부전자전, 모전여전, 장인사위, 장모사위, 형제문인도 있다.

 

 노이즈마케팅(noise marketing)이라해서, 요란한 이슈를 만들어 구설수에 오르거나 화제거리로 인지도가 높아진 작품도 있다.

 '민중문학'으로 대두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황석영의 '객지', 송기숙의 '암태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등이 그것이다.

 1956년 한국일보 일요판에 게재된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도 그런 류에 속한다. 20대의 서울대 국문과 학생인 그가 문단의 기라성같은  김동리, 황순원, 염상섭, 서정주, 백철, 조연현을 비판하여 깔아뭉갠 사건이다.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도 그런 류다. 마광수는 '즐거운 사라'가 사건화 되어 두 달 동안 수감생활 했고, 건국대 교수 박승훈은 '영점하의 새끼들' '서울의 밤' 때문에 음란서적 제조 및 반포 혐의로 서울지검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고, 법정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괴테가 23세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품'을 썼고, 프랑스아즈 사강이 18세에 '슬픔이여 안녕'으로 세계적 화제작가가 되었지만, 우리나라도 김소월이 19세 때 '창조'지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고, 조지훈이 21세 때 '문장'에서 등단했다. 박목월과 박두진 24세 때 등단했고, 이상은 22세 때, 김동리는 23세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었다.

 단명하여 20대에 사망한 작가는 윤동주(29), 나도향(25), 김유정(29)이 있고, 30대에 간 작가는 박인환(31), 이효석(36), 방정환(33), 심훈(36)이 있다. 

 

두마리 토끼를 잡아 금배지를 단 문인은 '파초'의 시인 김동명이 있고, 경북대 학장 출신 이효상, 경남일보 사장 설창수, 팔봉 김기진의 아우 김성진, 모윤숙, 킹메이커 김윤환, 언론인 송지영, 김춘수 시인, 4선의원 김중위, 소설가 김흥신, 소설가 김한길이 있다.

 

 이상 이유식 교수의 '풍속사로 본 한국문단' 내용을 대충 흝어보았다.

 문인들은 책이 안팔린다고 한탄하고, 독자들은 읽을만한 책이 없다고 한탄한다.

 이 책은 이교수의 박학강기와 해박한 지식이 담겨있다. 다시 말하건대 오십 가지의 다양한 주제로 펼쳐진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혀놓았듯이 명실상부한 한국 최초의 문단풍속사요 인명사전도 되리라 본다. 

 한번 음미해볼 책이라싶어 일독을 권한다.